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590
문득 되돌아보니
태고 신경의 둥근 대지 중앙, 일곱 색채의 눈이 내리는 산 위.
그곳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한제와 이모완이었다.
그들은 말없이 저 앞에 있는 다리를 바라보며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제는 부드러운 눈으로 모완을 바라보았다. 영원처럼 오랜 세월, 무려 수천 년을 기다려온 끝에 다시 마주한 여인이었다.
시고 조묘 안에서 보았던 것과는 달리 일곱 색채의 눈에서 슬픔은 찾아볼 수 없었다.
“여기를 떠나 어딘가 평범한 곳에 정착하자. 거기서 이야기를 들려줄게. 아주 긴 이야기지만 평생을 다해서라도 이야기를 해줄 거야. 평이와 그 아이의 아내 청희도 찾아야겠지. 너도 분명 그 애들을 좋아하게 될 거야.”
한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모완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한제를 바라보았다. 상대의 얼굴은 이전과 다르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 얼굴에 담긴 오랜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을 되살리기 위해 한제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고 얼마나 많은 대가를 들였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제 너와 함께 하늘을 밟을 거야.”
고개를 들어 멀지 않은 곳의 다리를 바라보던 한제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밝게 번득였다. 그 눈에서는 수천 년간 묻어나던 슬픔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한제는 모완의 손을 꼭 잡았다. 이 손을 놓으면 다시는 그녀를 찾을 수 없게 될까봐 두렵기라도 한 것처럼.
모완 역시 다시는 놓기 싫다는 듯 한제의 손을 꼭 잡았다. 따뜻한 손에서는 수천 년간 느껴보지 못한 따뜻함과 평화로움이 전해졌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답천교에 이른 두 사람은 다리의 끝에 이른 순간, 우뚝 멈춰선 한제가 왼손을 들어 뒤쪽의 대지를 향해 휘둘렀다. 그러자 텅 비어 있던 대지에서는 세 갈래의 빛이 나타나 휙 솟구쳐 올랐다.
첫 번째 빛 안에는 나침반 반쪽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대지와 융합해 이 둥근 대지에 지금껏 허상으로만 존재했던 절반이 차차 실체로 굳어졌다. 대지의 수많은 균열과 산맥으로 이루어진 눈금과 문양은 눈부신 빛을 폭발적으로 뿜어냈다. 그리고 완전해진 나침반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 번째 빛에 들어 있는 것은 거대한 바늘이었다. 둥둥 떠 있던 바늘은 급속도로 내려앉아 일곱 색채의 눈이 내리는 산과 융합해 둥그런 대지를 휩쓸었다. 그러자 한 줄기 어마어마한 힘이 대지로부터 확산돼 콰쾅 하고 하늘을 진동시켰다.
마지막 빛 안에는 하얀 구슬이 하나 들어 있었다. 바로 천역주였다.
허공에 떠오른 천역주는 부드러운 빛을 발산했고 그 순간 이 대지가 정계 나침반이 완전해진 듯했다.
“수축!”
한제가 조용히 읊조리자 콰쾅 하는 소리와 함께 나침반이 축소되기 시작했다.
잠시 후, 대지와 일곱 색채의 눈이 내리던 산은 사라져 버렸다. 태고 신경에 남은 것이라고는 한제와 모완, 그들이 딛고 선 다리 그리고 손바닥만 한 나침반 하나가 전부였다.
웅웅 소리를 내며 끊임없이 회전하던 나침반은 다시 줄어들어 천역주가 되더니 한제의 손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천역주는 정계 나침반의 핵심이자 완전한 정계 나침반의 모습이기도 했다.
구슬을 움켜쥔 한제의 눈에는 하늘도 대지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허무뿐이었다. 그리고 그 허무의 끝에서, 한제는 하나의 인영을 볼 수 있었다.
“…고도.”
고도 역시 이 허무 안에 유일하게 남은 다리와 그 위에 자리한 두 인영을 보고 있었다.
“이게 답이군.”
고도는 복잡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빙그레 미소를 지은 한제가 오른손을 휘두르자 고도의 뒤편으로 거대한 회오리가 나타났다. 그 안으로는 선강 대륙이 보였다.
고도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한제를 향해 허리를 깊이 숙여 절을 하더니 그 회오리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한제 역시 말없이 고도를 바라보다가 그가 사라진 후 모완의 손을 잡고 다리 끝의 허상 속으로 사라졌다.
그들이 떠나자 이 다리 역시 반짝이는 빛으로 부서져 흩어졌고 흩어진 빛은 허무와 융합되어 자취를 감췄다.
★ ★ ★
도원경처럼 아름다운 곳이었다. 멀리 떨어진 곳에는 정자가 하나 있었고 그 위에는 돌 탁자와 두 개의 의자가 있었다.
탁자 옆의 의자 위에는 회색 옷을 입고 같은 색의 머리를 길게 기른 한 사람이 등을 보인 채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의 뒤로는 하인인 듯한 사람이 서 있었다.
모완과 함께 허무로부터 빠져나온 한제가 이곳에 나타난 순간, 하인은 홱 돌아서더니 한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한제도 그를 보았다. 약간 늙은 모습이었지만 그는 상대를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능천후.”
한제가 말했다.
“맞네. 하지만 아니기도 해.”
노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한제의 말에 대꾸를 한 것은 그가 아니라 등을 보이고 앉은 회색 옷차림의 누군가였다. 그제야 돌아선 그는 활짝 웃으며 한제와 모완을 바라보았다.
“이 도우의 부인이신가? 오늘은 술을 한잔하지 않을 수 없겠어!”
모완은 덤덤한 표정으로 말없이 한제 곁에 서서 가만히 상대를 바라보았다.
한제 역시 회색 옷차림의 상대를 보다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모완과 함께 걸어가더니 소매를 휘둘렀다. 그러자 비어 있던 의자 하나가 둘로 불어났고 한제와 모완은 그 위에 앉았다.
한제와 회색 옷의 상대 사이에 놓인 탁자 위에는 바둑판이 하나 있었다. 흑백의 돌이 늘어져 있는 형국으로 볼 때 패배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는 듯 보였다.
“자네의 분신은 당시 나와 바둑을 두다가 도주에 떠나버렸다네. 그리고 오랜 세월을 기다린 끝에 마침내 자네를 만나게 됐군. 자 마저 두세나.”
회색 옷의 사내는 미소를 지으며 검은 돌 하나를 들어 바둑판 위 어딘가에 올려놓았다.
“자네가 수호자인가?”
한제는 바둑판을 잠시 바라보다가 물었다.
“그렇다네. 자네도 그렇고.”
웃음을 머금은 채 고개를 든 상대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운자는 기령이었어. 난 그자의 몸에 한 줄기 신식을 남겨두었지. 그게 바로 자네가 보았던 그 회색 옷의 천운자였던 거야.”
회색 옷을 입은 사내의 모습은 천운자와 똑같았다. 하지만 천운자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상대의 말처럼 그는 회색 옷의 천운자였다.
“처음에는 자네의 분신이 창조했는데 후에 그 기령이 이용했던 칠채계처럼 말이야. 내내 궁금했는데 이제야 알게 됐군. 윤회는 자네에게 그렇게나 간단한 것이었어.”
회색 옷의 천운자는 다시 바둑판으로 눈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칠채계에 있던 천역주를 모방한 구슬들은 자네의 살육 분신이 부족한 하나가 무엇인지 추측하고 그 근원을 파악하기 위해 만들어냈던 것이겠지. 깨달은 도의 경전들도 결국 자네의 경험들에 기반해 만들어졌던 거고. 얌전히 수련의 길을 기다려라⋯⋯. 그 구절은 중생들에게 윤회 속으로 들어가 진정한 자신의 길을 찾고 윤회 안에서 빠져나오라는 뜻이었어.”
그는 감탄한 듯한 눈빛으로 말했다.
“내게는 이름이 없네. 아마도 내가 역진계 최초로 답천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고 자네가 두 번째겠지. 자네와 나 사이에 답천의 경지에 이른 사람은 없었어. 자네의 그 분신을 제외한다면 말이야.”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한제는 모완의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은 채 상대를 바라보며 물었다.
“정계 나침반은 자네가 만든 건가? 그 기령은 자네가 그 안에 봉인한 거야?”
“네 번째 단계인 답천은 역진계 내에서의 한계야. 허나 우주에는 네 개의 계가 있고 그 안에는 다섯 번째 혹은 여섯 번째 단계에 이른 사람이 있기도 하지. 내가 여기 이르기 전부터 이 바둑판은 이곳에 있었으니까. 자 두게. 자네 차례야.”
한참이나 생각에 잠겨 있던 한제는 빙그레 웃더니 왼손을 들었다. 그 손에는 하얀색 구슬이 하나 들려 있었다. 한제는 그 구슬을 바둑판 위에 올려놓았다.
그 순간, 돌연 바둑판이 변하기 시작했다. 하얀 돌과 검은 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완이 그쪽을 보았을 때, 모든 검은 돌과 하얀 돌은 두 개의 돌로 융합되어 있었다.
검은 돌 하나와 하얀 돌 하나.
하얀 돌은 한제 쪽에 검은 돌은 회색 옷을 입은 사내 쪽을 향해 있었다.
“알겠나?”
한 마디를 남긴 한제는 미소를 지으며 모완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회색 옷의 사내와 능천후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서더니 모완과 함께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자 바둑판 위에 있던 하얀 돌도 천천히 흐려지다가 끝내 사라졌다. 한제와 함께 떠나버린 것만 같았다.
★ ★ ★
고족 구역. 평화로운 어느 산봉우리 위에 한제가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그 뒤에서는 모완이 따스한 눈으로 한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제가 가부좌를 튼지 벌써 며칠 째였다. 그는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모완은 그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알지 못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한제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는 한 가지 의문이 남아 있었다. 한제가 깨어나면 물어볼 생각이었다.
또다시 사흘이 지난 날 해질녘, 한제가 감았던 눈을 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때 선강 대륙 밖에는 검은 옷을 입고 검은 머리를 길게 기른 한 사내가 서 있었다. 살육과 파멸의 기운을 짙게 풍기며 선강 대륙 밖에 선 그는 냉랭한 눈으로 선강 대륙 고족 구역에서 자신을 응시하는 눈빛을 마주했다.
그의 외모는 한제와 똑같았다.
잠시 침묵하던 흑의흑발의 한제는 몸을 훌쩍 날려 선강 대륙으로 들어서더니 한 줄기 검은 빛이 되어 고족 구역으로 달려들었다. 그리고는 어느 산봉우리 위 한제 앞에 착지했다. 그의 냉랭한 눈빛도 모완을 향했을 때는 부드러워졌다.
“오지 않아도 되는데…”
한제가 살육 분신을 향해 말했다.
살육 분신은 말없이 서 있다가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검은 머리카락 한 올을 뽑아냈다. 뒤이어 머리카락을 쥔 손을 펼치자 팔랑팔랑 나부끼던 검은 머리카락은 점차 하얀색으로 변했다.
그 순간, 한제는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에도 하얀 머리카락 한 올이 들려 있었다. 하지만 그 머리카락은 이내 점차 흩어져 사라지기 시작했다.
흑의의 한제는 다시 한 번 모완을 바라보더니 눈을 감았고 한 줄기 검은 기운이 되어 자신의 의식을 지우고는 한제의 체내로 녹아들었다.
그 검은 기운을 모두 흡수한 한제의 체내에는 다시 살육의 진신이 응집됐다.
고개를 돌려 모완을 바라본 한제는 그제야 주체적인 의식을 갖게 된 묵멸이 어째서 떠나지 않고 다시 자신에게 돌아온 것인지 깨달았다.
“나에게 5백 년이⋯⋯ 그에게는 수차례의 윤회였군.”
“왜 갑자기 날 보는 거야?”
모완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자를 봤어?”
한제가 불쑥 물었다.
“누구?”
모완은 뜻밖의 질문에 흠칫 놀랐다. 그녀는 아무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야, 됐어. 가자. 아무도 우리를 모르는 곳으로 가서 평범한 삶을 살자. 평이와 그 아이의 아내를 보고 싶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난 한제가 웃으며 말했다.
“수련은?”
모완은 눈을 깜빡이며 한제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련은 마음으로 하는 거지. 진정한 자신을 찾은 후라면 수련은 어디에서든 할 수 있어.”
웃으며 답한 한제는 모완을 안은 채 긴 빛을 그리며 해가 져 어두워지고 있는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근데 바둑이 끝났을 때 ‘알겠나?’라고 했잖아. 난 이해가 안 돼. 대체 뭘 알겠냐고 물은 거야?”
모완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건 말이지…”
점차 하늘 끄트머리로 멀어지던 두 사람의 모습은 이내 사라졌다.
허나 그들은 그리 멀지 않은 흑석성 어느 구석, 백의를 입은 한 여인이 자신들을 보고 있음은 전혀 알지 못했다.
여인의 뺨을 타고 흐른 눈물이 옷깃을 적셨다.
“잊자. 전부 잊자. 전생의 물고기는 이렇게 물속에서 점차 멀어져 가는 새를 보았지⋯⋯.”
여인이 중얼거렸다. 시야는 부옇게 흐려져 있었다. 물속의 물고기가 아무리 울어도 그 눈물은 물속에 흩어져 하늘을 나는 새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때, 여인의 뒤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생의 우리는 새와 물고기였지만 현세에는 아니야.”
가냘픈 몸을 바르르 떨며 고개를 홱 돌린 여인의 눈에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는 한 사람의 인영이 들어왔다.
(完)
작가의 말
지금까지 선역(仙逆)을 꾸준히 애독해주신 모든 독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 이근 배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