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585
그동안 십삼은 몇 차례 돌아와 한제와 수개월을 함께한 뒤 다시 떠나면서 삶과 수련을 이어나갔다.
허이국과 유금표는 어떤 방법을 동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종대홍을 찾아내 셋이 함께 동부계 곳곳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선강 대륙에서 다시 태어나고 성장했던 그들은 동부계의 문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었고 종대홍 역시 한제의 힘을 빌려 선강 대륙으로 향할 수 있었다.
동부계를 한 차례 휩쓴 이들은 사이가 돈독해진 해룡을 타고 선강 대륙으로 향하려 했다. 이들은 떠나기 전에 한제를 찾아와 그를 살뜰히 모시고 아첨을 늘어놓았다. 그 결과 한제에게서 그의 기운이 실린 문양을 받게 됐다.
자신들을 안전하게 보호해줄 표식까지 얻은 허이국 일행은 잔뜩 흥분해 동부계를 떠나갔다. 이들은 한제의 문양과 해룡까지 있는 이상 선강 대륙에서 속이지 못할 이가 없을 것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허이국 등이 동부계를 떠난 지 60년째 되는 해, 한제도 모완을 데리고 선강 대륙으로 향했다.
떠나기 전 그는 신식을 뻗어 선계와 그 안에서 자신이 남긴 도통을 소화하고 있는 수련자들과 십삼, 그 외의 벗들을 살폈다. 이어서 신식을 거둬들인 후 마지막으로 동부계를 한 번 바라보았다.
선강 대륙에서 태고 신경이 열리기 세 달 전이었다. 그곳은 한제의 마지막 전장이 될 터였다.
“모완아, 태고 신경에서 나온 뒤로도 나와 함께하겠느냐?”
중얼거리며 한 걸음 내딛은 한제는 동부계 대문 밖으로 향했다.
★ ★ ★
한제가 떠났다.
그의 모습이 동부계에서 사라졌을 때, 보라색 옷을 입고 허리께까지 머리를 기른 한 여인이 나천성역 어느 평범한 수련성의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 있었다. 바람결에 머리와 옷자락을 휘날리며 여인은 한층 더 우아해 보였다. 가까이서 본다면 얼굴에 보송보송 자라난 솜털이 보일 터였다.
여인은 멍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방금 전 누군가의 신식 한 줄기가 다가와 곁에 잠시 멈추었다가 흩어져 사라진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착각이라고 생각했지만 신식이 사라진 순간 눈앞에 옥패가 하나 나타나 허공에 뜬 채 부드러운 빛을 발했다.
그녀는 서자봉이었다.
옥패에서 발산되는 부드러운 빛을 바라보던 여인은 이내 그 안에서 익숙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꿈에서라도 잊을 수 없는 기운이었다.
“이한제⋯⋯.”
한참을 말없이 서 있던 서자봉은 고운 손으로 조심스레 옥패를 쥐더니 눈을 감고 신식을 주입했다. 그러자 그 안에 담긴 한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참 후에야 다시 눈을 뜬 그녀의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드러나 있었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미소였다.
★ ★ ★
동부계. 계외의 황량한 우주에는 수많은 돌조각이 부유하고 있었다. 이 돌조각들은 모종의 기이한 규칙을 따르는 듯 각자 거대한 호를 그리며 회전했다.
그 중앙의 거대한 돌조각에는 한 노인이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약간 붉은 얼굴로 침착하게 호흡하고 있는 그의 몸은 일정한 간격으로 번득이며 회색 빛을 발산했다. 그 회색 기운은 돌조각에 녹아들었다가 다시 튀어나가 주위의 다른 돌조각에 흡수됐다.
기이한 신통술에 영향을 받은 듯 점점 많은 돌조각이 몰려들었다. 그는 눈을 감은 채 천천히 호흡하면서 체내의 석화력(石化力)을 배출하는 중이었다. 주위의 수많은 돌조각은 바로 이렇게 생성된 것이다.
노인은 당시 풍의 선계 깊은 곳에 있던, 수도자와 맞섰던 한제에게 갈라진 석상으로 도움을 주었던 장본인이기도 했다. 선강 대륙 칠도종 출신인 이 수련자는 칠채선존의 제자였다.
“3백 년 후면 난 완전히 회복할 수 있다. 회복되는 대로 이곳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간다.”
노인은 눈을 뜨고는 돌조각 너머의 평화롭고 고요한 우주를 내다보며 중얼거리더니 말없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눈을 감고 호흡을 이어가려 했다.
한데 그때였다. 돌연 한 줄기 신식이 갑작스레 달려들어 그가 가부좌를 튼 돌조각을 훑고 지나갔다.
너무도 강력한 신식에 노인은 심신이 진동했다. 하늘에 비견될 정도로 강력한 위엄을 내뿜는 이 신식의 주인이 스스로를 숨기고자 했다면 노인은 절대로 그 존재를 감지하지 못했을 터였다.
신식은 노인을 지난 후로도 멈추지 않고 쭉 나아갔다. 하지만 그 흔적조차 더 이상 느낄 수 없게 됐을 때, 노인 앞 허공에 단약 하나가 남겨져 있었다. 놀라운 세상의 힘을 발산하는 붉은 단약은 심지어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체내의 석화력이 그대로 제압되려 할 정도였다.
단약을 한참 바라보던 노인은 불현듯 방금 자신을 스쳐간 신식에 익숙한 기운이 어려 있었음을 뒤늦게 떠올리고는 흠칫 놀랐다.
“⋯⋯그였군.”
★ ★ ★
같은 시각, 계외 우주에 떠 있는 어느 평범한 수련성 중앙에 잠든 듯 눈을 감고 있던 갓난아이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당장이라도 뜰 것만 같았던 눈은 한참이 지나도 떠지지 않았고 아이는 다시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이때 이 수련성 안팎으로는 무궁무진한 영력이 몰려 있었다. 사방으로부터 끌려 들어온 이 영력은 갓난아이에게 흡수됐다.
그런 아이의 앞에는 신식으로 이루어진 옥패가 있었다. 실체와 허상의 중간 정도인 옥패는 얌전히 뜬 채 갓난아이가 깨어날 그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갓난아이가 잠들어 있는 이 수련성은 일견 평범해 보였다. 굳이 특이한 점을 꼽자면 우주 멀리서 보면 하나의 눈알처럼 보인다는 것 정도였다. 수련성의 산맥들은 하나하나가 그 눈알의 실핏줄 같았고 드넓은 바다는 흰자 같았으며, 그 바다에 뜬 대륙은 눈동자 같았다.
이전에 이곳에 방문했을 때, 한제는 갓난아이가 된 채 잠든 탁삼만이 아니라 탁삼이 택한 이 수련성도 살핀 바 있었다.
한제가 떠난 뒤, 동부계는 고요해졌다. 무언가가 점점 강력하게 성장하고 있는 듯했고 누구도 알아차릴 수 없는 한 줄기 힘으로 완전히 뒤덮인 상태였다. 이곳을 대대손손 보호하면서 더는 적혼자 같은 자에게 시달리지 않도록 막아줄 힘이었다.
★ ★ ★
선강 대륙 선족 구역, 동주 천우주. 안개로 뒤덮인 산봉우리에서는 강력한 힘 한 줄기가 하늘로 솟구쳐 올라 반짝이는 빛으로 부서져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빛이 지나간 이후, 칠도종에 있는 동부계 대문에서 한제가 빠져나왔다.
동부계에서 3백 년을 보내고 돌아와 선강 대륙의 하늘을 올려다보던 한제는 잠시 후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칠도종⋯⋯.”
중얼거리던 한제는 오른손을 휘둘러 광풍을 소환했다. 광풍은 칠도종을 뒤덮고 이곳의 폐허를 흩어 없앤 뒤 강력한 위엄이 느껴지는 종파로 변모시켰다.
“이곳은 동부계를 떠나온 자들의 집이 될 것이다.”
혼잣말을 이어가던 한제는 오른손으로 허공을 움켜쥐어 스무 개 남짓한 빛 덩어리를 소환했다. 그 덩어리들은 줄기줄기 빛을 그리며 흩어지더니 선족 구역 곳곳에 나타났다.
사막을 걷던 청수는 고개를 들어 한 덩어리 빛이 날아드는 것을 바라보았다. 이 빛 덩어리는 곧장 그의 체내에 녹아들었고 청수는 몸을 한 번 바르르 떨더니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 ★ ★
같은 시각, 하늘을 질주하던 홍삼자는 검광에 휩싸인 음험한 얼굴의 노인을 뒤쫓고 있었다. 노인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어려 있었고 홍삼자의 안색도 다소 어두웠다.
한데 그때, 돌연 한 덩어리 빛이 나타나 홍삼자의 미간에 녹아들었다. 순간 눈을 가늘게 뜬 홍삼자는 더욱 빠르게 추격을 이어갔다.
청림과 주은혜, 홍접, 주일을 비롯한 동부계 출신의 다른 사람들도 모두 갑자기 나타난 빛 덩어리를 통해 칠도종의 소재를 파악하게 됐다. 이번 생에서는 일반인으로 살아가기로 결정한 이들도 후에는 칠도종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칠도종을 슥 훑어본 한제는 밖으로 나가 강력한 진을 설치했다. 동부계 선계에 둘러놓은 것만큼이나 강력한 진이었다. 이 진이 있는 한 그가 태고 신경에서 빠져나오든 그러지 못하든 동부계와 칠도종은 안전할 것이다.
모든 할 일을 마친 한제는 하늘을 향해 성큼 걸음을 옮겼고 점차 투명해지던 그의 모습은 이내 완전히 사라졌다.
“3백 년⋯⋯. 그간 선황이 된 광인과 시고 황존이 된 계도는 어떻게 지냈을까? 그리고⋯⋯.”
한제가 중얼거렸다.
“이천매는 대체 어디 있는 걸까?”
한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이천매가 청수처럼 스스로 전생의 기억을 되찾았을 것이라 짐작했다. 또한 이천매가 자신을 보려 하지 않는 이유 역시 알 수 있었다.
“묵묵히 내 행복만을 빌어주겠다는 거겠지.”
고개를 들어 저 멀리 하늘을 내다보던 한제는 언젠가 이천매가 속삭이듯 말해준 물고기와 새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한참 뒤, 그는 눈을 감은 채 고족 구역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태고 신경에 들어갈 때 고족 구역을 통해 들어가겠다던 고도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 ★ ★
며칠 뒤, 선족 구역을 지나 분지가 된 바다의 가장자리에 이른 한제는 중앙에 수직으로 선 바닷물의 장벽을 향해 다가갔다.
장벽에서는 요란한 콰쾅 소리가 들려왔다. 바람과 구름이 몰려들며 하늘이 어둑해졌다. 끝없는 바닷물의 장벽은 3백 년 전보다 더욱 거칠어진 모습이었다.
콰르릉!
거대한 소리에 하늘이 뒤흔들렸고 급속도로 회전하고 있는 바닷물 장벽에서는 대량의 파문이 일어났다.
파도는 서로 충돌하면서 하늘로 솟구쳐 오르려 했고 그 깊은 곳에 자리한 아홉 개의 거대한 기둥은 아홉 가지의 색을 발하면서 장벽을 몽환적인 빛으로 물들였다.
선강 대륙에서 돌고 있는 태고 신경과 관련한 소문에 수많은 이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그들의 진득한 욕망과 갈망이 대기를 무겁게 채웠다.
장벽 한쪽에 서 있던 한제는 곧장 장벽을 지나 고족 구역에 들어선 후 조용히 가부좌를 튼 채 태고 신경이 열릴 때를 기다렸다.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다. 수백 년간 전쟁을 준비해온 선강 대륙의 고족과 선족은 잠에서 깬 두 마리의 흉수처럼 어마어마한 기세를 뿜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