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64
그때 한숨 소리가 들리더니 흐릿한 인영이 천천히 안개 속에서 나타났다.
한제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중년 남자의 얼굴은 잔뜩 구겨졌다. 하지만 그는 경솔하게 움직이지 않고 조심스레 저물대로 손을 뻗었다.
모완은 멍한 얼굴로 한제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상대는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눈앞에 있는 그 사람이 당시의 그라는 사실을 그녀는 확신할 수 있었다.
모완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왔구나.”
한제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럴 필요까지 있나?”
말을 마친 그는 서늘한 눈빛을 빛내며 중년 남자를 주시했다. 그리고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네 손이 저물대에 닿는 순간, 목이 달아날 것이다.”
중년 남자의 오른손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그의 표정 역시 한층 더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상대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너무나도 이상했다. 분명 결단기 후기 수준이었지만 어째서인지 원영기 수련자보다 더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그는 상대의 말이 단순한 협박이 아님을 본능적으로 눈치챘다. 콩알만 한 땀방울이 이마에서 배어나온 그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모완 사매의 옛 친우 이신가봅니다. 모완은 제 동료이기도 한데 제가 어찌 방자하게 굴 수 있겠습니까? 오해이십니다.”
모완은 한제를 바라보았다. 하고 싶은 말은 수만 가지가 넘었지만 입 밖으로는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한참이나 망설이다가 말했다.
“그 옥패… 가지고 있어?”
한제는 눈앞의 여인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버렸어.”
모완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얼굴에는 슬픈 표정이 어렸다. 억지로 차오르는 감정을 참아낸 그녀는 입술을 깨문 채 말했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애초에 그렇게 가치 있는 물건은 아니었으니까.”
말을 그렇게 했어도 그녀의 가슴 속에서는 뜨거운 기운이 요동치고 있었다. 고통이 밀물처럼 그녀의 가슴을 적셨다.
그 청룡 옥패는 당시 그녀가 온갖 성의와 정성을 다해 겨우 만들어낸 물건이었다. 만약 당시 그렇게까지 힘을 쓰지 않았었다면 지금쯤 그녀는 비록 원영기에는 이르지 못했을지언정 최소한 결단기에서 원영기의 경계 정도에는 이르렀을 터였다.
한데 무정하게도 옥패를 버렸다는 말에 그녀는 너무도 마음이 아팠다. 억지로 마음을 다잡았지만 몸은 주체할 수 없이 떨려왔다. 창백해진 얼굴에 핏기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두 달
한제는 고개를 돌려 모완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침묵하다가 조용히 말했다.
“간다.”
말을 마친 그가 천천히 몸을 돌리더니 걸음을 옮겼다.
모완은 아픈 마음을 안고 한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살짝 웃었다. 웃는 표정이었지만 분명 그녀는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운천종의 시조님이 나랑 이 사람을 혼인시키려 해. 이전까지는 미룰 이유가 있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어떤 이유도 없어. 만약 세 달 뒤에도 초나라에 있을 예정이라면 혼례식에 참석해줘.”
한제는 걸음을 멈추었다. 마음속에서 복잡한 감정이 부글부글 일어났지만 그는 침묵했다.
모완은 반짝이는 눈으로 상대의 답을 기다렸다.
중년 남자는 모완이 혼인에 대해 그렇게 완고하게 거절해왔던 이유가 바로 눈앞의 남자 때문임을 확인하자 살기가 피어올랐다.
한제는 한참이나 말없이 서 있다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축하해.”
말을 마친 그의 모습은 점점 멀어져갔다.
모완은 몸을 바르르 떨었다. 한참 뒤, 그녀의 눈에서는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마구 흘러내렸다. 그녀가 중얼거렸다.
“나빴어⋯⋯ 정말 나빴어!”
중년 남자는 그제야 한시름을 내려놓으며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매, 그자는 이미 떠났어.”
모완은 아랫입술을 깨문 채 중년 남자는 쳐다보지도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자신의 처소로 돌아갔다.
여전히 온화한 표정의 중년 남자는 속으로 냉소하며 중얼거렸다.
‘망할 년, 2백 년 동안 네가 이뤄낸 성과와 내가 그동안 모아온 단약으로 나는 이제 곧 결단기 후기에 이를 것이다. 내가 원영기에 이르기만 하면 널 능욕하여 그동안 네게 누차 거부당했던 한을 갚아주지!’
한제는 남원을 떠났다. 그는 무정한 사람이었지만 모완에게는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녀를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그가 해야 할 일들이 많은데 옆에 여인이 있는 것은 적합하지 않았다.
사실 모완에 한해서 한제는 전혀 무정하지 않았다. 그의 분신의 수준이 원영기에 이를 때가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 사이에 모완을 받아들인다면 분명 일련의 변고가 생길 것이다.
그리되면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또한 자신의 복수에 모완을 연루시키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마음이 이렇게 요동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한참 후에야 마음을 겨우 진정시킨 후, 그는 남원을 빠져나갔다.
원영기 수준의 수련자를 묶어둘 수 있는 1각 중 절반이 흘렀다. 서둘러야 했다. 그는 번개같은 속도로 내달려 동원에 이르렀다.
동원에 도착한 한제는 주변을 한 바퀴 돌며 몇 개의 금제를 건 뒤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순찰을 돌던 동원의 제자들은 그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오직 그가 동원에 진입한 순간, 모든 학들이 부르르 몸서리를 치며 공중에서 하강했을 뿐이었다. 그 학에 타고 있던 여인들이 어떻게 채찍질을 하고 달래도 그들을 통제할 수가 없었다.
한제의 몸은 길고 얇은 선을 그리며 동원에 진입했다. 층층의 안개와 구름을 뚫고 안으로 들어가자 동원의 아름다운 전경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이곳은 밖에서 봐도 마치 선경(仙境)의 한 부분 같았는데 들어와서 보니 그런 느낌이 한층 더 진했다. 각종 아름다운 건물들과 주변 광경이 조화를 이루어 더욱 돋보였다.
일곱 빛깔의 무지개 한 줄기가 동원 깊은 곳으로부터 이 동원을 가로지르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었다. 선녀처럼 아름다운 여자 수련자들이 분분히 공중을 떠다녔다.
정현이 이전에 알려준 길을 따라 한제는 빠르게, 그리고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동원의 서쪽에 있는 옥으로 조각된 건물에 도착했다.
이동희의 규방에 도착한 그는 신식으로 주변을 훑어본 후 규방 안의 병풍 뒤로 숨었다. 가냘프고 나른한 목소리가 병풍 너머에서 들려왔다.
“영아, 아직도 그자를 걱정하는 거니? 그래, 그자를 속인 건 나야. 하지만 그건 너를 위해서가 아니야. 내가 만들고 있던 단약에 단이 부족했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 원숭이를 목표로 삼은 것뿐이지.”
영이라고 불린 여인은 바로 정영이었다.
“하지만 그 여송이라는 사람이⋯⋯.”
“걱정할 것 없어. 날 믿어. 내일 여송이 오면 내가 처리할게. 어떤 문제도 없을 거야, 약속해. 그 여송은⋯⋯ 기껏해야 단맛만 좀 보여주면 처리할 수 있을 거야.”
한제는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오른손으로 미간을 두드렸다. 순간 빠져나온 허이국 마혼이 병풍 너머를 바라보며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어떻게 처리하든 상관없어. 원숭이의 행방을 알아낸 다음에는 두 여인의 영혼을 꺼내와.”
한제는 말을 마친 뒤 방 밖으로 빠져나왔다.
허이국 마혼은 웃으며 두 말 않고 병풍 너머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주 만족스러운 얼굴로 나온 그는 입을 벌려 두 영혼을 토해낸 뒤 한제의 미간으로 돌아갔다.
“그 원숭이는 이미 죽었답니다.”
그가 말했다.
한제가 오른손을 흔들자 그의 손에 영혼의 깃발 하나가 나타났다. 두 개의 영혼을 거둔 한제는 잠시 고민하다가 몸을 돌려 방 안으로 들어가서는 두 여인의 저물대를 챙긴 뒤 다시 방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 순간, 한제는 원영기 수련자를 덮어둔 금번이 수축하는 것을 느끼고 한 줄기의 검은 빛이 되어 남원으로 질주했다.
쉬 – 익
그와 동시에 남원에서 분노에 찬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원영기 수련자는 풀쩍 뛰어올라 신식으로 사방을 살핀 뒤 동원을 향해 내달렸다.
뒤이어 동원 안에서 강력한 신식이 퍼져 나왔다. 그 신식에도 노기가 어려 있었다. 그 신식이 한제를 훑은 그 순간, 동원의 중심에서 한 여인이 튀어나왔다. 한제는 두 말 않고 빠르게 움직였다.
그 여인의 얼굴은 검은색의 얇은 천으로 가려져 있어 생김새를 알아볼 수는 없었다. 그녀는 빠른 속도로 한제를 추격했다.
한제는 담담한 모습이었다. 그는 상대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을 감지하고는 오른손을 연거푸 움직여 잔영의 원들을 만들어 상대를 향해 쏘았다.
“어딜 감히!”
원영기 초기인 그 여인은 차게 코웃음을 치며 저물대를 두드렸다. 순간 그녀의 손에 화분 하나가 나타났다. 그녀가 그것을 흔들자 일곱 빛깔의 꽃잎이 춤을 추듯 흘러나왔다. 각각의 꽃잎은 파멸적인 힘을 가지고 있어 빠르고 강력하게 금제들을 파괴해 나갔다.
한제가 쏘아 보낸 잔영의 원들은 여러 갈래로 갈라지더니 순식간에 수많은 금제들로 변했다. 이 금제들은 사방에서 휘몰아쳤고 일부는 여인이 만들어낸 꽃잎과 충돌하며 사라져갔다. 허나 대부분은 꽃잎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도 주위를 맴돌았고 어느 순간 하나로 합쳐지더니 순식간에 동원에 찍혔다.
한제는 동원이 거대한 금제에 의해 떠받쳐지고 있다는 것을 이미 파악한 상태였다. 시간만 충분하다면 그 금제도 파괴할 수는 있겠지만 그럴 시간은 없었기에 지금은 금제의 평형을 잃게 하는 것이 목표였다.
상고 시대에 기원을 둔 금제는 한제가 미리 동원 주변에 걸어둔 금제들과 합쳐졌다. 그러자 동원을 떠받치고 있는 거대한 금제가 우르릉 하는 소리를 내며 평형을 잃었다.
윽 – 캬악
허공에 떠 있던 동원이 기울어가면서 사방에서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울러 펴졌다. 여기저기서 겁에 잔뜩 질린 표정의 여자 수련자들이 날아올랐다.
한제는 즉시 몸을 날렸고 그를 쫓던 여인은 이를 악문 채 한제를 놔두고 대형 금제를 손보기 위해 달려갔다.
한제는 막힘없이 동원 밖으로 빠져나갔지만 그는 일이 커졌으니 곧 운천종의 원영기 중기 수준의 수련자들도 그를 추격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바로 그때, 멀리서부터 강력한 신식이 느껴졌다. 허나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 신식에 손상을 입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강대한 한제의 신식은 별로 영향을 받지 않았다. 신식만 놓고 보면 화신기 수련자에 비해도 손색이 없었다.
지금은 신체적인 한계 때문에 결단기 후기 수준의 경지이지만 상대가 원영기 중기라 해도 그의 신식에 손상을 입히지는 못했다.
그는 거의 멈추지 않고 빠르게 질주해나갔다.
한제를 훑었던 신식의 주인은 순간 흠칫 놀라는 듯했다. 그러더니 한제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빠르게 접근해왔다.
그때, 저 멀리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날아들어 한제의 손에서 작은 깃발로 변했다. 뒤로는 남원에 묶여 있었던 원영기 초기 수련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금번을 손에 넣은 한제는 몸을 아래로 푹 꺼트려 땅에 착지했다. 그리고 몸을 한 바퀴 돌리자 발아래에 금제 하나가 나타났다. 곧이어 그의 몸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동시에 그에게 고정되어 있던 신식도 그의 종적을 놓치고야 말았다.
한제의 본체는 이미 묵간석으로 만든 금제의 작용 아래, 휴식을 취하던 동굴로 돌아갔다. 그 동굴 밖은 신식의 금제로 가로막혀 있었다.
그와 동시에 북원의 처소 바닥에서 한제의 분신이 솟아올랐다.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분신은 얼른 처소를 정리한 뒤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았다.
이렇게 일이 일단락된 후로도 보름 동안 한제 본체에 관한 소문이 운천종에 쫙 퍼졌다. 이는 운천종 사상 처음 발생한 큰일이었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운천종에 숨어든 그자는 결국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마치 운천종 곳곳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일은 심지어 폐관 수련을 하며 화신기에 돌입할 준비를 하고 있던 몇몇 원영기 시조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