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60
그의 말에 팅 하는 소리와 함께 가야금의 현이 뚝 끊겼다. 뒤이어 창문이 벌컥 열리더니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뛰게 만드는 자태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연꽃 같은 얼굴에 버들잎 같은 눈썹, 보드라운 손과 가늘고 흰 손가락, 고른 이와 매끄러운 이마까지. 하지만 이는 그녀의 외모만을 표현할 수 있을 뿐이었다.
여인은 한참이나 한제를 자세히 살폈다. 그러더니 그녀의 얼굴에 짧게 슬픔이 묻어났다. 천천히 창이 닫히면서 그녀의 모습이 그 너머로 사라졌다.
한제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설마 했던 자신의 추측이 사실이었음을 확신했다. 이렇게 오랜 시간을 돌아온 끝에 운천종의 장로가 된 그녀를 만나게 되리라고는 예상이나 했겠는가?
모완의 수준은 결단기 초기에 이르러 있었다. 만약 다른 문파였다면 같은 수준이면서 사부와 제자의 관계를 맺는 것은 얼토당토 않는 일이었겠지만 운천종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이곳에서 통용되는 기준은 연단술이었다. 심지어 수준으로만 놓고 보면 스승이 제자보다 못한 경우도 더러 있었다. 물론 어떤 단약은 일정 수준에 이르러야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수준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는 없었다.
이 세상에 이모완처럼 결단기 초기 수준으로 원영기 이상의 연단사가 겨우 만들어낼 수 있는 5품 단약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한제는 속으로 한탄했다. 세상만사 무상하다더니 틀린 말이 아니었구나. 2백 년이라는 시간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모완의 외모는 당시보다 무르익은 상태였다. 2백 년 전의 일이 어제 일처럼 생생했지만 그 중간에 있었던 많은 우여곡절 역시 무시할 수는 없었다.
한제는 상대를 알아본 티를 내지 않을 작정이었다. 모완이 기억하는 그는 마량의 모습이었다. 지금 분신은 어린 한제의 모습이었고 수준이나 기색 등 모든 것이 달라졌으니 모완은 절대 그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무슨 일이지?”
이모완이 다소 실망한 목소리로 물었다. 한제는 내심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저⋯⋯ 그게⋯⋯.”
침착함을 유지했으나 마음속 깊은 곳은 그렇지 못한 듯, 쉽게 입이 트이지 않았다.
한편, 이모완은 한제의 목소리를 듣고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녀는 얼굴을 보라색 면사로 감싼 후 누각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가만히 한제를 바라보았다.
“제 단로가 깨졌습니다.”
한제는 담담한 표정으로 느릿하게 말했다.
한참이나 한제를 바라보던 이모완은 다소 복잡한 눈빛으로 고개를 돌렸다.
“초나라 사람인가?”
한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모완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더니 침착한 표정으로 말했다.
“단로가 깨졌다면 체내의 영력이 너무 빠르게 증가했기 때문일 거야. 그로 인해 화기가 안정적으로 공급되지 못한 거지. 흔한 일이야. 계속해서 단련을 하다보면 알아서 해결될 문제다.”
말을 마친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저물대를 열어 단로 하나를 꺼내주었다.
“주림의 제자이니 이 단로를 주마. 백 번까지는 깨지지 않을 것이다. 만약 백 번의 시도를 했는데도 여전히 화기를 조절하지 못한다면 네게는 연단의 자질이 없다는 뜻이니 일찍이 포기하고 다른 종파를 찾아가 수련하거라.”
말을 마친 모완은 들고 있던 단로를 휙 던졌다. 단로는 둥둥 떠서 한제 앞에 이르렀다.
한제는 받아든 단로를 저물대에 챙겼다.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을 하고는 있었지만 복잡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곳에서 숨을 한 번 들이쉴 때마다 가슴속의 무언가가 바글바글 끓는 느낌이었다. 그는 재빨리 포권을 한 뒤 몸을 돌려 자리를 뜨려고 했다.
“마량⋯⋯.”
모완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한제의 얼굴이 단숨에 굳어졌다. 고개를 돌린 그는 의혹이 어린 눈으로 모완을 바라보았다.
모완은 작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가보거라. 질문이 있거든 언제든 와서 묻고.”
말을 마친 그녀는 다시 누각으로 돌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가야금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 곡조는 전보다 한층 슬픔과 실망이 더해진 듯했다.
한제는 복잡한 심경이 담긴 눈빛으로 고개를 들어 창문 안쪽으로 보이는 인영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자리를 떠났다.
이모완은 가야금을 타던 손가락을 멈추고 창문을 열어 한참이나 먼 곳을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아냐, 세상에 그렇게 똑같은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 어디 있어? 더구나 표정까지 똑같을 수는 없어. 특히 방금 그 지나칠 정도의 침착한 표정은 아무나 지을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녀는 오른손으로 미간을 두드렸다. 순간 그녀의 미간에서 선혈 한 방울이 빠져나왔다. 이 선혈에서는 어째서인지 서늘한 기운이 풍겼다.
이것은 당시 한제가 그녀의 곁을 떠났을 때 그녀의 혼혈에 섞어서 주었던 극의 신식이었다. 그녀의 안전을 보장해줄 것이라고 했다. 사실 만약 이 극의 신식이 아니었다면 모완은 선무국의 공세에서 도망쳐 나올 수도 없었을 터였다.
“정말 그 사람이라면 이 혼혈은 왜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은 거지?”
아랫입술을 깨문 모완이 한참 후에서야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그때, 누각 밖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매, 잠깐 나올 수 있나?”
미간을 살짝 구긴 채 밖으로 나온 모완 앞에는 신선의 표본 같은 외모의 중년 수련자가 서 있었다. 웃음기를 머금은 그의 얼굴은 상당히 고아하고 준수해 자연히 친근감이 들었다. 모완을 본 그의 눈에 애정이 담겼다.
그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사매, 한 달 전에 사매가 용암지(龍岩芝)가 부족하다고 했지? 내가 초나라 전역을 뒤진 끝에 자갈산맥 외곽에서 이 용암지를 찾아냈어.”
말을 마친 그가 저물대에서 옥으로 만들어진 상자를 하나 꺼냈다. 그 상자에는 적갈색의 팔뚝 굵기만 한 버섯이 하나 들어있었다.
모완은 담담한 눈빛으로 그 상자는 본 척도 않은 채 말했다.
“손 사형의 호의는 고마우나 이미 대체품을 찾았어요. 게다가 사흘 전에 이미 그 단약을 만드는 데 성공했죠. 그 버섯은 사형이 가지세요.”
중년 남자는 미소를 지으며 상자를 옆에 내려놓더니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사매, 시조님께서도 사매를 예뻐하시기는 하지만 사매는 우리 운천종의 적통이 아니야. 더 높은 연단술을 얻기 위해서는 적통을 찾아 혼인을 해야 한다고. 사매와 나는 오랫동안 알아왔고 내가 사매한테 연심을 품고 있다는 건 사매도 잘 알고 있잖아.”
모완은 서늘한 눈빛으로 중년 남자를 바라보며 한 자씩 힘주어 말했다.
“그 얘기는 더는 언급하지 마세요!”
중년 남자는 잠자코 모완을 바라보았다. 한참 뒤 그는 평온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사매, 사매가 화분국에서 이곳으로 왔을 때 만약 내가 사매를 구해주지 않았다면 사매는 벌써 숨을 거두고 말았을 거야. 지난 몇 년간 내가 사매를 어떻게 대했지? 그런데도 왜 그렇게 고집을 피워?”
모완은 한참이나 침묵했다. 저도 모르게 머릿속에 떠오르는 누군가가 있었다. 잠시 후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유는⋯⋯ 없어요.”
중년 남자는 한숨을 내쉬더니 한결같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사매, 시조님께서 직접 명령하신 일이야. 이미 정해진 일이니 잘 생각해봐.”
말을 마친 그는 모완을 잠시 바라보다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젓더니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모완은 그 자리에 잠자코 서 있다가 누각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뒷모습이 그렇게 슬퍼 보일 수가 없었다.
복잡한 마음으로 남원을 떠난 한제는 다리에 도착했을 때 그 끄트머리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정현을 보았다. 정현은 한제를 보자마자 다가와서는 알랑거리는 얼굴로 말했다.
“사형, 어때? 잘 처리됐어?”
한제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가죠.”
정현이 기다리던 말이었다. 그는 실실거리며 얼른 입을 열었다.
“곧 어두워질 테니 빨리 움직이자고. 여기서 기다려. 내가 탈 것 좀 불러올 테니.”
말을 마친 그가 오른손을 입에 물고 휘파람을 불자 멀리서 무언가의 포효가 들려왔다. 곧 한제는 크고 작은 두 개의 검은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 그것들은 멀리서부터 달려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1백 척 거리까지 다가온 그것들은 원숭이였다. 큰 원숭이의 키는 15척, 작은 것은 10척 정도였다. 두 팔이 무릎에 이를 정도로 길었고 두 눈은 붉었다. 그것들은 화가 난 듯 정현을 향해 이를 드러냈다.
정현은 마른기침을 하며 말했다.
“빌려간 물건은 곧 돌려줄게. 그래도 십년 넘게 알고 지냈잖아. 우리를 동원에 한 번만 데리고 가주면 바로 돌려줄게. 어때?”
두 원숭이는 콧김을 씩씩 내뿜다가 서로를 돌아보더니 그중 한 마리가 정현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정현은 순순히 그 손에 붙잡혔다. 커다란 원숭이는 정현을 쥔 뒤 그를 위쪽으로 내던져 자신의 등에 태우더니 훌쩍 내달렸다.
작은 원숭이는 한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히 성난 듯한 눈빛으로 포효하던 녀석은 한제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한제는 옆으로 비켜섰다가 몸을 훌쩍 날려 원숭이의 등에 올라탔다. 원숭이는 개의치 않는 듯 곧장 질주했다.
원숭이는 매우 빨라, 마치 번개처럼 이동하는 느낌이었다. 앞서 가던 정현은 즐거운 듯 소리를 질러대다가 저물대에서 술 한 부대를 꺼내 벌컥벌컥 들이켰다.
“원숭이를 타고 동원으로 가다니, 운천종에서도 이 정현쯤은 되어야 할 수 있는 일이지. 하하!”
한제는 쓰게 웃었다. 정현은 비록 첫인상은 별로였지만 싫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서 정현 때문에 하지 않아도 될 일에 휘말렸음에도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오히려 정현 덕에 이모완을 보고난 복잡한 심정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다.
정현은 술 부대를 한제에게 휙 던졌다. 그것을 받아 든 한제는 문득 모완의 슬픈 표정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술 부대를 입가로 가져가 벌컥벌컥 들이켰다.
술은 달았다. 석주에서 배어나오는 이슬과 다를 것이 없었다. 다만 이 술은 뱃속으로 들어간 뒤 뜨거운 열기가 되어 온 몸 구석구석을 채웠다. 체내의 영력이 늘어나자 한제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정현은 하하 웃으며 고개를 돌려 말했다.
“이건 우리 사모님이 단약을 만들기 위해 준비하신 영천(靈泉)의 물이야. 초나라 전체를 뒤져도 이런 물을 찾기는 힘들지. 난 그 물을 몰래 빼돌린 다음 이 원숭이들이 오랜 시간 동안 소중히 보관해놓은 과일을 담가 술을 만들었어. 사형이니까 주는 거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맛보게 해주지도 않았을 거라고.”
그의 말이 끝나자 두 원숭이는 화가 난 듯 포효를 내질렀다. 한제의 행실이 상당히 불만스러운 모양이었다.
제법 멀었던 동원이 금세 눈앞에 드러났다.
동원은 남원과 달리 허공에 떠 있었고 구름으로 가려진 상태였다.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그 안의 백옥 건물을 볼 수도 없었다.
구름 사이에서 학들이 춤을 추며 노닐었고 묘한 곡조가 흘러나왔다. 가까이 다가가니 심지어 좋은 향기까지 퍼져나왔다.
라월
정현은 멍한 표정으로 동원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한숨을 내쉬었다.
“운천종의 모든 여자 수련자들은 동원에 모여 있지. 안에 미녀들이 얼마나 많다고. 만약 동원에서 1년 동안 살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텐데.”
한제는 정현의 푸념을 무시한 채, 허공에 떠 있는 동원에 걸린 강력한 금제를 살폈다. 그 금제는 동원을 공중으로 떠받침과 동시에 눈속임 작용까지 했다.
이때, 한 무리의 학이 구름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 위에는 일고여덟 명의 소녀들이 앉아 있었는데 하나같이 아름다웠고 몸의 굴곡도 훌륭했다. 특히 맨 앞의 여인이 가장 눈에 띄었다. 그녀는 학에 탄 채 정현과 한제 두 사람의 앞으로 다가와 호통 치듯 말했다.
“동원은 금지의 땅이다. 진입을 금한다.”
말을 마친 그녀는 매서운 눈으로 정현을 노려보며 말했다.
“정현, 또 왔냐. 만약 다시 한 번 이동희 사형을 귀찮게 굴었다가는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말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