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572
온 세상이 발아래에 깔린 것 같았다. 그 세상에 사는 중생, 규칙, 법칙을 비롯한 모든 것들이 이 한 걸음에 연기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동시에 하늘에는 대량의 균열이 일어나 무너져 내렸다. 수없이 많은 파편으로 흩어지면서 하늘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됐다.
땅도 갈라졌다. 해와 달 역시 흩어졌고 강과 바다도 사라졌다. 고화천지로 형성된 세상은 그렇게 소멸됐다.
고도는 몸을 바르르 떨며 피를 한 움큼 토해냈고 비틀거리면서 1천 척을 밀려난 뒤에야 겨우 멈춰 섰다. 그의 안색은 처음으로 창백해져 있었다.
“답천! 완전한 답천의 경지 아닌가!”
그는 한 걸음 내딛은 한제의 몸에 방금 각성한 듯 무시무시한 힘 한 줄기가 흐르는 것을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한편, 허공에 선 한제에게는 모든 것은 환각처럼 느껴졌다. 여태 감겨 있던 눈을 떠 슬픔이 어린 눈으로 고개를 들어 원래대로 돌아온 하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대체 몇 번째 다리까지 건넌 건가!”
한참이 지난 후, 고도가 복잡한 표정으로 물었다.
“일곱 번째. 여덟 번째 다리는 아직 건너지 못했지.”
한제는 눈에 어린 슬픔을 흩어버리고 싶지 않다는 듯 다시 눈을 감았다.
“일곱 번째⋯⋯.”
고도는 씁쓸하게 웃으며 한제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는 방금 전 한제가 내딛은 걸음에서 답천의 의지를 또렷하게 느꼈다. 그 의지는 극에 달한 신념이었다. 지금 그의 수준으로는 그런 걸음을 내딛을 수 없었다.
“어쩌면 정말로 자네를 붙잡을 수 없을지도 모르겠군.”
숨을 깊게 들이마신 고도는 복잡한 눈빛을 결연하게 다잡으며 말했다.
“허나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어. 일식도천을 사용하겠네. 내가 이 술법에 도천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이 고도가 평생 품어온 신념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지. 고조의 신념은 세상을 만든다. 그리고 그 신념 때문에 나는 고족 구역을 멀리 벗어날 수 없어.”
고도는 덤덤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한 자씩 힘주어 말했다.
“허나 내 신념은 이 하늘이 더 이상 내 눈을 가리지 못하게 하고 이 땅이 더 이상 내 몸을 가로막지 못하게 하며, 이 해와 달을 비롯한 창궁이, 이 선강 대륙이 더는 내 마음을 흐리지 못하게 할 수 있다.
일식도천은 내 마음을 도로 삼고 그 도가 하늘을 밟게 하고 하늘을 계단으로 삼아, 그 하늘을 밟고 멀리 바라볼 수 있게 하지.”
고도는 하늘을 향해 두 손을 휘둘렀다.
콰르릉!
하늘에서는 거대한 회오리가 나타나 드넓은 분지를 뒤덮었다. 마치 종말이 닥쳐온 것처럼 세상이 뒤흔들리는 가운데 고도가 오른손으로 한제를 가리켰다.
“자네가 바로 하늘이야!”
고도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우렁차게 울렸다.
완전한 구곡삼상
어마어마한 신념까지 어린 목소리가 울려 퍼진 순간, 그의 손짓 아래 한제의 주위로 대량의 파문이 나타났다.
한제는 뭔가를 느낀 듯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하늘에 나타난 회오리에서 거대한 발 하나가 내리 떨어졌다.
“헛!”
한제는 2백 년 만에 처음으로 죽음의 위기를 느꼈다.
답천의 경지에 발을 들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된다. 그 힘을 통해 한제가 답천일보를 깨달은 것처럼, 고도는 그 놀라운 지혜와 평생을 품어온 신념을 통해 자신만의 답천일보를 깨달은 것이다.
모든 중생은 하늘을 밟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러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믿음도 의지도 없으니⋯⋯.
이는 여덟 번째 답천교에 새겨져 있던 구절이었다.
고도의 모습에서 한제는 그 구절을 떠올렸다. 동시에 어떤 깨달음도 얻었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영혼이 있다면 하늘을 밟으려는 의지를 갖고 있다는 깨달음이었다.
당시 그가 동부계에서 이천매의 세 가지 질문에 답했던 것처럼 세상은 하나의 원이고 그 원 밖에는 또 다른 원이 존재하는 법이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비범한 사람은 극히 드물어. 중생은 모두 타인과는 다른, 뛰어난 존재가 되기를 원하고 남에게 구속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원해. 그러나 일반인 세상에는 부귀빈천의 법칙이라는 하나하나의 원이 있고 수련계에는 약육강식의 법칙이라는 하나하나의 원이 있지. 온 세상은 그런 감옥 같은 원들로 이루어져 있는 거야.”
한제의 머릿속에서는 회오리가 치듯 여러 개념이 휘몰아치다가 순식간에 하나로 정리됐다.
“맑은 하늘과 반짝이는 별로 가득 찬 우주 역시 하나하나의 원. 그 원 밖으로 나가고 그 너머에 자리한 수많은 원 밖으로 벗어나 답천에 이르게 되면 그렇게 맑은 하늘을 밟게 되면 중생은 비로소 두 눈을 가리고 있던 모든 것에서 벗어나 더는 그 어떤 것에도 유혹받지 않을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도경에서 ‘수련의 길을 따르라’고 말하는 이유야.”
한제는 하늘에서 자신을 향해 떨어져 내리는 거대한 발을 보며 중얼거렸다.
‘삶과 죽음, 원인과 결과 진실과 거짓. 삶과 죽음은 끈으로 수많은 삶과 죽음을 하나로 연결하여 수없이 많은 원을 형성하고 그 원으로 하나의 그물을 이루지. 그 그물이 바로 원인과 결과야. 원인과 결과의 그물은 강물로 흐르는 윤회 안에서 진정한 나를 건져 올린다.
윤회의 강물에는 허상과 진실이 존재하기에 반드시 진실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하지. 난 진실과 거짓의 본원을 완성한 뒤 네 번째 허상의 본원을 깨달았다. 허나 지난 수백 년 동안 그 윤회란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했지.’
생각은 이어졌다.
‘윤회란 무엇일까? 난 일찍이 그것이 현생과 내세를 관장하는 법칙의 힘이라고 생각했다. 도고 국사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랬지.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모완을 완전히 부활시키기 위해서는 태고 신경에서 윤회의 힘을 이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어.
당시만 해도 나는 윤회의 힘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지. 그저 세상의 규칙이나 법칙의 일종이라고만 여겼어. 허나 이제 알겠다. 윤회는 바로 하늘이야! 진정한 나를 건지기 위해서는 인과의 그물을 하늘로 던져야 하는 건가?’
그의 머릿속에서는 천둥번개가 휘몰아쳤다. 이 모든 생각이 순간 그의 머리와 심신을 가득 채웠고 동시에 체내의 세 허상의 본원 외에 또 한 갈래의 본원이 피어올랐다. 바로 윤회의 본원이었다.
‘그랬군.’
한제는 또다시 속으로 중얼거렸다. 위에서 떨어져 내리던 발은 이미 1천 척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이르러 있었다.
한데 바로 그때, 기이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바람 소리였다.
고족 창궁의 구곡 중 첫 번째 곡이었다. 뒤이어 두 번째, 세 번째… 아홉 번째 곡까지 흐르기 시작했다. 하늘, 땅, 바람, 천둥, 비, 오장, 육신, 그리고 마지막 혈맥의 곡까지.
이 음악들은 하늘과 땅으로부터, 한제의 육체로부터 울려 퍼졌다.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현묘한 음악은 사방으로 확산됐고 내리 떨어지던 발은 구곡 아래 움직임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구곡이 전부 연주된 순간, 하늘에는 첫 번째 상이 나타났다.
금빛 하늘과 검은 땅이었다. 허상이었지만 한제의 눈에는 또렷하게 들어왔고 고도는 심신이 진동했다.
뒤이어 한제의 두 눈에서 은빛이 뿜어져 나왔다. 무궁무진한 은빛이 두 번째 상이었다.
고도산에서 한제가 처음으로 내보인 구곡삼상은 완전하지 않고 하나의 곡과 하나의 상이 빠져 있던 상태였다. 도고 황궁에서 두 번째로 나타났을 때도 구곡은 완전했지만 삼상 중 하나는 여전히 부족했다.
그리고 지금, 드넓은 분지의 중심, 장벽을 이룬 바닷물 옆에서 고도 대천존의 일식도천이 강림한 지금, 세 번째로 나타난 지금도 구곡은 완전했지만 세 번째 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한제는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1천 척 위에 멈춰 있는 거대한 발이 아니라 그 너머, 하늘 밖의 허무에 닿아 있었다.
지금 한제의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맑았다. 게다가 한 가지 깨달음까지 얻은 그는 지금 자신에게 무엇이 부족한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허무의 분신이여, 내게로 오라!”
한제에게 부족한 것은 고조나 선조처럼 허무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었다.
★ ★ ★
선강 대륙 밖, 법칙으로 가득 찬 허무 가운데 거대한 원 모양의 바위. 이곳에 자리를 잡은 지 벌써 1천 년이 다 되어가는 한제의 분신이 두 눈을 번쩍 떴다. 두 눈에서 밝은 빛이 번득였다.
그 순간, 바위는 곧장 산산조각이 나더니 흩어졌고 벌떡 일어난 분신은 한 걸음 나서더니 곧장 사라졌다.
★ ★ ★
선강 대륙의 드넓은 분지, 바닷물로 이루어진 장벽 옆. 회오리 안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그는 세 걸음 만에 다가오더니 한제와 완벽하게 융합됐다.
“크아아아!”
고도가 놀란 눈으로 보고 있는 동안 한제는 하늘을 향해 우렁차게 포효했다. 이 포효는 기이하게도 갓난아이의 울음처럼 메아리쳤다.
그렇게 확산된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고족 구역과 그 안의 세 황성에 닿자 각 황성의 고조 조각상들에는 한 줄기 균열이 일어났다. 심지어 선족 구역 조성의 선조 조각상도 마찬가지였다.
뒤이어 고족 구역에서 분출된 땅의 기운이 하나로 응집해 거대한 인영을 이루었다. 그는 고조였다.
선족 구역에서도 땅의 기운이 분출돼 선조의 인영을 형성했다.
두 인영을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대천존들뿐이었다.
이때, 드넓은 분지에는 세 번째 인영이 나타났고 선조와 고조의 인영보다도 훨씬 큰 이 인영은 하늘을 뚫고 솟아올라 있었다.
“구곡삼상의 삼상⋯⋯ 그 세 번째 상은 갓난아이의 울음이지.”
고도가 중얼거렸다.
하늘, 땅, 바람, 천둥, 구름, 비, 오장, 육신, 그리고 마지막 혈맥으로 이루어진 아홉 개의 곡이 울려 퍼졌다. 또한 금빛 하늘과 검은 땅, 은색 눈동자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까지 세 가지의 상도 모두 나타난 상태였다.
선강 대륙에는 구곡삼상과 관련된 전설이 아주 많았는데 대부분은 구곡삼상이 모두 나타날 때 선조나 고조의 후계자가 탄생할 것이라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선족 구역 조성과 고족 구역 세 황성의 선조와 고조 조각상에 균열이 일어난 순간, 거대한 분지의 중심, 바닷물로 이루어진 장벽 옆에 선 고도 대천존은 그 전설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고족 구역에서 솟구친 땅의 기운으로 응집된 거대한 인영이 하늘을 향해 포효했고 선족 구역에서도 땅의 기운이 피어올라 응집된 거대한 인영이 나타나 있었다.
두 인영은 하늘을 떠받칠 듯 거대하고 강력해 보였지만 그들 사이에 새로운 세 번째 인영이 나타난 순간 온 세상이 밝은 빛에 휩싸였다.
그 인영은 한제의 것이었다. 심지어 모습조차 한제와 같았다.
선족도 고족도 아닌 제3의 존재!
한제는 두 눈을 감고 있었다. 허무의 분신과 융합했을 때, 그의 체내에 들어 있던, 체내를 순환하는 데 수백 년은 걸릴 듯했던 선고력이 돌연 빠른 속도로 한 바퀴의 순환을 마쳤다. 그리고 그 후로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회전하면서 체내에 더 많은 선고력을 융합시켰다.
한제는 허상의 본원이 완전해지면 자신의 선력과 고족의 힘이 완벽하게 융합할 것이고 그러면 자신은 더 이상 선족의 것도 고족의 것도 아닌, 오직 자신만의 힘을 갖게 될 것이라 예상한 바 있다. 그리고 그 힘이 충분해지는 순간, 윤회에 인과의 그물을 던져 진정한 자신을 건져낼 수 있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