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59
“사제, 저 계집 알고 있어?”
한제는 침착한 눈빛을 유지한 채 고개를 저었다.
눈썹을 치켜 올린 소년이 웃으며 말했다.
“쩨쩨하게 굴기는… 방금 저 계집은 분명 사제를 알아보는 눈치던데? 걱정 마, 난 저 계집한테는 관심이 없으니. 내 마음에 품은 여인은 한 명뿐이거든. 아름답고 지혜로운 이동희 말이야.”
한제는 대꾸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려 가던 길을 가려 했다. 한데 소년이 얼른 그의 곁으로 따라붙으며 말했다.
“이름이 뭐지? 난 남원(南苑)의 제자야. 가는 방향을 보니까 남원으로 가는 것 같은데?”
한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운천종의 동서남북은 명확한 구분이 되어 있어서 사제가 남원에 가는 것은 굉장히 어려울 거야. 그렇지만 않았어도 나는 매일 같이 동원에 갔겠지. 그곳에는 아름다운 여인들이 구름처럼 모여 있거든. 적당한 계집 하나 둘 정도 꾀어 품에 안고 놀면 얼마나 좋을까!”
정현은 아깝다는 듯 중얼거리더니 다시 물어왔다.
“아 참, 남원에는 뭐 하러 가는 거지? 내가 도와줄 수도 있을 텐데…”
한제는 정현의 커다란 꿈을 듣고 웃으며 말했다.
“도움은 필요 없습니다. 남원으로 가는 데 어떤 제지도 받지 않을 거고요.”
정현은 흠칫 놀라며 한제를 몇 번 살피더니 이마를 탁 치며 말했다.
“네가 이한제로구나! 생각났다. 두 달 전 주림 사숙의 제자로 들어갔지? 운이 아주 좋았어! 주림 사숙의 제자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다고.”
한제는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물었다.
“왜죠? 사부님의 연단술 수준이 높아서 그렇습니까?”
정현은 깊은 부러움이 담긴 눈빛으로 말했다.
“주림 사숙의 연단술은 범상치 않지만 그래봤자 3품 정도지. 나도 벌써 2품의 단약을 만들 수 있는 걸. 머지않아 3품의 단약도 만들 수 있게 될 테지.”
고개를 끄덕인 한제는 남원으로 향했다. 그러나 정현은 그에 대한 말은 더 하지 않고 음흉한 눈빛으로 헤헤 웃으며 말했다.
“사제, 사제가 원하는 답을 해줄 수는 있지만 그 답을 들으려면 사제도 주는 게 있어야지. 나랑 같이 동원에 가는 게 어때?”
한제는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답하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정현은 꿈쩍도 않는 한제를 보고 얼른 입을 열었다.
“사형, 이제 사형이라고 부를게. 나랑 같이 동원에 한 번만 가자. 별일도 아니잖아.”
한제는 상대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날 데리고 왔다는 구실로 아까 말했던 그 계집을 찾기 위해서 동원에 갈 생각이지요? 꿈에 그리던 이동희를 보기 위해서 말입니다.”
정현은 흠칫 놀라더니 얼른 씨익 웃으며 말했다.
“맞아, 맞아. 간단한 일이지. 어때?”
“왜 다들 주림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건지 말씀하시죠.”
한제가 느릿하게 말했다.
“그야 주림은 좋은 사부니까. 게다가 사실 우리 운천종의 최고 미녀는 동원이 아니라 남원에 있거든! 남원의 이 장로님 말이야. 선녀 저리 가라지. 운천종에 있는 세 명의 5품 연단사 중 한 분이기도 하고…
생각해봐, 주림의 제자가 되면 바로 이 장로님의 문하생이 되는 건데 그렇게 되면 이 장로님의 얼굴을 뵐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각종 연단도 얻을 수 있을 거 아니야. 어떤 사람이 부러워하지 않을 수 있겠냐고.”
정현이 말했다.
“이 장로?”
한제가 중얼거렸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이 장로님은 일찍이 화분국 낙하문의 제자였다지 아마?”
한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 씨 성을 가진 장로 화분국 낙하문의 제자⋯⋯그 두 가지 단서에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한제의 머릿속에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는 이름이 있었다.
“말도 안 돼⋯⋯.”
한제가 중얼거렸다. 설마 그런 우연이…? 과거의 그 어리고 나약했던 여인이 어떻게 운천종의 장로가 되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한제는 실소를 터뜨리며 너무 지나친 생각이라고 자조했다.
“이 장로님은 절세의 미녀이자 총명하신 분이야. 일찍이 화분국에 있었을 때부터 두각을 드러내셨대. 다만 화분국이 선무국에 반격을 당하면서 낙하문이 붕괴되고 그 제자들이 사방으로 도망치게 되지 않았다면 이 장로님이 운천종에 오는 일은 없었을 거야.”
한제는 고개를 끄덕일 뿐 더는 아무 말도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눈을 휘둥그레 뜬 정현은 얼른 그의 뒤에 따라붙어서는 헤헤 웃었다.
“사형, 동원에는 언제 갈 거야?”
한제는 하늘을 힐끔 보다가 입을 열었다.
“스승님을 뵌 후에 가죠. 하지만 이전에도 말했듯이 난 그 계집을 모릅니다. 심지어 이름조차 몰라요. 그러니 동원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해도 원망하지 마십시오.”
정현은 흠칫 놀라는 듯했지만 이내 눈동자를 굴리며 웃었다.
“상관없어, 그 계집의 이름은 내가 알고 있으니까. 동원으로 가서 그 사람을 찾아왔다는 말만 사형이 전해주면 돼. 난 내 눈썰미를 믿어. 그 계집은 분명 사형을 알아보는 눈치였다니까.”
한제는 말없이 남원으로 향했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정현은 한 시도 쉬지 않고 나불거렸다. 얼마나 말이 많은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운천종 내의 각종 풍문과 소문 등에 대해 줄줄 내뱉었다.
어찌나 말솜씨가 좋은지 눈앞에 그 장면들이 생생히 그려지는 듯했다. 덕분에 과묵한 한제도 짜증이 나지는 않았다.
“이 장로님으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 운천종에 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 대략 1백 년쯤? 하지만 그분의 연단술은 정말 대단해. 어떤 선배들은 이 장로님 혼자서 운천종의 두 5품 연단사와 맞붙어서도 전혀 뒤지지 않고 우리 운천종의 3대 보물 중 하나인 5품 수마단(修魔丹)을 만들어냈다고 하지.”
그 단약에 대해 이야기를 하던 정현의 얼굴에 부러워죽겠다는 기색이 어렸다.
“수마단?”
한제는 흠칫 놀라며 물었다. 너무나 이상한 이름이었다. 설마 그 단약을 복용하면 수마해의 수련자들처럼 되기라도 하는 것인가?
정현은 한제의 표정을 보고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이름이 좀 특이하지? 당시 그 단약을 만들어냈을 때 장문인께서 이 장로님께 이름을 지으라고 하셨더니 이 장로님이 그런 이름을 지었다는 거야. 이름은 그렇지만 실제 작용은 수마해와는 전혀 관련이 없지.”
“무슨 효과가 있죠?”
한제는 의아함을 느끼며 물었다. 수마해, 이 씨 성, 화분국 낙하문의 제자⋯⋯ 모두 그녀와 관련이 있는 단서들이었다.
“효과가 엄청나다고는 하는데 사실 나도 무슨 작용을 하는지는 몰라.”
정현이 어깨를 으쓱하며 자조했다.
“내가 어떻게 알겠어? 말했잖아, 그 단약은 우리 운천종의 3대 보물 중 하나라니까.”
한제도 개의치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두 사람은 어느새 남원 근처에 이르러 있었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아치형의 긴 다리였다. 다리 아래로는 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그 물에서 퍼져 나오는 진한 영기에 가슴이 뛸 정도였다. 또한 그 물에는 여러 마리의 칠색 잉어가 노닐고 있었다.
“사실 수마단에 관련된 여러 소문들이 더 있는데 들어볼래?”
정현은 다리를 앞에 두고 웃으며 말했다.
“말씀하시죠.”
한제는 다리를 살피며 대꾸했다. 안개가 가린 탓에 다리 너머의 광경은 볼 수 없었지만 흐릿하게 조각된 난간과 옥으로 된 계단이 어렴풋이 시야에 들어왔다. 덕분에 우아하고 아름다운 곳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소문에 따르면 이 장로님께서는 일찍이 수마해에서 지내신 적이 있대. 그 수마단은 그때 만들어내셨다는 거지. 물론 소문일 뿐이야. 이 장로님에 관한 소문은 매우 많거든. 기회가 되면 다른 소문들도 알려줄게.”
정현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한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포권을 한 뒤 다리 쪽으로 향했다.
“한제 사형는 초면인데 오랜 친구 같은 느낌이야. 여기서 기다릴게. 함께 해야 할 중요한 일이 남아 있다는 거 잊으면 안 돼!”
한제는 정현의 외침을 못들은 척 걸음을 옮겼다.
남원으로 들어서자 안개가 더욱 짙어져 30척 앞도 보이지 않았다. 물론 한제의 본신이었다면 신식으로 주변을 훤히 살필 수 있을 테니 문제가 되지 않았을 터였다. 허나 응기 8단계에 불과한 지금 이 분신으로는 천천히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깊이 들어갈수록 안개는 더욱 짙어져 10척 이내로 줄어들었다.
그때, 허공에서 울리는 듯 공허한 목소리가 안개로부터 흘러나왔다.
“남원의 금지 구역이다. 외부에서 온 제자는 영패를 가지고 있지 않은 이상 들어올 수 없다.”
한제는 걸음을 멈춘 뒤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소리 높여 말했다.
“제자 이한제, 스승님을 뵈러 왔습니다.”
안개 속에서 울리던 목소리는 한참 동안 침묵했다. 이윽고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파동을 일으키듯 한제의 앞을 가린 안개를 양쪽으로 가르자 통로가 드러났다. 약간 구불구불한 길은 남원의 깊은 곳을 향해 뻗어있었다.
슬픔
“이 길을 따라가면 이 장로의 처소가 나온다.”
목소리가 다시 나타났다.
한제는 통로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멀리서 느릿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따라 걷다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이미 통로의 끄트머리에 이르러 있었다. 백옥으로 만들어진 건물이 나타났다.
창을 통해 건물 안에 앉아 있는 여인의 흐릿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정좌를 하고 있는 그녀 앞에는 가야금이 하나 놓여 있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천상에서 울려 퍼지는 듯한 가락이 가랑비처럼 마음을 적셨다. 한제는 말없이 조용히 그 노래를 들었다.
한참 뒤 음악이 멈추고 우아한 목소리가 건물 안에서 흘러나왔다.
“자네가 이한제인가?”
목소리가 귀에 닿은 순간, 한제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 눈을 홉떴다. 하지만 이내 평상시의 표정을 되찾은 그는 차분히 답했다.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