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571
우렁찬 굉음과 함께 한제는 안개 흉수 밖으로 튕겨나갔다.
허나 고도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그는 낮은 신음을 흘렸고 소맷자락은 재로 변해 흩어졌다.
사실 고도가 공격에 나선 순간부터 한제는 이 모든 계획을 세웠다. 그런 만큼 이번 주먹에도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이번 주먹질과 이전의 주먹질은 안개 흉수를 사이에 두고 충돌하면서 어마어마한 힘을 발휘했다.
콰르릉! 쾅!
우렁찬 소리가 이어졌고 광풍이 사방을 휩쓸면서 안개 흉수를 갈기갈기 찢었다.
하지만 선강 대륙 최강자인 고도가 쉽게 당하고만 있을 리 만무했다. 그가 소매를 휘둘렀을 때 안개 흉수 주위로 떠올라 있던 1만여 개의 안개 공이 일제히 한제에게 돌진했다.
하나하나가 약천존을 죽일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안개 공이 1만여 개나 동시에 폭발한 위력은 온 세상을 파괴하기에 충분했다. 한제는 그런 안개 공들이 자신을 향해 달려든 순간 두 눈을 감으며 오른손으로 미간을 두드렸다.
“극명도(極命道)!”
뒤이어 번쩍 뜬 한제의 두 눈에서 기이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이 어스름한 빛은 빛 고리가 되어 그의 주위를 맴돌며 보호막을 형성했다.
퍼펑! 펑!
백만 개의 천둥이 동시에 내리친 듯한 우렁찬 소리가 거대한 분지를 뒤흔들었고 심지어 세상의 규칙까지 뒤흔들면서 선강 대륙 전역에 바람과 구름이 휘몰아쳤다.
답천일보(踏天一步)
도일종, 조성 제산, 자양종, 그리고 북주의 얼어붙은 땅. 선족의 네 대천존은 드넓은 바다에서 두 갈래의 어마어마한 기운이 충돌하고 있음을 절실히 느꼈다.
“고도가 싸우고 있어!”
“둘 중 하나는 고도야! 다른 하나도 분명 익숙한데⋯⋯.”
“⋯⋯이한제! 다른 하나는 이한제야!”
동시에 선족 구역 곳곳에서 튀어오른 네 갈래 빛은 분분히 분지가 된 바다로 돌진했다.
★ ★ ★
같은 시각. 고족 구역의 현라와 송천 그리고 극고 일맥의 대천존 역시 곧장 분지로 몸을 날렸다.
분지의 중앙. 바닷물로 이루어진 장벽에서도 고족 구역에 가까운 쪽에서는 콰쾅 하는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1만여 개의 안개 공이 굉음과 함께 폭발해 흩어지자 한제는 피를 토하며 뒤로 수천 척이나 밀려났고 피를 한 움큼이나 토해냈다. 그의 주위를 맴돌며 보호막 역할을 해주던 어스름한 색의 빛 고리도 무너져 내렸다.
고도를 감싸고 있던 안개 흉수는 산산조각이 나 찢어질 듯한 비명을 내지르며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고도 대천존 주위의 안개 또한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곧 내내 가려져 있던 고도의 얼굴이 또렷하게 드러날 것만 같았다.
“내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부상을 입는 것도 마다하지 않다니⋯⋯.”
수천 척 앞에서 고도가 중얼거렸다. 그의 몸을 감싼 안개는 희미해져 있었지만 그 얼마 안 되는 안개는 가까스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보고 싶다면 보여주지. 누군가가 내 얼굴을 보게 되는 것은 실로 오랜만이로군.”
비쩍 마른 고도는 푸른 도포를 입고 있었는데 오른쪽 소매는 없었다. 회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그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안개가 점차 걷혔다.
그와 한제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리고 마침내 고도 대천존의 얼굴을 또렷하게 확인한 순간, 한제는 놀라는 기색 없이 긴 한숨을 토해냈다.
“역시 그랬군!”
고도는 침묵을 지켰다.
“고조라고 불러야 하나? 아니면 고도라고 불러야 하나?”
한제는 익숙한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고도의 얼굴은 한제가 고족 구역의 세 황궁에서 보았던 고조 조각상의 얼굴과 똑같았다.
“아니, 그게 아닌가? 그 얼굴은 고도 자네의 것이고 황궁의 조각상이 자네 얼굴을 따서 만든 건가?”
한제는 고도를 바라보며 말했다. 상대에게서는 실로 오래된 기운이 느껴졌다.
“난 고도이기도 고조이기도 하다.”
고도는 슬픔이 어린 얼굴로 답했다.
“난 고조의 일부 기억과 의지를 얻고 고족과 각 황실의 적계 후손을 수호했어. 한데 그 기억과 의지를 흡수함에 따라 내 모습 역시 천천히 변해갔지.”
고도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자네는 이곳 너머로 나올 수 없어. 소문대로라면 자네는 선족 구역에서 대천존들을 죽였다지? 허나 그건 잘못된 소문일 거야. 아마도 자네는 당시 선족이 이곳 바다의 중심선을 넘어 고족 구역으로 침입해왔기 때문에 죽였겠지.”
한제의 머릿속은 안개가 걷힌 것처럼 맑아졌다. 그동안 이해되지 않았던 여러 가지 일들이 실마리를 조금씩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껏 그는 고도의 수준이라면 선족을 전부 쓸어버리고도 남을 텐데도 그러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고조의 기억과 의지를 얻은 자네는 그로 인한 행운을 얻음과 동시에 제한도 얻게 된 거야.”
“모든 것이 바뀐 그날, 나는 나를 옥죄는 한 가지 제한을 느꼈지. 그래, 난 고족 구역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는 나갈 수가 없어. 너무 멀리 가면 내 모든 수준을 잃게 되지.”
고도의 표정은 덤덤했다.
“그래서, 날 떠나지 못하게 막는 이유는 뭐지?”
한제가 다시 질문했다.
“난 고조의 기억을 얻은 뒤부터 수만 년 동안 뭔가를 느껴왔어. 뭔가⋯⋯ 이해할 수도 믿을 수도 없지만 분명히 느껴왔지.”
고도는 사방의 대지와 고족 구역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진짜일 수도 어쩌면 그저 내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이내 고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내 의지가 가득한 눈으로 한제를 돌아보며 외쳤다.
“오게! 나를 이기면 더는 자네를 붙잡지 않겠어. 그때는 마음대로 떠나도 좋아! 아직 전력을 다하지 않았겠지? 이제 나 역시 힘을 아끼지 않겠네!”
고도는 전의가 불타는 눈으로 말을 이었다.
“나는 두 가지 최강의 술법 중 하나인 고화천지(古化天地)를 사용할 걸세. 고조의 기억에 따르면 허무로부터 태어난 그는 자신의 두 눈이 해와 달이 되고 자신의 피로 강과 바다를 이루고 자신의 뼈로 산맥을 이룰 수 있다고 여겼지.
두 손을 하늘로 삼고 드러누운 몸을 대지로 삼을 수 있다고 여긴 게지. 이러한 신념으로 만들어낸 신통술이 바로 고화천지라네. 전승한 뒤 처음으로 이 신통술을 써보게 됐군!”
한제는 고도의 눈을 들여다보며 차분히 입을 열었다.
“난 시고 황성의 조묘에서 어떤 인영을 보았네. 그자는 하늘을 향해 한 걸음 내딛었고 그 순간 난 엄청난 충격을 받았지. 다섯 번째 답천교에서 윤회와도 같은 세상에 푹 빠졌을 때 난 얼마 지나지 않아 팔극도에 대한 깨달음뿐만 아니라 그 한 걸음에 대한 깨달음도 얻을 수 있었어.
원래대로라면 건널 수 없었을 다섯 번째 답천교를 그 한 걸음을 통해 건널 수 있었던 거야. 그 걸음을 나는 답천일보(踏天一步)라고 칭하기로 했지.”
한제의 두 눈에서도 결단과 전의가 드러났다. 피할 수 없다면 끝까지 맞서볼 생각이었다.
“만약 자네가 이 신통술을 견뎌낸다면 내가 수만 년 동안 연구해온 일식도천(一式道天)도 볼 자격이 있다는 뜻이겠지.”
다섯 번째 답천교를 건넜다는 한제의 말에 눈을 번득이던 고도는 하늘을 향해 들어 올린 오른손을 휘두르며 외쳤다.
그 손짓에 고도의 뒤로 수없이 많은 빛이 나타났다. 이 빛들은 허공에 나타나 서로 응집하더니 순식간에 고도의 뒤에서 빛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인영을 형성했다.
온몸이 빛으로 뒤덮여 있어 그 모습을 제대로 살필 수 없는 인영은 나타나자마자 입을 쩍 벌리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러자 우렁찬 소리와 함께 세상의 힘이 대대적으로 빨려 들어갔다. 1백만 리 안의 세상의 힘은 물론 심지어는 거대한 분지 전역에 퍼져 있는 세상의 힘도 그 흡입력을 벗어나지 못했다.
빛으로 이루어진 인영은 급기야 분지 너머 고족 구역과 선족 구역에 존재하는 세상의 힘까지 빨아들였다.
선족 구역 근처의 바다에 이르러 있던 구제를 비롯한 네 명의 대천존은 화들짝 놀라며 우뚝 멈춰 섰다.
고족 구역의 현라를 비롯한 세 대천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드넓은 바다로부터 기인하는 어마어마한 흡입력과 그 흡입력으로 인해 세상의 힘이 마구 빨려드는 것을 느꼈다.
드넓은 바다의 중앙, 세상의 힘을 마구 흡수하면서 빛으로 이루어진 인영은 엄청난 속도로 부풀어 올라 눈 깜짝할 사이 수십만 척에 이르렀다. 그러고도 계속해서 커졌고 이제 고개를 들어도 상반신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 이르렀다. 한제가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빛으로 이루어진 인영의 두 다리뿐이었다.
한제는 찬 숨을 들이마셨다.
인영은 땅을 디딘 채 하늘 높이 솟아 있었다.
“고조⋯⋯.”
한제는 빛으로 이루어진 인영이 계속해서 부풀어 오르는 것을 바라보았다. 이 인영이 언제까지 커질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하나의 성역에 비견할 만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강 대륙 전역의 힘을 끌어모은 후에야 빛의 인영은 더 이상 커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한제는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위압감을 느꼈다.
“고화천지⋯⋯.”
한제는 조용히 신식을 뻗었다. 그렇게 확산된 신식을 통해 그는 기이한 장면을 볼 수 있었다.
거대한 인영의 두 눈이 떨어져 하나는 하늘에 뜬 밝은 태양이 되고 다른 하나는 달이 되었다. 뒤이어 그 몸에서 흐른 피가 대지를 타고 흐르는 강이 됐다가 바다로 모여들었다.
인영이 손을 모아 들어 올리자 두 팔은 푸른 하늘이 됐고 그 몸뚱이는 드러누워 대지가 됐으며, 하나하나의 뼈는 하나하나의 산맥으로 바뀌었다.
신식을 통해 이 광경들을 보던 한제는 돌연 두 눈이 찌르는 듯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그의 눈에서는 시뻘건 피가 흘렀다. 마치 어마어마한 힘이 두 눈을 그대로 뽑아내 그중 하나는 태양으로 나머지 하나는 달로 삼으려 하는 것 같았다.
동시에 그의 두 팔은 덜덜 떨리면서 그 힘에 이끌려 들어 올려졌고 몸뚱이는 기이한 힘에 쓰러져 대지가 되려 했다.
신술이었다.
세상을 바꾸고 시간과 공간을 바꿀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면서 신념에 뒤덮인 사람이라면 그 신념의 일부로 삼아버리는 기이한 술법이었다.
허나 한제는 침착했다. 이 신술을 어떻게 빠져나갈지를 고민하기보다는 두 눈을 감은 채 일곱 색채의 눈이 대리는 산 위에서 시체를 안고 하늘을 향해 울부짖고 있던 인영을 그리고 그 인영이 하늘을 향해 한 걸음 내딛는 광경을 계속해서 떠올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떠올리던 중, 오른발을 천천히 들어 고조의 신념으로 만들어진 세상의 하늘을 향해 내딛었다.
순간, 한제는 자신이 바로 시체를 끌어안은 채 하늘을 향해 절규하던 그 인영이라는 착각을 느끼게 됐다. 상상을 초월하는 슬픔이 차올랐다. 뭔가가 심장을 닥닥 긁어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지금 고도와 싸우고 있다는 것도 자신이 지금 동부계로 돌아가려 한다는 것도 잊었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 남은 것이라고는 무궁무진한 슬픔과 절망, 분노뿐이었다.
그 분노가 한제의 첫 걸음에 담겼다.
답천일보였다.
한제의 마음에 들어찬 분노는 그의 오른발을 통해 뿜어져 나와 세상에 떨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 한제는 상상을 초월하는 경지에 이른 듯 하늘을 딛고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