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563
백의백발이 가볍게 나풀거리는 동안 한제는 우뚝 선 채 저 위에서부터 내리 떨어지는 산봉우리를 바라보다가 돌연 주먹을 쥐어 힘껏 뻗었다.
콰쾅!
한제의 주먹이 산봉우리로부터 1천 척 정도 떨어진 허공을 때린 순간, 굉음이 울려 퍼지면서 산봉우리가 바르르 진동했다. 이에 떨어져 내리는 속도가 상당히 줄어들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한제를 압박해왔다.
반면 산봉우리와 충돌한 한제 주먹의 허상은 경련하다가 산산조각이 났다. 그와 동시에 한 줄기 어마어마한 압력이 한제를 압박하면서 그와 세상을 분리시켰다. 한제를 포함한 주위 공간이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온 셈이다.
“재미있군!”
한제는 피식 웃었다.
저 원시산의 위압감은 고조의 손짓으로 발휘되는 위압감과 놀라울 만큼 비슷했다. 차이가 있다면 고조의 손짓은 분할시킨 세상을 무너뜨려 적을 죽이는 데 반해 원시산은 공간을 분할시켜 그 안에 갇힌 사람을 붙잡아둔 상태로 짓눌러 죽이는 방식이었다.
“과연 대천존인가? 아홉 대천존 중 약자는 없겠지. 각 대천존은 서로 다른 신통술을 가지고 있어. 이 신통술은 비록 신술은 아니지만 매우 강력해.”
한제는 점점 더 가까워지는 산봉우리를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동시에 눈은 차갑게 번득였다. 원시산의 위력은 분명 비범했지만 그다지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현재 그의 수준으로는 선강 대륙에서 고도 외의 누구도 두렵지 않았던 것이다.
한제는 덤덤한 표정으로 오른손을 들어 원시산을 가리켰다.
고조의 손짓!
그 손짓에 하늘과 땅의 기색이 변하고 바람과 구름이 휘몰아치면서 원시산에 의해 분할된 공간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이어서 한제 주위로 줄기줄기 균열이 일어나더니 순식간에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한편, 원시산은 수백 척 위에서 우뚝 멈추더니 떨리기 시작했다. 허나 그뿐, 더는 아래로 내려오지 못했다.
그때였다.
콰르릉!
분할된 공간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한 걸음에 그 안에서 빠져나온 한제는 송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더 해볼 텐가?”
한제의 심드렁한 목소리에 송천은 이를 악물더니 몸을 훌쩍 날려 원시산 위에 섰다. 이어서 혀끝을 물어 피를 뿜어냈다. 피는 안개를 이루어 순식간에 원시산으로 흡수됐다.
송천은 재빨리 가부좌를 틀더니 두 손으로 결인을 그리고는 낮은 소리로 호통 치듯 외쳤다.
“원시 진압!”
그러자 원시산은 우렁찬 소리와 함께 진동했고 다시 한제를 향해 내리 떨어지기 시작했다.
“흠, 끝장을 볼 생각인가?‘
한제는 고개를 두어 번 젓더니 몸을 훌쩍 날려 원시산 바로 아래에 나타나더니 가볍게 두들겼다.
그의 손이 닿은 순간, 원시산은 요란하게 경련했다.
“큭!”
이어서 원시산 위에 가부좌를 틀고 있던 송천은 피를 토하며 나가떨어졌다.
그때, 시고 황성에서 날아들던 빛들이 속속 도착하더니 수십 개의 인영이 되었다. 선두는 황포를 입은 노인으로 그는 한제를 보자마자 표정이 급변했다.
허나 한제는 그들에게는 신경조차 쓰지 않고 원시산을 향해 소매를 휘둘렀다. 그러자 원시산은 빠르게 회전하면서 줄어들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손바닥만 해져 한제의 오른손 위로 떨어졌다. 작아진 모습은 마치 소뿔 같았다.
한편, 이 광경을 목격한 송천은 창백한 얼굴로 비틀거리며 다시 물러났다. 역대 시고 일맥 대천존 중 원시산의 크기를 줄이는 데 성공한 사람은 없었다.
긴 한숨을 내뱉은 송천은 씁쓸하게 웃더니 한제를 향해 포권을 하며 허리를 깊이 숙였다.
“나의 패배를 인정하겠네.”
말을 마친 송천은 고개를 돌려 방금 몰려든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하나같이 큰 충격에 빠진 표정이었다.
“난 시고 일맥의 수호자이자 대천존으로서 오늘 이 자리에서 계도 황자를 인정하겠네. 1백 년 후, 계도는 우리 시고 일맥의 새로운 황존이 될 것이야!”
뒤이어 송천은 황포 노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노인, 시고 황존은 할 말이 있는 듯 망설였으나, 이내 입을 꾹 다물더니 송천을 향해 포권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계도 황자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꿈에도 그리던 것을 이토록 간단하게 손에 넣자 약간 혼란스럽기까지 했다. 허나 그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마음을 다잡고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이어서 그는 송천과 아버지, 다른 황자들과 시고 일맥의 여러 강자들이 보는 앞에서 가장 먼저 한제에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양아버지.”
송천을 포함한 모든 이들이 믿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흠칫 놀랐다. 그 무엇보다 황권을 중시하는 고족의 황자가 그것도 차기 황존으로 임명된 상태에서 누군가에게 무릎을 꿇고 양아버지라 칭한 것은 그만큼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계도 뭐하는 짓이냐!”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시고 황존 곁의 중년 사내인 첫째 황자였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불만스러웠지만 힘이 없었기에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치만 역시 앞으로 나섰다.
“형님, 황자로서 어찌 멋대로 다른 이를 아버지로 삼을 수 있습니까! 특히 형님은 황존이 될 사람! 한데 어찌 무릎을 꿇는 겁니까?”
한편, 시고 황존은 계도가 한제에게 무릎을 꿇은 순간 표정이 어두워졌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아우성에 계도는 안색이 창백해졌지만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한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계도는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황존이 된 후라도 한제를 양아버지로 모실 것임을 공표한 것이다.
한제 역시 그런 계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계도에게 이 정도의 기백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기에 내심 감탄하기도 했다. 단지 자신과의 약속 때문이라면 이렇게까지 할 것 없이 몰래 지킬 수도 있다. 그게 오히려 훨씬 순조롭게 황존에 등극할 방법일 것이다.
여기저기서 계도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지만 송천과 시고 황존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허나 눈빛만은 점점 무거워졌다.
“계도 너를 나의 양자로 받아주마!”
한제가 선언하듯 말했다.
계도는 그제야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사실 여태 한제가 그를 양아들로 받아주겠다고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저 자신이 일방적으로 한제를 양아버지로 모셔왔을 뿐이다. 이에 계도는 다시 한번 절을 올렸다.
“백 년 후, 너는 시고 황존이 될 것이다!”
한제는 다른 이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시고 황성 쪽을 바라보았다. 시고 황성에도 도고 황성처럼 거대한 조각상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 고조의 조각상이었다.
‘저곳에 조묘가 있다.’
한제의 말에 첫째 황자와 치만이 막 뭔가를 따지려 하던 그때였다. 시고 황존이 빙긋 웃더니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내 아들이 이존을 양아버지로 모시게 된 것은 분명 행운이며 우리 시고 일맥의 영광이지. 난 도고 황존처럼 시비를 구분하지 못하여 이존을 핍박하고 화를 불러오는 그런 머저리가 아닐세. 그러니 부디 이존이 우리 시고 일맥에 남아주기를 바라네. 원하는 것이 있다면 내 무엇이든 해주겠네.”
노인은 이어서 한제에게 포권을 올렸다.
“이 형, 따로 갈 데가 없다면 이곳에 머물면서 계도가 황존이 되는 순간을 직접 보는 것이 어떻겠나?”
송천 역시 미소를 지어 보이며 한제에게 말했다.
“아바마마, 양아버지께서는 조묘에 가기를 원하십니다. 이 일에는 아바마마의 동의도 있어야 할 줄 압니다.”
뒤이어 몸을 일으킨 계도가 시고 황존을 향해 공손하게 말했다.
“조묘? 이존께서 가고 싶어 한다면 당연히 그리 해야지.”
시고 황존은 웃으며 답했다. 어찌 동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고족 구역 전역을 통틀어 단 세 개뿐인 조묘는 각각 세 황성에 세워진 고조 조각상 아래에 있었다.
고족 사람들은 성년이 되어 세 번째 손겁을 마주했을 때 조묘에 방문할 수 있지만 아주 깊은 곳까지는 들어가지 못했다. 심지어 대천존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황족 사람들만이 조묘 깊은 곳에서 손겁을 통과할 수 있었다.
시고 황성의 중심. 한제는 하늘을 떠받칠 듯 거대한 고조의 조각상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도고 황성에 있던 것과 똑같은 이 조각상의 고조는 뒷짐을 진 채 경멸이 어린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 번째 답천교를 건너기 전의 한제는 도고 황성에서 이 조각상을 봤을 때 별다른 느낌을 받지 못했다. 허나 지금, 이 조각상은 이전과 매우 다르게 느껴졌다.
조각상의 눈에 드러난 경멸과 불만의 빛은 표면적인 기색에 불과했다. 그 눈 깊은 곳에서 한제는 숨겨진 슬픔을 읽어낼 수 있었다. 이 슬픔은 스스로를 향해 있는 것 같기도 중생을 향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이 고조의 조각상은 누가 조각한 건가?”
한제가 조용히 물었다.
“고도 대천존이라네.”
옆에서 송천이 조각상을 올려다보며 답했다.
“고조가 사라진 이후 고도 대천존은 어디인지 모를 곳에서 세 개의 산봉우리를 찾아와 직접 이것들을 조각한 뒤 세 황성에 세워두었지. 그래서 우리와 같은 고족 후손들은 고조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또 세월이 흘러도 그 모습을 잊지 않을 수 있었던 게야.”
한제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는 어떤 종족에게든 반드시 마음을 의지할 상징적인 존재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정신적 지주가 없다면 종족은 오랫동안 이어지지 못하고 세월의 흐름 앞에 소멸하고 말 것이다.
보아하니 고조의 조각상과 그에 관련된 여러 전설은 세 고족에게 그런 존재인 듯했다. 이 조각상이 있어서 고족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만 봐도 고족의 수호자인 고도 대천존이 얼마나 지혜로운지 알 수 있었다.
조각상 아래에는 한제와 송천만이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 서 있었다.
잠시 후, 시고 황성 황궁 쪽에서 뭔가를 중얼거리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동시에 어스름한 빛 한 줄기가 쏘아져 나와 이곳에 이르더니 고조의 조각상 주위를 맴돌며 어두운 빛 고리들을 형성했다.
조각상 아래, 고조의 두 발 사이에는 거대한 반원 형태의 문이 하나 있었다. 본래 닫혀 있던 이 문은 어두운 빛 고리가 형성됨에 따라 콰쾅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조묘가 열렸군. 난 여기까지만 배웅하도록 하지. 몸조심하시게!”
송천이 한제를 향해 포권을 했다.
한제는 진지한 눈으로 문을 바라보았다. 그가 모완을 태고 신경으로 데리고 들어갈 수 있느냐 없느냐는 세 번째 손겁을 통과하고 혼혈 두 방울을 얻을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었다.
한제 역시 송천에게 포권을 하고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조묘를 향해 나아가 이내 그 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조묘 안으로 들어간 순간, 조묘의 문은 다시 천천히 닫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1각 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완전히 닫혀버렸다.
고조 조각상 주위에 나타난 어두운 빛 고리 역시 점점 흩어져 사라지면서 한 줄기 빛이 되어 다시 황궁으로 날아갔다.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던 송천도 조용히 한숨을 내쉬더니 떠나갔다.
시고 일맥 사람 대부분은 고조 조각상을 맴돌던 빛 고리를 보았지만 한제가 그 안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이 일을 발설하지 말라는 시고 황존의 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고 일맥은 이전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세심한 사람이라면 내내 밖으로 돌던 계도 황자가 황궁에 머무르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다.
10년 후, 왕에 봉해진 첫째 황자는 말없이 황궁을 떠나 변방을 지키게 됐다.
다시 5년이 지났을 때, 당초 차기 황존으로 거론되던 치만 황자 역시 왕에 봉해져 시고 황성을 떠났다.
이후로 15년이 흐르면서 다른 황자들도 하나하나 왕이 되어 황성을 떠났다. 이렇게 30년이 흘렀을 때, 황성에 남은 황자는 계도뿐이었다.
이 30년 동안 계도 황자는 조용히 황궁 안에 머문 채 바깥과는 거의 접촉하지 않았다. 이미 황존으로 정해진 만큼 이제 몰래 무슨 수작을 부릴 필요는 없었다.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