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584
그날 밤, 관직에서 물러난 이평이 자신의 아내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제 부모님을 모시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고향집에 도착한 그가 본 것은 잠든 듯 미소를 머금은 채 숨을 거둔 부모님의 모습이었다.
부모님 앞에 한참을 멍하니 서 있던 이평의 뺨으로 눈물이 흘렀다. 그는 부모님의 얼굴과 어렸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부모의 상을 치른 이평과 청희는 이 낡은 집에서 세월을 보내다 부모와 마찬가지로 이곳에서 숨을 거뒀다.
★ ★ ★
십삼이 보호하고 있는 동굴. 한제와 류미는 가부좌를 튼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는 구슬 하나가 회전하고 있었다. 그 구슬에서 발산된 어스름한 빛이 두 사람을 연결하고 있었다.
돌연 한제가 떨리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더니 앞에 앉은 여인을 한참이나 말없이 바라보았다.
파르르 떨리던 여인의 속눈썹 아래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뒤이어 눈을 뜬 여인 또한 한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꿈속에서 그랬던 것처럼 서로를 한참이나 응시했다.
“끝인 건가⋯⋯.”
모은미가 중얼거렸다.
“끝이야. 눈을 감았다 다시 뜨면 모든 것은 새롭게 시작되지.”
한제가 조용히 말했다. 그는 눈앞의 이 여인이 자신에 대해 매우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감정이 얼마나 복잡하든 이제 미련을 놓아버려야 했다.
한제를 멍하니 바라보던 모은미는 상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말에 따라 고여 있던 눈물이 흐르지 못하도록 눈을 감았다.
“눈을 떠.”
이내 그녀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보게 됐다.
모은미가 떠났다.
이 동굴에서, 주작성에서 떠나갔다.
하지만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의 곁에는 백의를 입은 사내도 있었다. 백발을 기른 사내는 평범해 보였지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운을 풍겼다.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기운이었다. 그는 꿈속에서처럼 잡은 모은미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렇게 하늘을 가르며 나아가는 사이, 그는 어렴풋한 모은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너는⋯⋯ 분신인가? 아니면⋯⋯.”
“나는 이한제고 네 곁에 있다.”
한제는 모은미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모은미는 그런 한제를 바라보다 미소를 지었다. 진심에서 우러난 미소였다.
점차 주작성에서 멀어진 그들은 알 수 없는 어딘가로 향했다.
그들이 긴 빛이 되어 하늘 끄트머리로 사라진 그때, 주작성 어느 한쪽, 그들로서는 볼 수 없는 곳에 한제가 서 있었다. 하늘로 사라진 두 사람을 바라보던 그의 얼굴에도 미소가 어려 있었다.
모은미를 따라간 것이 한제의 분신이고 이곳에서 그들을 보며 미소 지은 것이 본체일 수도 그 반대일 수도 있다. 답은 없었다. 진실은 오직 한제만이 알 터였다.
십삼도 떠났다. 한제가 평생 자신의 뒤만을 따랐던 그에게 이만 떠나라고 했기 때문이다. 자라난 새는 스스로 비바람에 맞서야 하는 법이다. 그래야만 땅을 밟고 서서 하늘을 떠받치는 진정한 성체로 성장할 수 있다.
모두가 떠나고 한제만이 주작성에 남아 있었다.
류미와 꿈속에 들어가기 전에 부모님의 묘를 찾아 성묘를 했던 그는 지금 다시 한번 제사를 올리고는 이전에 모완과 함께 머물렀던 집으로 향했다.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집이 있던 골짜기는 이미 사라졌지만 한제는 그곳을 이전의 상태로 되돌려 놓았다. 그리고 오래전에 그랬던 것처럼 그 산골짜기 안에서 모완과 함께 살기 시작했다.
더없이 평범한 나날이었다. 외로웠지만 마음은 평안했고 그 안에서 그는 나름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러갔다. 한제는 산골짜기에 수많은 꽃이 만개한 것을 그 꽃이 내리는 비에 흠뻑 젖는 것을 가을바람에 시드는 것을 내리는 눈에 뒤덮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런 그의 곁에는 언제나 모완이 있었다. 한제는 수천 년 전처럼 귓가에 칠현금 연주 소리가 닿는 것을 느꼈다.
10년 또 10년. 이렇게 고요하고 평화로운 산골짜기 속에서 한제는 무려 70년을 머물렀다.
그동안 모완과 함께하면서 그는 모든 것을 잊은 것처럼 보였다. 자신의 수준에 대해 고민하지도 본원의 깨달음을 연구하지도 않았다. 권모술수와 인생의 곡절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오직 모완만 들어왔고 귓가에는 그녀의 연주만 들려왔으며, 머릿속에도 그녀뿐이었다.
동부계로 돌아온 지 2백 년이 되는 해, 한제가 머무는 이 산골짜기로 손님이 찾아왔다. 예전에 한제와 처음 만났던 그때와 조금도 변하지 않은 대머리 사내였다.
산골짜기 밖에 이른 그는 그곳에 한참을 서서 골짜기 안으로 만개한 꽃들과 나무 오두막을 그 앞에 홀로 외로이 가부좌를 틀고 있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이내 작은 한숨을 내쉰 그의 표정에 슬픈 빛이 드러났다.
한숨을 내쉬며 산골짜기 안으로 들어간 그는 꽃밭을 지나 한제 앞에 이르더니 맞은편에 가부좌를 틀었다. 그의 손에는 술병이 하나 들려 있었다.
그제야 눈을 뜬 한제는 고개를 들어 대머리 사내를 힐끗 보더니 빙그레 웃었다.
“왔군.”
대머리 사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잊지 않았군.”
한참이 지난 후에야 술병을 한제에게 건넨 사내는 자기 몫도 꺼내 벌컥벌컥 들이켰다. 입가로 흐른 술이 옷깃을 적셨다.
“잊은 적 없지. 그런 일을 어찌 잊겠나?”
한제는 술병을 받아 들더니 입가로 기울였다.
“자네는 지금 스스로를 고문하고 있어.”
대머리 사내는 복잡한 심경이 어린 얼굴로 한제를 바라보았다.
“고문이라⋯⋯.”
한제는 중얼거리다가 이내 말없이 술을 들이켰다.
“포기하게. 자네는 성공하지 못할 거야. 이대로 가다가는 자네도 모완도 지치고 말아.”
대머리 사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를 묵지라고 불러야 하나, 아니면 다른 이름으로 불러야 하나?”
대머리 사내는 그 옛날 비 오던 날 밤 사당에서 만났던, 마음을 잃는 것이 망각이라고 말한 바 있던 묵지였다.
“묵지⋯⋯ 내 이름은 언제나 묵지였지.”
묵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한제, 이 모든 것의 답을 자네도 짐작하고 있을 거야. 난 그 모든 것을 자네에게 알려줄 수 있네. 자네⋯⋯.”
“말하지 말게. 세상에는 스스로 알아내야만 하는 일이 있는 법이야.”
말을 끊은 한제는 입가로 술병을 기울였다.
“함께 술이나 하지. 자네와 나, 아주 오랜만 아닌가.”
뒤이어 그는 미소를 지으며 묵지를 바라보았다.
말없이 술병을 든 사내는 한제와 번갈아 가며 술을 한 모금씩 들이켰다.
깊은 밤이 지나도록 누구도 말이 없었다. 그리고 저 멀리 하늘 끄트머리가 밝아오기 시작하자 자리에서 일어난 묵지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난 가네. 자네가 성공하기를 바라지.”
한제를 설득하는 것을 포기한 그는 천천히 걷다가 산골짜기를 막 빠져나갈 무렵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스승님께서 자네에게 물어보라 하시더군. 역진량계(逆塵量界)의 정계(定界) 나침반은 언제 돌려줄 것이냐고⋯⋯.”
묵지의 목소리가 산골짜기에 울려 퍼졌다.
말을 마친 묵지는 다시 걸음을 옮겨 점점 멀어져갔다.
한제는 여전히 가부좌를 튼 채 술을 마셨다. 묵지의 질문에도 그가 떠나가는 것에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
그는 이미 몇 가지에 대해 알게 된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잘 알았다. 자신은 이한제, 주작성 조나라의 한 산골마을에서 대대로 목수 일을 해오던 집안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이었다.
그 후 한 걸음씩 수련의 길을 따라 지금의 경지에 이르렀다.
이모완을 부활시키는 것은 그 자신의 결정이었다.
“나는 나다⋯⋯.”
한제의 눈은 한없이 맑았다.
“묵지도 홍접도 심지어는 묵지의 스승도 그리고 천운자도⋯⋯ 이 세상이, 동부계가 선강 대륙이 전부 허황된 것이자 내가 몽도로 만들어낸 것이라 생각하고 있지.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이내 빙그레 미소를 지은 한제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두 눈은 밝게 번득였다.
“천운자 정말로 내가 네 내력을 모를 거라 생각하느냐!”
번득이는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던 한제는 점차 하늘 너머 선강 대륙 주위의 무궁무진한 어둠 속에서 한 인영을 볼 수 있었다. 검은 옷차림에 긴 흑발을 날리며 묵멸과 살육의 기운을 풍기는 그 인영의 목표는 선강 대륙이었다.
“천운자 이 모든 것의 답을 태고 신경에서 알려주겠다고 했지? 허나 네가 내게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네게 알려줄 것이다! 네게 진실이 무엇인지 알려주겠다!”
한제는 소매를 휘둘러 길궁이 가지고 있던 두개골을 소환했다. 반짝이던 두개골에는 한 줄의 글이 떠오르듯 나타났다가 금세 흩어져 사라졌다.
“모두 잘못 보았다.”
하늘에서 시선을 거두며 미소를 지은 한제는 나무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오두막에는 모완이 누워 있었다. 그 옆에 앉은 한제는 잠든 듯 누운 모완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모완아, 넌 깨어나게 될 거야. 난 이미 진정한 방법을 알아냈으니까. 게다가 난 그 작업을 시고 구역의 조묘에서부터 시작했지.”
한제의 눈에서 광기가 번득였다. 그가 말하는 방법이라는 것은 정말이지 미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바다 근처
한제는 지난 세월을 이 산골짜기에서 모완과 함께했다. 한제로서는 몽도를 발휘했을 때가 아니면 쉬이 가질 수 없는 평화롭고 고요한 시간이었다.
그는 모완에게 이런저런 과거의 기억들을 늘어놓듯 이야기하면서 자신만의 세상에 빠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