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574
이때 한제의 얼굴은 창백해진 상태였다.
“설마 환생의 과정에서 무슨 문제라도 있었던 것인가?”
한제는 돌연 마음이 아파왔다. 이천매는 그에게 잊을 수 없는, 큰 의미가 있는 여인이었다. 한제를 위해 아버지를 떠나 홀로 선강 대륙에 온 그녀는 몇 차례의 환생을 거듭하더라도 한제를 기다리겠노라 다짐한 여인이기도 했다.
“아, 안 돼!”
한제는 신식을 다시 펼쳐 온종일 곳곳을 살폈으나 결과는 똑같았다.
찌르는 듯 가슴이 아파왔다.
한제는 돌연 하늘을 올려다보며 돌연 호탕하게 웃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웃음에 어린 것은 하늘을 향한 극도의 분노였다.
잠시 후, 한제는 웃음을 뚝 그치더니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모완의 혼을 겨우 찾았더니 이번에는 이천매를 거둬간 것이냐! 이게 하늘의 뜻인가! 그런다고 내가 못 찾을 줄 아느냐!”
한제의 목소리가 하늘을 가득 채우고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스승님의 도움으로 이루어진 환생이다. 뜻밖의 사고가 일어났을 리가 없어. 내가 지금 그녀를 찾지 못하는 것은 분명⋯⋯ 청수 사형보다 일찍 전생에 대한 기억을 찾고 표식을 지워버렸기 때문일 거야.”
한제는 두 눈을 감았다. 이 추측은 점점 확신으로 바뀌었다.
한제의 머릿속에 낯선 공간이 떠올랐다. 그곳에서는 하얀 옷을 입은 한 여인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여인은 일찍이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지만 그 기억을 피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는 더 이상 한제를 보기를 원치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늘은 점차 어두워지고 있었다.
한제는 감았던 두 눈을 번쩍 뜨며 슬픔과 혼란이 어린 눈으로 한참을 침묵하다가 점차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 ★
선족 구역, 서주 운도주의 한 작은 종파. 여러 제자가 호흡하고 있는 이른 아침, 뒷산의 밀실 안에는 가부좌를 튼 중년 사내가 있었다. 결연하고 냉혹한 얼굴의 사내는 검은 옷을 입은 채 눈을 감고 숨을 고르고 있었다.
체내에서는 파문이 흘러나와 사방을 뒤덮었다. 이미 두 번째 단계의 절정에 이른 그는 세 번째 단계에 이르기까지 이제 한 발짝만 남겨둔 상태였다.
사내는 지난 1천 년간 노금종(爐金宗)에서 수련 속도가 가장 빨라 대장로에게서 직접 가르침을 받고 있었다.
허나 사내가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것은 비단 수준이 높아서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무자비한 성격 때문이었다. 살육을 저지르는 데 있어서는 세 번째 단계 강자보다도 과감하고 단호해 그와 맞선 이 중 십중팔구는 반드시 그의 손에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심지어 막 세 번째 단계에 이른 강자를 죽인 적도 있었고 이로 인해 여러 종파에서도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는 지금 노금종 최고 제자로 인정받고 있었다. 장로들마저 그에게서 풍기는 살기에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다.
그의 이름은 이석. 부모가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고아로 노금종의 늙은 수련자에게 거둬져 어릴 때부터 이곳에서 자랐다.
한데 그는 좌선을 할 때마다 누군가의 뒷모습을 보곤 했다. 따뜻하고 낯익은 모습이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그게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처음에는 흐릿하고 모호했던 상대는 그의 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점점 또렷해져갔다.
‘세 번째 단계에 이르면 그게 누구인지 알게 될지도 몰라.’
이는 그가 수련에 정진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이석!”
한창 좌선에 집중하고 있던 그때, 밀실 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한 덩어리의 빛이 날아와 그의 전방에서 노인의 모습으로 변했다.
이석은 눈을 떠 노인을 바라보더니 공손한 표정으로 일어나 절을 했다.
“대장로님을 뵙습니다.”
“아직도 나를 스승이라 부르지 않는구나.”
허상으로 나타난 인영은 미간을 팩 구겼다. 그가 보기에 제자는 무척 기이한 사람이었다. 제자로 받아들이려 할 때도 이석은 동의의 뜻을 밝힌 적이 없었다. 이에 노인은 퍽 불쾌했으나 이석의 놀라운 재능이 아까워 자신의 신통술을 전수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났으나 이석은 대장로를 스승이라 부르지 않았다.
이석 자신도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눈앞의 이 노인이 자신의 진짜 스승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 뿐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진짜 자신의 스승은 누구인가? 허나 또 질문에는 아무런 답도 얻을 수가 없었다.
“됐다. 이만 정리하고 사흘 뒤 하산하거라. 날 대신해 도운종으로 가서 축하 선물을 좀 전해주고 와야겠다.”
노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할 말을 전한 뒤 점차 흩어져 사라졌다.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 답한 이석은 노인이 사라진 뒤로도 한참이나 멍하니 있다가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좌선에 집중하려 했다. 한데 그때, 돌연 뒤에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이석은 몸을 바르르 떨면서도 다급하게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자신이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사이에 왔음은 물론 대장로조차 그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것으로 미루어 상대의 수준은 어마어마할 터였다.
“누구십니까?”
이석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답해라. 네 이름이 이석인 이유는 무엇이냐? 누가 네게 그 이름을 지어줬느냐?”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 목소리에 이석은 알 수 없는 익숙함을 느꼈고 심신이 진동했다. 마치 봉인됐던 기억이 깨어나려는 듯한 혼란스러움에 그는 무의식적으로 입을 열었다.
“저는 본디 고아로⋯⋯ 이름은 제 스스로 지은 것입니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성은 이 씨여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뒤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눈을 번득이던 이석은 홱 돌아섰다. 그곳에는 백의를 입은 청년이 서 있었다. 긴 백발을 기른 사내는 마치 자손을 바라보는 조상과도 같은 부드러운 눈으로 이석을 보고 있었다.
상대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이석의 몸이 바들바들 경련했다. 심신도 울리기 시작했고 그 순간 꿈속에서 보았던 뒷모습과 눈앞의 상대가 겹쳐지는 것을 느꼈다.
“다, 당신은⋯⋯?”
이석의 눈빛은 점차 혼란으로 흔들렸다.
한제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가볍게 이석의 미간을 두드렸다. 그러자 이석은 심신이 콰쾅 하고 울렸고 순식간에 봉인되어 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스, 스승님! 십삼이 스승님을 뵙습니다!”
잠시 후, 사내는 눈물을 흘리며 곧장 무릎을 꿇었다.
행복과 책임
산악주(山岳洲) 동북쪽에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이어진 산맥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산맥 아래, 큰길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한 마을은 마치 도원경처럼 아름다웠다. 수백 명 남짓한, 많지 않은 사람이 살아가는 곳으로 대부분은 숲에서 동물을 잡는 사냥꾼이었다.
사실 예전에 이곳은 마을이 아니라 사냥꾼들의 쉼터였던 황무지였다.
그러던 어느 해, 수도에서 피난을 온 관인들이 가족들을 데리고 이주해오면서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 마을의 서쪽에는 집이 한 채 있었다. 울타리로 둘러싸인 집의 마당에는 닭과 오리가 돌아다녔고 스물이 채 안 되어 보이는 한 소녀가 잔뜩 거친 천 옷을 입은 채 바구니를 들고 돌아다니며 모이를 뿌려주고 있었다. 굴뚝에서는 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모양이었다.
“어머니, 나 어젯밤에 또 꿈을 꿨어요. 꿈속에서는 또 선인이었죠.”
닭과 오리에게 먹이를 주던 소녀는 까르르 웃으며 말했다.
“한두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닌데 왜 자꾸 그런 말도 안 되는 꿈을 꿔? 난 네 나이 때 벌써 네 아버지한테 시집을 갔단다.”
집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건 아버지가 우리 마을에서 제일 실력 좋은 사냥꾼이니까 그런 거잖아요. 그때 아버지를 마음에 두었던 여자들이 적지 않았다던데요?”
그렇게 말하며 활짝 웃는 소녀는 무척 귀여웠다. 특별히 예쁜 얼굴은 아니었지만 순수하고 천진해 보였다.
“누가 그런 말을 하든?”
이내 집에서 한 여인이 나왔다. 소녀와 마찬가지로 어떤 기운 자국이 가득한 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게 여인의 아름다움을 가리지는 못했다. 짐짓 화난 척 눈을 동그랗게 뜬 여인의 손에는 채소를 볶는 데 쓰는 주걱이 들려 있었다.
소녀가 막 대꾸하려던 그때, 대문 밖에서 쾌활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야 내가 그랬지. 하하하!”
이내 문이 열리더니 어깨에 활을 멘 건장한 중년 사내가 걸어 들어왔다. 반대쪽 어깨에는 짐승 시체가 얹혀 있었고 다리에는 말라붙은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피가 죽은 짐승의 것인지 아니면 사내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버지!”
소녀는 활짝 웃으며 들고 있던 바구니를 내려놓고 사내에게로 달려갔다.
“이야, 표범이네요. 가죽이 너무 아름다워요. 훌륭해요. 헤헤헤.”
소녀는 눈을 반짝이며 즐거운 듯 재잘거렸다.
“이번에는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평소에는 사흘이면 왔잖아.”
여인도 잰걸음으로 다가와 중년 사내에게서 활을 받았다.
“돌아오는 길에 이 표범을 마주쳤지 뭐야. 그냥 오려고 했는데 우리 꼬맹이가 예쁜 가죽이 필요하다잖아.”
사내는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다리는 어떻게 된 거야?”
여인은 사내의 다리에서 핏자국을 보고는 얼른 몸을 숙였다. 다리에는 발톱에 긁힌 듯한 상처가 있었다.
“별거 아냐. 소백이가 있는 한 이 산에서 내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짐승은 없잖아. 하하하!”
그때, 대문 밖에서 검은 그림자가 휙 달려들어 소녀의 품에 안겼다. 커다란 혀로 소녀의 얼굴을 마구 핥는 그것은 검은색 개였다. 덩치가 거의 호랑이만 한게 무시무시했다.
“소백이가 또 호랑이 울음소리를 흉내 내더라고. 가끔은 나도 저 녀석이 정말 호랑이는 아닌가 헷갈린다니까.”
사내는 개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우리 소백이, 착하지?”
소녀는 검은 개를 진정시키더니 여기저기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러자 개는 벌렁 드러누워 배를 보여주었고 소녀는 까르르 웃으며 녀석의 배를 긁어주었다. 개는 기분 좋은 듯 그르렁거렸는데 진짜 호랑이 소리 같았다.
단란한 가족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그때, 하늘에서는 백의를 입은 한제가 미소를 지으며 이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백⋯⋯ 녀석도 환생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어. 한데 녀석이⋯⋯ 개로 환생했을 줄이야. 하하! 어쨌든 보아하니 꽤 높은 수준에 이르러 있는 것 같군.”
그때였다. 마당에 발라당 누워 있던 개가 한제의 존재를 눈치챈 듯 고개를 홱 돌리더니 멍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녀석의 눈빛에는 두려움이 차올랐다. 심지어 그르렁 소리마저 멈춘 상태였다.
“허, 나를 알아본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