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576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간 장군을 여러 문관이 뒤따랐다. 서늘한 살기를 풍기며 마차 근처로 다가온 노장군의 모습에 마차가 멈춰 섰다. 마차 근처의 시종과 무사들은 노장군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살기에 두려움을 느낀 듯 잔뜩 긴장한 모습이었다.
“멈춰라, 남왕의⋯⋯.”
몇몇 시종은 밀려드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얼른 앞으로 나섰고 마차 옆에 앉아 있던 푸른 옷의 사환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날카롭게 외쳤다.
“넌 누구냐!”
허나 사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노장 곁에 있던 한 중년 사내가 싸늘한 눈빛을 번득이며 낮게 호통치듯 물었다. 그러나 군영에 있던 모든 병사의 시선이 일제히 그 사환의 몸에 꽂혔다. 그 시선에 담긴, 보이지 않는 살기에 뒤덮인 사환은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남! 이게 뭐하는 짓이냐!”
뒤이어 노장군이 가까이 다가오자 호화로운 마차 안에서 호통이 터져 나왔다. 그 말과 함께 음탕한 숨소리는 뚝 끊겨버렸다.
“장군 사남, 남왕을 맞이하러 왔습니다!”
위엄 어린 눈빛을 번득이며 마차 1백 척 앞에 선 노장군이 답했다.
그 순간, 마차의 발이 홱 젖혀지더니 안에서 중년 사내가 걸어 나왔다. 주색에 푹 빠진 듯 눈가가 검은 이 사내는 마차 위에 서서 노장을 노려보다가 불쑥 미소를 지었다.
“하하하! 과연 우리 무헌국의 사남 대장군이로군. 이런 대장군이 변방을 지키고 있는 한 무헌국은 평안할 테지. 내 대장군에게 상을 하사하러 왔다!”
“과찬이십니다. 군영으로 드시지요. 이쪽으로…”
남왕은 여전히 냉랭한 노장군의 눈빛에서 풍기는 어마어마한 압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곳에 있는 모든 병사가 내뿜는 엄청난 살기에 그는 식은땀을 비질비질 흘렸다.
“아니다. 여기가 좋구나. 굳이 들어갈 필요는 없겠지.”
남왕은 애써 웃으며 황급히 말했다.
한데 이곳의 그 누구도 한제가 하늘에서 이곳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한제의 눈은 시종일관 한 사람, 노장군 사남에게 꽂혀 있었다.
“왕이 아니라 대장군이 되어 있군. 전생의 기억을 되찾으면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려나. 하하하!”
한제는 무척 즐거운 듯 밝게 웃었다.
★ ★ ★
깊은 밤, 어스름한 횃불이 흔들리고 병사들 몇 무리가 순찰을 하고 있는 가운데 질서정연한 군영은 난공불락처럼 보였다. 군영 밖은 더없이 고요했고 불이 켜진 막사는 몇 되지 않았다. 등불로 인해 드리운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정중앙 막사의 등불은 유독 환하게 밝혀져 있었고 그 주위는 수많은 병사가 경비를 서고 있었다.
막사 안에서는 노장군 사남이 미간을 찌푸린 채 지도를 보고 있었다. 막사 안에는 그 혼자뿐이라 오직 촛불이 타들어가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남왕⋯⋯ 흥! 그런 자에게는 남왕이라는 호칭도 아까워!”
사남은 지도를 바라보며 차게 웃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남왕이라는 호칭에 유독 신경이 쓰였다.
“그래? 그렇다면 남왕이라는 호칭은 누구에게 어울릴 것 같은가?”
이때 뒤편에서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남은 움찔하더니 재빨리 돌아섰다. 그곳에는 백의백발의 청년이 미소를 머금은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왕이 되기 전까지 남왕이라는 호칭은 누구에게도 어울리지 않을 것 같네만.”
사남은 놀란 기색도 없이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자네도 앉게.”
사남은 마치 가까운 지인을 대하듯 반대편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한제는 내심 감탄하며 새삼스레 사남을 다시 살폈다. 기억의 봉인을 풀기 전인데도 이토록 침착할 수 있다니, 보통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욱이 저 침착함은 억지로 꾸며낸 것도 연기도 아닌 진심이었다.
한제는 미소를 머금은 채 사남의 맞은편에 앉았다.
“술 있나?”
“하하하! 군영에 어찌 술이 없을 수 있겠나! 기다리게. 여봐라! 술을 가져와라!”
사남이 호탕하게 웃으며 외치자 막사 밖에서 공손한 대답이 들려오더니 잠시 후 몇몇 병사가 안으로 들어왔다.
“헛!”
“누, 누구냐!”
한제를 본 순간, 병사들은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낯선 자인 데다가 대장군 막사를 내내 지키는 동안 누군가가 들어가는 모습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술을 놓고 나가거라!”
사남은 위엄 어린 목소리로 명했다. 그러자 병사들은 경계심 어린 눈으로 한제를 살피면서도 술상을 차려놓고는 말없이 물러났다.
“사남 장군, 정말이지 자제력이 대단하군.”
한제는 술을 병째로 들이키며 말했다.
“삼엄한 경비 속에서도 여기까지 온 것을 보면 어차피 자네를 막을 수는 없을 터. 그렇다면 차라리 술이나 같이 한잔하며 이야기라도 나누는 편이 낫지.”
답을 마친 사남은 또한 술병을 들더니 벌컥벌컥 들이켰다.
한제의 얼굴에 어린 웃음기가 더욱 짙어졌다. 진심으로 기뻤던 것이다. 선강 대륙에 온 이래 이 정도로 기뻤던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이모완의 잔혼을 찾았을 때의 기쁨과는 달랐다. 현라와 보낸 시간의 기쁨과도 달랐다. 이것은 막역지우를 다시 만난 기쁨이었다.
한편, 막사 밖에서는 병사들이 다급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한제와 사남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수많은 병사가 막사를 에워쌌다. 장군들까지 나온 상태였다. 이들은 마치 무시무시한 적을 마주한 것 같은 비장한 모습에 진득한 살기까지 풍겼으나, 감히 막사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했다.
어느덧 하늘 끄트머리에 동이 터오기 시작했다. 대장군의 막사를 에워싼 병사들은 하룻밤을 꼬박 새웠다. 만약 막사에서 간간이 흘러나오는 호탕한 웃음소리가 아니었다면 몇 번이고 쳐들어갔을 터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 웃음소리에 의아함을 느끼기도 했다.
“재미있군, 이 선생. 그렇게나 많은 곳을 돌아다니다니. 산해는 나도 들어본 적이 있네. 허나 너무 멀어 나 같은 일반인으로서는 갈 수가 없지.”
사남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빈 술병을 내려놓고 다른 술병을 집어 들었다.
“원한다면 자네도 갈 수 있다네.”
한제는 알싸한 술을 들이키며 오랜 벗을 향해 웃어 보였다.
“허! 이 선생은 분명 수련자겠지. 허나 나는 일반인일세.”
사남의 말에 한제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며 술을 마셨다.
사도환
또다시 시간이 흘러 이제 하늘 끄트머리로 아침 해가 완연한 모습을 드러내며 어둠을 저 멀리 몰아냈다. 한제와 사남은 밤새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제는 선강 대륙에서 겪었던 모든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천우주, 녹마주, 그리고 조성에서의 일들, 심지어 고족 구역에서의 경험들도 빠짐없이 털어놓았다. 이모완의 잔혼 이야기를 할 때는 눈물이 흘렀고 스승인 현라의 이야기가 나올 때는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렇게 긴 이야기는 결국 고족 구역을 떠나 선족 구역으로 돌아왔다는 것으로 무마리됐다.
사남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로서는 상대의 정체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만약 그 절반만 진실이라 해도 상대는 선강 대륙을 통틀어 손에 꼽히는 강력한 수련자일 것이다. 한데 그런 자가 왜 야심한 밤에 자신의 막사에 찾아와 함께 술을 마시며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고 있단 말인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상대가 점점 눈에 익어 갔다. 마치 기억 깊은 속에 묻혀 있던 기억이 점차 또렷해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상대가 이모완이라는 여인의 이야기를 할 때는 그녀에 대해서도 생생하게 아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난 이천매를 찾지 못했네. 사도 난 그녀를 아주 오랫동안 찾아 헤맸지만 끝내 찾지 못했어.”
한제는 중얼거리며 씁쓸한 얼굴로 술을 마셨다. 다른 사람에게는 할 수 없는 말이라도 사도환에게는 할 수 있었다.
“사도? 대체 그게 누군가?”
사남은 복잡한 표정으로 물었다. 밤새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상대로부터 수차례 들었던 이름이었다.
한제는 빈 술병을 내려놓고 다음 술병을 집어 들며 답했다.
“친한 벗의 이름이지.”
한제는 말 끝에 사남을 힐긋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사도라는 사람도 수련자인 모양이군.”
사남은 멍한 눈으로 한제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그자는 수련자야. 왕이 되고 싶어 하는 수련자. 그의 이야기를 하려면 주작성이라는 곳의 3성 수련국인 조나라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하지.”
한제는 기억을 더듬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남은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그의 멍한 빛은 갈수록 짙어졌다.
시간이 흘러 완연한 아침이 되었으나 한제의 목소리는 여전히 이어졌다.
“이천매, 사도환, 청수⋯⋯ 그들은 모두 이 선강 대륙에서 환생했어. 난 그들의 기억을 모두 봉인해 두었지. 그게 내가 그들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해.”
술을 들이키던 한제는 사남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순간, 사남은 몸을 바르르 떨더니 한참 뒤 두 눈을 번쩍 떴다.
“내가… 사도환인가?”
이내 그가 멍한 눈으로 물었을 때, 한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는 사도환이고 나는 이한제라네.”
“이한제⋯⋯.”
중얼거리던 사남은 한참 뒤 돌연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눈가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로서는 한제의 이야기를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지만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상대가 낯익게 느껴졌다. 게다가 수련자가 자신 같은 일반인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이 선강 대륙에서 벌써 수차례 윤회를 했고 지금은 사남이라는 이름의 무헌국 대장군이 되어 있다는 것인가.”
한참을 웃으며 눈물을 흘리던 그는 결국 한제의 이야기를 믿게 되었으나 이를 마음 깊이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다.
“막사 밖의 50만 대군 중에는 조부 때부터 나를 따르기 시작한 자가 있네. 조부가 전사한 뒤에는 그들의 부친이 나의 병사가 되었고 심지어는 그 부친마저 전사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따르기 시작한 자들도 적지 않지. 한데 이 자리에서 자네는 내가 왕이 되고 싶어 하는 수련자 사도환이라고 했어. 무헌국의 사남 대장군이 아니라고… 그렇다면 저들은 대체 어쩌란 말인가!”
사남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막사가 돌연 홱 하고 젖혀지더니 군사들이 안으로 달려들려 했다. 허나 사남이 그들을 모두 물러나게 했다.
“윤회⋯⋯ 한 번의 윤회에 얼마나 많은 구속들이 따라붙던가! 한데 나는 벌써 몇 차례나 윤회를⋯⋯.”
사남은 자리에 주저앉아 복잡한 눈으로 한제를 바라보았다. 표정은 점차 씁쓸하게 변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