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580
“스승님, 저들은 아직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진을 공고히 하고 있어요. 특히 남운자라는 자가 문제더군요. 그자의 원신을 제게 주십시오. 제가 아주 단단히 혼쭐을 내놓겠습니다.”
청년은 잔인한 눈빛을 번득면서도 공손한 목소리로 말했다.
“남운자 정도야 얼마든지 줄 수 있지!”
적혼자는 제자의 얼굴에 떠오른 잔인한 표정을 보며 매우 뿌듯해했다. 자신이 원하는 제자의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모은미는⋯⋯.”
적혼자가 말을 이었다.
“스승님께서 그 여인이 마음에 드신다면 두 손으로 바치도록 하겠습니다.”
청년은 얼른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그녀는 네 선조의 여인이 아니더냐.”
적혼자는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는 만약 한제가 이 모든 일을 알게 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제 성이 이씨이기는 하나 이한제는 동부계를 떠나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남은 여인이야 그의 후손인 저의 외로움을 푸는 데 쓰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요. 그게 스승님의 가르침 아니었습니까?”
청년이 공손하게 말했다.
‘엽막은 죽었지만 이한제 넌 엽막의 유산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이한제, 그에 대한 내 한까지 가져가라!’
제자의 사악한 말에 호탕하게 웃던 적혼자의 눈이 악독하게 번득였다.
“그럴 필요 없다. 모은미는 스승이 널 위해 직접 골라준 여인 아니냐. 내 어찌 그런 여인을 다시 빼앗을 수 있겠느냐. 대신 내 잠시 그 여인을 길들이고 맛을 좀 본 후에 네게 넘겨주마.”
적혼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청년은 웃음을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이틀만 기다리거라!”
적혼자는 눈을 번득이며 두 손으로 결인을 그렸다. 그러자 그를 뒤덮은 피 안개가 격렬하게 꿈틀거렸고 그 너머로 수만 개의 붉은 꼭두각시들은 더 많은 붉은 빛을 방출해 선계의 진을 부식시켜갔다.
그때, 선계의 어느 높은 산봉우리 위에는 백의를 입은 여인이 서 있었다. 동부계뿐만 아니라 선강 대륙 전역을 통틀어도 미모로는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할 정도의 미모였다.
피비린내를 품은 채 불어오는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휘날렸다.
그녀는 혼란과 씁쓸함을 애써 깊은 곳에 묻어둔 채 덤덤하다 못해 냉랭하기까지 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성녀님⋯⋯.”
그녀의 뒤로는 한 노인이 서 있었다. 노인은 여인에게 더없이 공손했으나, 어딘가 모르게 초조함이 느껴졌다.
“진은⋯⋯ 기껏해야 이틀을 버틸 것입니다.”
“알고 있다. 물러가거라. 혼자 있고 싶구나.”
모은미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노인은 잠시 망설이다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포권을 한 뒤 물러났다.
또다시 산봉우리에 혼자 남게 된 모은미는 묵묵히 서 있다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손에는 수정검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이것은 한제가 본원으로 만들어서 준 것으로 그가 품고 있던 도고의 기운도 담겨 있었다.
“내가 더 이상 살아남지 못한다면⋯⋯.”
모은미의 눈빛이 점차 슬픔에 잠겼다. 손에 든 검을 바라보는 눈이 눈물로 반짝였다.
“이한제… 대체 어디에…?”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 수정검에 떨어지더니 칼날을 타고 흘러내렸다.
★ ★ ★
나천성역이 있던 고요하고 어두운 우주. 돌연 눈부신 빛이 번득였다. 그 안에서 곧 문이 하나 생겨나더니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백의와 백발… 한제였다.
“이곳은⋯⋯?”
한제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더니 이내 미소를 지어보였다.
“나천⋯⋯.”
그의 웃음에서는 진심에서 우러난 기쁨이 느껴졌다. 익숙한 기운이 느껴지자 고향에 돌아왔음이 실감났다.
뒤이어 그는 신식을 넓게 펼쳤다.
“선계는 지금쯤 어떻게 변했을까? 내가 떠났을 때와 얼마나 달라졌을지⋯⋯. 그곳의 사람들은⋯⋯.”
그러나 한제의 중얼거림은 이내 뚝 끊기고 말았다. 동시에 고개를 번쩍 쳐든 그의 얼굴은 한기와 살기로 뒤덮였다.
“적혼자⋯⋯.”
선계 안팎에서 벌어지는 일을 파악한 한제는 차게 코웃음을 쳤다. 그는 적혼자의 거만한 웃음을 보았고 그 곁에 자신의 혈맥이 어렴풋이 느껴지는 청년을 보았으며, 선계의 보호진을 부식시키고 있는 붉은 빛을 보았다.
봉인에서 막 벗어났을 때 매우 허약한 상태였던 적혼자는 모든 수준을 회복했으나, 지금의 한제에게는 한낱 미물에 불과할 만큼 미약한 존재였다.
한제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서 나천성역에서 사라졌다. 그러자 빛으로 이루어진 문 역시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한제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적혼자 앞이 아니라 선계 안이었다.
그러나 선계 너머의 적혼자를 비롯해 누구도 그의 출현을 알아채지 못했다.
하늘이 붉게 물든 점을 제외한다면 대지의 궁전들과 산맥, 강 등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이곳을 떠났을 때와 비교해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사방을 둘러보던 한제는 말없이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세 갈래의 빛이 나타났다. 이들은 각각 허이국과 유금표, 십삼이었다.
십삼은 소환되자마자 온통 새빨간 주위를 살폈다. 그는 잠시 놀란 듯했으나 금세 원래의 표정을 되찾고는 깊게 포권을 하더니 말없이 한제의 옆에 섰다. 그에게는 선강 대륙이든 동부계든 스승님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한편, 허이국과 유금표는 놀란 듯 사방을 둘러보다가 이내 뿌듯하고 흐뭇한 표정으로 웃었다. 마치 금의환향한 듯 뿌듯해하는 것이 느껴졌다. ‘알고 있냐? 난 선강 대륙에 갔다 왔다고! 그곳에서 내가 또 이름깨나 날렸지!’라고 거드름피우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동부계로 돌아왔다. 난 오랜 벗들을 좀 만나야겠으니 너희는 맘대로 해라.”
멀리 떨어진 하늘 끄트머리를 바라보며 말을 마친 한제는 한 걸음 내딛더니 긴 빛을 그리며 몸을 날렸다.
그는 이곳에 발을 들인 순간 선계 안의 모든 이들을 신식으로 훑은 상태였다. 그리고 이때 모은미 역시 찾아낼 수 있었다.
산봉우리 꼭대기에 선 모은미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문 채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손에 쥔 수정검을 매만졌다. 마치 중대한 결심을 한 듯 눈빛이 단호했다.
한데 그곳을 떠나려던 순간, 그녀는 온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리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천천히 돌아섰다. 저 앞, 멀지 않은 곳에 누군가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백의백발의 청년은 낯설면서도 익숙하게 느껴졌다.
두 사람은 붉은 하늘 아래 바람을 음악 삼아 서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한제 역시 익숙하면서도 낯선 여인을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복잡하고도 미묘한 감정이 그를 휩쓸었다.
그는 대산파에서 반짝이는 한 여인을 보았던 때를 주작묘에서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을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또한 나천성역에서 이평이 찢어질 듯 고함을 치는 모습을 지나, 동부계를 떠나기 전의 기억에 다다랐다. 그날, 선계에는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렸고 백의를 입은 여인은 마치 나풀거리는 버들잎처럼 그 빗속에 서 있었다.
칠흑처럼 검은 머리를 기른 채 빗속에 우산을 들고 선 여인의 아름다운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기도 했고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기도 했다. 그 기이한 힘은 그녀를 보는 사람들이 모든 것을 잊게 했고 그 절륜의 아름다움은 세상 모든 것을 흐릿하게 뒤덮는 듯했다.
“살아남는다면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했지.”
한제는 모은미를 바라보며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여인의 모습은 기억 속 모습과 겹쳐져 천천히 그의 마음에 녹아들었다.
모은미는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을 믿지 못하는 듯 멍하니 서 있었다.
그녀는 수천 년 전 주작성 대산파의 그 수많은 인파 속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아름다움에 넋을 놓지 않았던 소년을 떠올렸다. 또한 그녀는 주작묘에서 앞을 막아 선 채 냉랭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던 그 인영을 떠올렸다. 그런가 하면 나천성역에서 자신의 분신이 저질렀던 그 모든 짓을 알게 되었을 때, 찢어질 듯 울부짖었던 한 사내와 슬픔에 찬 눈빛도 떠올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상대가 동부계를 떠나던 그날, 내리는 비로 인해 이별의 아쉬움이 더 크게 느껴졌던 그날의 기억도 떠올렸다.
꿈
지금 빗속에 선 한제의 모습은 어딘가 낯설었고 그 낯설음에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 허나 언제나 냉랭했던 상대의 모습이 약간 부드러워졌다. 모은미는 그 부드러움이 이별 때문임을 어쩌면 그 이별을 끝으로 다시는 만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에 보인 부드러움임을 알고 있었다.
“돌아온다면 환영할지도 모른다고 했지.”
모은미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답했다.
눈물이 흘렀다. 한제가 동부계를 떠난 이후로 이토록 유약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던 그녀였다.
한제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모은미 앞에 이르더니 그녀와 함께 붉게 물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동부계를 떠나 선강 대륙에서 지내는 동안 내내 네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돌아왔으니 이제 그 말을 할 수 있겠군.”
한제는 여전히 하늘을 올려다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모은미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있었다. 그녀로서는 이 상황을 믿을 수도 이런 상황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곤허의 성녀로서, 나아가 선계의 성녀로서 언제나 단호하고 결연하게 살아왔던 그녀가 이 정도로 긴장한 것은 처음이었다. 어찌나 힘을 줬던지, 검을 쥔 오른손과 옷자락을 쥔 모은미의 손가락이 하얗게 변했을 정도였다.
“류미⋯⋯.”
붉은 하늘로부터 시선을 거둔 한제는 모은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말하지 마! 듣고 싶지 않아!”
모은미는 심신이 자르르 떨리는 것을 느끼며 창백하게 질린 채 절규하듯 외쳤다. 들고 있던 검까지 떨어뜨린 그녀는 비척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지금의 그녀는 너무나 무력하고 유약해 보여 불어오는 바람에 그대로 흩어져 없어질 것만 같았다.
허나 더 이상 냉랭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가련하고 처연한 그녀의 얼굴은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듣고 싶지 않아! 나는⋯⋯나는… 듣고 싶지⋯⋯.”
방울방울 흐르던 눈물은 뺨을 타고 옷깃을 적시기 시작했다.
한제는 그런 모은미를 혼란과 무기력에 빠져 한없이 유약해진 여인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이번에 돌아온 것은 옛 벗들을 보기 위해서일 뿐만 아니라 너와의 연을 매듭짓기 위해서이기도 해. 난 모완을 부활시킬 방법을 이미 찾았다. 다시 이곳을 떠나면 그녀를 부활시킬 수 있게 될 거야.”
모은미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똑똑한 그녀가 한제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할 리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