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570
안개 속에 모습을 감춘 고도가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고족 구역을 떠날 수 없다라.”
한제가 눈을 번득였다.
“내가 자네를 막지 못한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자네는 이곳을 떠날 수 없네.”
안개 속 인영이 노쇠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랫동안 막아둘 생각은 없어. 3백 년, 우리 고족 구역에 3백 년만 더 머물러주게. 태고 신경이 열린 후에는 마음대로 떠나도 좋아.”
“이유가 뭐지?”
잠시 고민하던 한제가 말했다.
“이유는 없네. 난 자네가 떠나게 둘 수 없어. 반드시 자네를 이곳에 남겨둬야만 해. 싫다면 나를 꺾고 가게!”
안개 속 고도의 목소리는 전보다 더 가라앉아 있었다.
한제는 싸늘한 눈으로 안개 속 인영을 바라보았다.
“이 이한제는 평생 은원을 분명히 했네. 자네는 내게 세 번의 도움을 주었어. 고도산에서 자네의 위압감을 빌려 선력과 고족의 힘을 융합한 것이 첫 번째! 도고 황성에서 엽도를 죽였음에도 나를 벌하려 하지 않은 것이 두 번째! 시고 일맥의 계도를 새로운 황존으로 세웠으나 저지하지 않은 것이 세 번째! 그러니 자네가 이유를 대지 않는다 해도 고족 구역에 1백 년은 더 머물겠네. 허나 남은 2백 년은 떠나 있어야겠어.”
한제의 말에 안개 속 인영은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1백 년으로는 부족해. 반드시 태고 신경이 열릴 때까지 기다려야 하네. 이한제, 난 자네와 싸우고 싶지 않아. 난 누군가와 싸워본 지 아주 오래됐지. 그저 자네가 3백 년간 이곳에 머물러주기를 바랄 뿐이야. 그렇게만 해준다면 보상도 하겠네.”
안개 속 고도가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한제 역시 고도와 싸우고 싶지는 않았다. 두 사람의 관계는 매우 복잡했다. 그러니 고도가 적당한 이유만 댄다면 한제로서도 상대와 싸울 이유가 없었다.
선강 대륙 최강자의 싸움 (2)
“묻고 싶은 것이 있네. 자네의 수준이라면 선족 내 강자들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을 터. 한데 어째서 그들을 그대로 놔두는 것인가?”
한제가 불쑥 물었다.
안개 속 고도는 다시 침묵했다.
여태 고족이든 선족이든 가릴 것 없이 수많은 같은 의문을 가져왔다. 그러나 그 질문의 답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누구도 감히 고도에게 그런 질문을 할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고조의 은혜로 얻은 것은⋯⋯ 자네와 달라.”
한참 뒤에야 안개 속에서 고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복잡한 심경 어린 목소리였다.
안개 속 고도를 바라보며 잠시 고민하던 한제는 곧 뭔가를 깨달은 눈치였다.
“좋아, 이한제. 나와 싸워 이기고 떠나거나, 이곳에 남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하게! 세 번째 선택지는 없네!”
고도의 모습을 감춘 안개가 마구 꿈틀거리며 요란하게 콰르릉거렸다. 그 소리는 장벽이 된 바닷물이 철썩이는 소리와 섞여 어마어마한 위압감을 발했다.
“오게!”
한제는 고개를 번쩍 쳐들며 두 눈을 밝게 번득였다.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자신과 고도 중 누가 선강 대륙 최강자인지 가려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였다.
선조와 고조가 행방불명된 이후 처음으로 이루어지는 선강 대륙 최강자의 싸움이었다.
고도는 아주 오래 전 이미 답천의 경지에 발을 들인, 대천존을 죽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한제는 선력과 고족의 힘을 융합한 상태였다. 수준은 아직 완전하지 않았지만 두 개의 완성된 진신을 가지고 있는 데다가 답천의 경지에 발을 들인 그가 허상의 본원까지 완성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게다가 그에게는 허무의 분신도 있다. 거의 1천 년에 달하는 시간 동안 허무 안에서 끊임없이 성장하고 있던 분신과 융합한다면 그 위력이 어느 정도일지 자신도 알지 못했다.
고도의 모습을 가린 안개가 꿈틀거린 순간, 그 안의 고도 대천존이 한 걸음 성큼 달려들었다. 그의 주위로 일어난 안개가 하늘을 뒤덮을 듯 확산되면서 거대한 안개 흉수를 형성했다.
흉수의 모습은 기이했다. 머리는 무려 아홉 개로 한제가 당시 고신의 땅에서 봤던 길궁과 무척 비슷했다.
아홉 개의 머리는 찢어질 듯 포효하면서 잔인한 눈빛을 번득였고 오래된 기운을 풍겼다. 마치 이 안개 흉수의 혼은 아주 오랜 세월을 살아온 것 같았다.
안개 흉수 안의 고도 대천존은 성큼 한 걸음을 내딛으며 전방을 가리켰다. 그러자 안개에 휘감긴 손가락 끝의 기이하게 굽은 손톱에서는 서늘한 빛이 번득였고 세상이 변하기 시작했다. 천지가 모두 수없이 많은 가는 선들로 뒤덮였다. 창궁 안팎이 모두 규칙으로 휩싸인 것이다.
규칙을 나타내는 가는 선들은 모종의 힘으로 통제되듯 일제히 한제에게 달려들었다. 뿐만 아니라 바람과 구름, 천둥번개, 심지어 금, 목, 수, 화, 토 오행의 신통술까지 한제에게 돌진해왔다.
눈 깜짝할 사이 한제에게 접근한 신통술들은 한데 응집해 대량의 신통술과 규칙의 선으로 이루어진 허상의 손가락을 형성했고 굽은 손톱이 달린 손가락은 파멸의 힘을 품은 채 한제의 미간을 가리켰다.
고도 대천존, 그는 역시 선강 대륙 최강자였다.
수준이 짐작할 수 없을 정도에 이르러 오랫동안 적수조차 없었던 그의 손짓에 하늘과 땅의 기색이 변하고 바람과 구름이 몰아쳤으며,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려 했다. 바닷물로 이루어진 장벽 역시 그 위압감을 견디지 못하고 움푹 파이기까지 했다.
한제의 백발이 마구 휘날렸다. 고도가 허상으로 소환해낸, 바람과 비, 천둥번개의 힘을 품은 손가락이 전광에 휩싸인 채 요란한 천둥소리를 내고 있었다. 구름은 충돌하면서 수없이 많은 빗방울로 부서졌고 허상의 손가락은 더욱 혼란스럽고 난잡해졌다.
이 바람과 비, 천둥번개 안에는 오행의 힘도 섞여 있었다. 금, 목, 수, 화, 토의 위력은 한제의 오행 진신이 발휘하는 위력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손가락만으로도 대천존을 죽이기에 충분할 정도였다.
한제의 눈동자가 바짝 졸아들었다. 그러나 고도의 강력함을 이미 짐작하고 마음의 준비를 해둔 상태였다.
“고도⋯⋯.”
한제가 눈을 번득였다. 뒷짐을 지고 선 채 백발은 휘날리는 그에게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운이 느껴졌다.
허상의 손가락이 코앞으로 달려든 순간, 꼼짝 않고 서 있던 한제가 오른손을 들었다. 여유로워 보이는 동작이었다.
멀리서 보면 고도가 소환한 허상의 손가락은 매우 거대해서 단번에 한제를 눌러 으스러뜨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에 비하면 한제가 뻗은 손가락은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았다.
허나 한제가 손을 뻗은 순간 수많은 선으로 나타났던 규칙은 일제히 진동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으로서는 볼 수 없는 진동이었지만 고도만큼은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수많은 선은 진동하다가 이내 끊어지면서 무너져 내렸고 이에 사방을 뒤덮듯 나타났던 선들이 전부 사라졌다. 덕분에 이곳은 규칙이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 되어버렸다.
그때 한제의 손가락과 고도가 소환한 허상의 손가락이 충돌했다.
콰쾅!
압도적이라 할 만큼 우렁찬 소리가 고막을 뒤흔들며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으음…”
한제는 낮게 신음하며 세 걸음 정도 물러난 뒤 고개를 쳐들었다. 허공에 우뚝 멈춰선 허상의 손가락에서는 한 줄기 검은 기운이 맴돌았다. 이어서 그 손가락은 산산조각 났고 그 안에 담긴 모든 신통술도 파괴됐다.
콰르릉!
요란한 소리와 함께 허상의 거대한 손가락이 붕괴한 순간, 아홉 개의 머리가 달린 안개 흉수 안의 고도 역시 바르르 떨면서 뒤로 세 걸음 물러났다.
서로를 떠보기 위한 첫 공격은 누구도 득을 보지 못하고 마무리됐다.
안개 속 고도의 허상이 뒤로 밀려난 순간, 한제는 고개를 쳐들며 몸을 훌쩍 날려 오른손을 들었다. 동시에 체내의 원신을 가동하자 그의 오른손에서 대량의 초록색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 연기는 그의 다섯 손가락 사이사이를 맴돌며 고리를 형성했고 손에서는 뜨거운 열기가 훅 뿜어져 나왔다.
“팔극도!”
구두(九頭)흉수 안의 고도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극수도! 극금도! 극목도! 극토도!”
한제의 오른손에서는 금, 목, 수, 화, 토 다섯 종류의 힘이 발산되면서 선조의 신통술인 팔극도를 형성했다. 비록 팔극도를 완전히 익히지는 못한 상태였지만 답천의 경지에 반 발짝 들어서 선조와 큰 차이가 없는 수준에 이르렀기에 한제의 팔극도의 위력도 실제와 거의 비슷한 정도는 됐다.
한제는 오른손으로 전방의 허공을 두들겼다. 그러자 초록 연기의 고리들이 일제히 번득이면서 구두흉수를 향해 달려들었다.
발휘된 신통술은 다섯 개뿐이었지만 그 위력은 어마어마했다. 한제는 두 번째로 답천교에 이르렀을 때 다섯 번째 다리를 굉장히 빨리 건넜지만 사실 그에게 그 시간은 억겁처럼 느껴졌고 그동안 그는 자신만의 새로운 삼극도를 깨달은 바 있었다.
“극지도(極地道)!”
한제는 안개 흉수를 향해 달려드는 와중 일대종사처럼 여유로운 표정으로 주먹을 휘둘러 대지를 두들겼다.
바닷물이 사라지면서 드러난 거대한 분지는 요란하게 진동했고 수많은 균열로 뒤덮였다. 그 균열 사이사이로 땅의 기운이 분출됐다.
더러운 땅의 기운에는 음산한 죽음의 기운이 가득했다. 수만 년간 바닷물 속에서 죽은 생령으로 인해 생성된 기운이었다.
밖으로 흘러나온 땅의 기운은 거대한 회색 빛의 고리를 형성했다. 단 하나뿐인 빛 고리는 위로 빠르게 솟구치면서 수축했고 어마어마한 위엄을 발산했다.
한제의 강력한 위력에 신중해진 고도는 구두흉수 안에서 흠칫 놀랐다.
‘대체 몇 번째 다리까지 건넌 것인가!’
눈을 번득이며 속으로 중얼거린 그는 결인을 그린 오른손으로 허공을 가리켰다. 그러자 그를 감싼 안개 흉수가 우렁찬 포효를 내지르며 수많은 파문을 형성해 확산시켰다. 동시에 아홉 개의 머리에서 서로 다른 색의 빛을 발산했다.
“극천도(極天道)!”
한제는 앞으로 달려들며 덤덤하게 외쳤고 오른손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그러자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처럼 변한 어둑한 하늘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순간, 한제가 허공을 움켜쥐자 하늘에서 나타난 모든 빛이 그의 손에 쥐어진 듯 하늘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와 동시에 하늘 아래 나타난 태양과 같은 빛 고리 하나가 아래쪽의 안개 흉수를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들었다.
한제의 팔극도 중 마지막 하나를 제외한 모든 것이 완성된 상태였다. 금, 목, 수, 화, 토, 여기에 천과 지가 수없이 많은 빛 고리가 되어 안개 흉수에게로 돌진했다.
구두흉수는 포효하며 아홉 색채의 빛을 번득였다. 그러자 사방에 아홉 가지 색의 무지개가 나타나 끊임없이 주위를 맴돌며 아홉 가지 색의 빛을 발산해 한제의 팔극도에 맞섰다.
뒤이어 고도가 안개 속에서 두 팔을 맹렬히 휘두르자 안개 흉수 주위로 수백 개에 달하는 안개 공이 소환됐다. 각각의 안개 공은 약천존을 죽이기에 충분한 힘을 품고 있었다. 심지어는 대천존이라고 해도 이런 안개 공 수백 개 앞에서는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을 터였다.
허공에 나타난 수백 개의 안개 공은 그대로 분열되면서 눈 깜짝할 사이 수천, 수만 개로 불어나 사방을 가득 채운 뒤 아홉 색체의 무지개와 함께 한제의 팔극도에 맞섰다.
콰르릉!
요란한 굉음이 거대한 분지를 뒤흔들었다.
한제의 오행 극도가 차례차래 붕괴됐지만 극천도와 극지도로 형성된 빛 고리는 겹겹의 방어막을 뚫고 안개 흉수의 몸에 떨어졌다.
“캬오오오!”
안개 흉수는 끔찍한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때, 이미 팔극도를 발휘한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체내의 신맥을 모두 가동한 한제는 엄청난 속도로 한 발 내딛음과 동시에 사라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안개 흉수 앞에 소리 없이 나타나 주먹을 힘껏 휘둘렀다.
콰르릉!
거대한 허상의 주먹이 나타나 안개 흉수를 향해 쏘아져 나갔고 거의 동시에 한제는 다시 몸을 날려 사라졌다가 순식간에 안개 흉수 안, 고도의 뒤에 나타났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또다시 주먹을 뻗었다.
고도는 몸을 홱 틀면서 소매를 휘둘렀다.
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