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589
그 말에 천운자는 흠칫 놀랐다.
“난 녀석에게 자주적인 의식을 주었어. 분신에게 자유를 허락한 거지. 그리 하자 모든 것이 또렷해지더군. 전생이라… 네가 말한 전생은 내가 보낸 살육의 분신이다. 선강 대륙이 허상이라고? 똑똑해 말해두지. 선강 대륙은 꿈도 허상도 아냐! 또한 이 이한제는 환생한 것이 아니다! 난 주작성에서 태어나 여태까지 살아왔어. 난 나야!”
한제는 선언하듯 외치고는 천운자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럼에도 너와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여긴 것은 바로 내 살육의 분신이 과거 속에서 뭔가를 성공적으로 바꿨기 때문이지. 지금 그 살육의 분신이 과거 속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디에 있는지는 나도 몰라. 허나 나는 길궁의 두개골에서 살육의 신식을 확인했다.
내 지시에 따라 모완을 되살릴 방법을 남겨 놓은 거야! 그 신식은 내게 살육의 분신이 과거 속에서 세상을 뒤집어엎고 나침반 하나를 빌렸음을 알려주더군. 그 나침반이 바로 모완을 부활시킬 관건이지.”
천운자는 가늘게 떨기 시작했다.
“뒤이어 그는 그 나침반을 선강 대륙에 두고 그 안에 수차례 들어갔어. 허나 그때마다 내 살육의 분신은 빠르게 흩어졌지.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태고 신경에 들어왔을 때, 그는 완전히 흩어져 사라지기 전 임무를 완수하고 나침반을 폭발시켰어. 그로 인해 나침반은 불완전해졌고 기령과 분리됐다. 그게 바로 너다!”
모완, 일어나
천운자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한제를 올려다보며 격렬하게 떨었다. 그 눈빛에는 형용할 수 없는 두려움도 어려 있었다.
“마, 말도 안 돼! 말도 안 되는 소리!”
“너를 풀어준 뒤 정계 나침반의 본원인 너를 이용해 모완을 부활시키는 것. 그게 내가 생각해낸 방법이다. 윤회는 바로 거기에 있다. 완전히 깨우친다면 원하는 대로 통제할 수 있겠지만 완전히 깨우치지 못한다면 그것을 전생으로 부르게 되는 거야.
그것은 하나의 원처럼 언제나 그곳에 있기에 볼 수도 느낄 수도 있다. 묵지의 말처럼, 홍접의 기억처럼, 네가 도고 구역의 민둥산에서 육묵을 알아보았던 것처럼.”
한제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천운자는 격렬하게 몸을 떨었다.
“고조와 선조, 그들은 윤회를 완벽히 깨우치지 못했다. 그저 허상이며 거짓이라고 생각한 채 도를 찾다가 죽었지. 그게 바로 윤회인 것을⋯⋯. 윤회를 완전히 깨닫고 나면 그것이 하나의 원에 불과함을 알게 되지. 마음대로 그 안팎을 오갈 수도 원하는 한 부분을 선택해 움켜쥘 수도 있는 원.”
한제는 고개를 두어 번 젓더니 덤덤한 눈으로 천운자를 바라보았다.
“넌 나를 함정에 빠뜨렸다고 생각했겠지? 오히려 함정에 빠진 것은 너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난 내 두 눈으로 직접 네가 수차례 윤회를 거쳐 지금의 모습으로 환생하는 것을 봤다! 나침반 안에서 흩어져 사라지는 것을 봤단 말이다!”
천운자는 광기 어린 눈빛을 번득이며 외쳤다. 한제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평생을 공들였는데 오히려 자신이 함정에 빠질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폭발한 나침반으로부터 분리됐을 때만 해도 그것이 그저 불운한 사고라고 생각했다. 허나 이제 와서 보니 그 모든 것이 한제의 수작이었던 것이다.
“말도 안 돼! 믿을 수 없다!”
천운자는 날카롭게 울부짖었다. 거대한 허상이었던 그는 온 하늘을 가린 짙은 검은 안개가 되어 단숨에 집어삼킬 듯 매섭게 한제에게 달려들었다.
“직접 보았다고 모든 것이 진실은 아닌 법. 윤회를 보지 못했기 때문인 게지. 윤회는 바로 거기에 있다. 이해한다면 단박에 알아차리겠지만 그러지 못한다면 영원히 알 수 없어.”
한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천운자의 목소리가 태고 신경 일곱 색채의 눈이 내리는 산으로부터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그 거대한 몸은 검은 안개가 되어 한제에게로 돌진해왔다.
결국 한제는 모든 이를 속여 온 것이다. 천운자 역시 이 모든 것이 한제의 꿈이 아니라 육묵의 도였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으니 말이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에 천운자는 제정신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정계 나침반의 기령인 그는 일찍이 정계 나침반 안에서 한제가 차례차례 윤회를 거치고 흩어져 사라지는 것을 직접 본 바가 있다. 마지막에 한제가 이 나침반을 폭발시킨 뒤 흩어져 사라지는 것까지 봤을 때는 기쁨을 감추지 못해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허나 그는 자신의 내력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아주 오래 전 처음으로 깨어난 순간부터 선계 나침반이었던 것만을 기억했고 이것을 빌린 한제가 천운자 자신이 나침반과 분리될 때까지 반복된 윤회를 겪으며 흩어져 사라지는 것을 지켜봤을 뿐이다.
그렇게 분리된 순간, 천운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쁨에 전율했다. 자유를 찾게 된 그는 더 이상 죄인처럼 나침반에 갇혀 살고 싶지 않았다. 한제를 차지하려 한 것이 바로 그런 이유였다.
그가 보기에 선강 대륙 내의 모든 것은 허상이고 오직 한제만이 실체였다. 한제를 빼앗을 수만 있다면 그 육신을 통해 완전한 답천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을 거라고 그리고 그때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때로는 자신이 단지 기령이 아니라 그 나침반의 수호자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어쨌든 한제의 몸을 빼앗기만 하면 더는 그 안에 갇혀 기령으로 살아갈 필요가 없을 터였다. 결국 그가 해온 모든 일은 자유를 얻기 위해서였다.
그는 완전한 자유를 쟁취하게 되면 자신의 내력이 무엇인지, 대체 누가 자신을 이 나침반의 기령으로 삼은 것인지도 알아봐야겠다고 결심했었다.
정계 나침반은 그 자체로 강력했지만 그보다는 특정 존재를 역진계로부터 퇴출시키는 역할이 더욱 중요했다.
그런 정계 나침반의 기원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기억은 흐릿하기만 했다. 천운자는 자신이 왜 그 안에 갇혀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이것을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자유를 쟁취할 수만 있다면 답도 찾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런 기억과 계획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그에게는 더 이상 희망이 없었다. 남은 것이라고는 절망과 분노, 두려움과 불만뿐이었다.
“크아아아! 네놈을 용서하지 않겠다!”
천운자는 날카롭게 울부짖으며 하늘을 뒤덮은 검은 안개가 되어 한제에게 달려들었다. 허나 그 순간, 한제의 얼굴에는 엷은 미소가 드러났다.
한제는 달려드는 검은 안개를 바라보며 오른손을 가볍게 휘둘렀다.
“윤회를 파악했을 때, 난 이미 답천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 순간, 하늘을 뒤덮었던 검은 안개가 소리조차 남기지 않고 빠르게 흩어져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 이럴 수는 없어! 이럴 수는 없단 말이다! 이한제! 네놈을 멸할 것이다! 으아아아!”
천운자는 찢어질 듯한 비명을 퍼뜨리며 흩어지던 안개가 응집돼 거대한 머리가 됐으나, 그 생김새는 천운자와는 전혀 달랐다. 이 중년 사내의 미간에 새겨진 별 문양이 번득였다. 그 문양 안에서는 한 마리 학의 허상이 발버둥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찰나의 순간 흩어져 버렸고 남아 있던 검은 안개가 응집되더니 순식간에 한 마리 거대한 검은 학이 됐다.
“캬아아아!”
하늘을 향해 울부짖던 학은 곧장 한제에게 달려들었다.
한제는 덤덤한 눈으로 검은 학을 바라보다가 한 걸음 성큼 나서며 오른손을 불쑥 내밀었다. 다음 순간, 그의 손에는 검은 안개로 이루어진 학의 목이 쥐어져 있었다.
“캬오오오!”
검은 학은 끊임없이 발버둥 치며 꽥꽥 소리를 질러댔다.
한제는 눈을 번득이더니 학의 목을 쥔 오른손에 힘을 주었다.
쾅!
굉음과 함께 태고 신경의 대지가 격렬하게 진동했고 하늘은 혼탁해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검은 학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검은 학이 붕괴되자 혼란에 빠져 있던 천운자의 신식 또한 와해됐다. 마지막 한 줄기의 이성마저 소멸되려던 순간, 천운자는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았던 것 같은 기억을 떠올렸다.
“도신계(道晨界)⋯⋯ 내 고향⋯⋯.”
천운자가 중얼거리는 사이 그의 신식은 완전히 흩어졌고 철저한 죽음을 맞은 것이다.
동시에 학으로 응집됐던 검은 안개도 분산됐다. 안개를 이루고 있는 검은 기운 안으로 한 줄기 회색 기운이 엿보였다. 그것은 한제가 지켜보는 가운데 곧장 뒤로 물러나더니 하늘과 땅을 이은 다리 뒤 허상으로 파고들어 자취를 감췄다.
허나 그 회색 기운에 천운자의 기운은 담겨 있지 않았다.
한제는 이러한 상황에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마치 그 회색 기운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그쪽을 살피지도 않고 손을 펼쳐 흩어지고 있는 검은 기운을 가볍게 움켜쥐었다. 검은 기운은 다시 몰려들어 한제의 손바닥 위에 주먹만 한 덩어리로 응집됐다.
이렇게 응집된 덩어리는 검은색이 아니었다. 아홉 가지 색이 어우러진, 무척 아름다운 덩어리였다.
“일계(一界) 본원⋯⋯.”
손 위에 놓인 덩어리를 바라보는 한제의 눈빛에는 격앙된 감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숨을 깊게 들이마신 한제는 왼손을 휘둘러 관을 하나 소환했다.
관에는 한 여인이 잠든 듯 누워 있었고 천하의 절색은 아니었으나 부드럽고 따스한 외모의 여인이었다.
“모완⋯⋯. 내가 말했지? 하늘이 널 데려간다면 널 빼앗아올 거라고…”
여인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리던 한제의 두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의 뺨을 타고 흐른 눈물은 여인의 뺨 위로 떨어졌고 입가로 스몄다.
“그 약속을 지킬 때야, 모완아. 수천 년이나 걸렸지만 드디어 해냈어!”
한제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오른손에 쥔 아홉 색채의 덩어리를 조심스레 모완의 미간에 밀어 넣고는 그 덩어리가 여인의 체내에 녹아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 시간은 그에게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한제의 얼굴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심지어 죽음을 눈앞에 뒀을 때보다도 훨씬 더 긴장한 모습이었다.
“모완아, 눈을 떠. 제발…”
한제는 모완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쓰다듬으며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처음 만난 이래 단 한순간도 잊거나 포기하지 않은 여인이었다.
도움을 청하던 유약한 목소리, 방황하는 눈동자에 숨어 있던 한제는 그답지 않게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만약 그때 고개를 들지 않았더라면 이 모든 것은 지금과 전혀 달라졌을 터였다.
수마해에서 몇 년을 보내고 눈을 뜬 순간, 그 나약한 몸으로 동굴 입구를 굳건히 막고 버티던 여인을 본 순간, 한제는 바르르 떨리는 심장을 주체할 수 없었다.
여인은 얼굴이 창백하게 질릴 때까지 청룡의 비늘에 심혈로 비늘을 새겨 구명 법보를 만들어주었지만 당시 수많은 이들의 원한을 사 도망쳐야만 했던 한제는 그녀를 잊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되뇌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운천종 누각 안에서 칠현금을 연주하던 여인의 쓸쓸한 모습을 본 순간, 그는 자신이 그녀를 끝내 잊지 못했음을 앞으로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임을 깨달았다.
‘내 왼손은 수마해에서의 짧은 인연이었고 오른손은 1백 년간의 좌선이었구나.’
한제는 눈물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모완아, 제발 눈을 떠. 평이, 그 아이도 깨어날 거야. 넌 언제나 아이들을 좋아했잖아. 제발…”
세월은 기다려주지 않건만 우리는 대체 언제나 함께할 수 있는 것인가?
“모완, 나야. 우리는 부부잖아. 삶을 함께 걸어야지. 제발…”
한제의 눈물은 점점 굵어졌다.
따스한 나날을 보냈던 산골짜기, 고개를 돌리면 볼 수 있던 장면들이 한제의 머릿속에는 여태 남아 있었다. 그로서는 잊을 수도 없고 잊고 싶지도 않은 기억이었다.
그곳에서 점점 늙어가던 모완이 끝내 눈을 감은 순간, 한제는 찢어질 듯 아픈 마음을 안은 채 울부짖었다. 이렇게 모완을 잃을 수는 없었던 그는 어떻게 해서든 그녀를 되찾고야 말겠다고 맹세했다.
한 번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기까지 봉인된 기억을 하나하나 깨뜨리고 슬픔의 심연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들어가야 했지만 조금의 후회나 원망도 없었다.
“모완, 제발 일어나. 어서⋯⋯.”
한제는 잠들어 있는 여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눈물을 흘렸다.
“제발… 나를 혼자 두지 마. 제발… 제발!”
한제는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 눈물이 앞을 가려 제대로 볼 수조차 없었다.
그때였다.
부드럽고 따뜻한 손 하나가 그의 뺨을 매만졌다.
이어서 모완의 꼭 감긴 눈 위로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고 천천히 눈꺼풀이 들어 올려졌다. 모완의 두 눈은 수천 년 전 그 어느 날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따스함이 가득했다.
“울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