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8
맡은 일을 완수하지 못한 수련생 앞에서 헛기침을 하기만 하면 상대는 알아서 부적을 내놓았다.
허나 매우 불편한 게 사실이었다. 쉬지 않고 드나드는 수련생들 때문에 수련이 중단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장로와 사숙들은 무슨 생각인지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 바꿀 생각이 없어 보였다. 계속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영원히 잡무처를 맡고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 ★ ★
“이보다 더 막 나가야 한다는 건가?”
한제는 잡무처를 떠나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장로와 사숙들이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지 보고 싶은 오기마저 생겼다.
수련생들이 한제를 욕할 때 쓰는 말 중 쓰레기와 염치없는 놈 다음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말이 ‘속이 시커먼 놈’이었다. 이전에 잡무처를 맡았던 유 사형의 별명인 ‘족제비’보다 조금 나은 정도였다.
꿈속에서 1년간 수련을 거치면서 체내의 영기는 이전의 몇 배에 달했다. 응기 1단계에서도 극한에 이른 상태라 어떻게 호흡을 해도 영기는 더 이상 증가하지 않았다.
어느 날 밤, 그는 2단계 진입을 위한 구결을 다시 한 번 시도해보았다.
몇 차례 연속으로 실패했으나, 노력은 배신하지 않았다. 그는 마침내 응기 1단계를 돌파하여 2단계로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온몸의 땀구멍에서 또 한 번 대량의 검은색 오물이 쏟아져 나왔다.
몸을 씻은 한제는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밝게 빛나는 두 눈을 비롯해 전반적으로 이전과 분명 달라진 듯했다.
이제 응기 3단계의 구결만 남았다. 허나 스승인 손대주에게 구결을 알려달라고 하면 어떻게 응기 2단계에 돌입했는지 추궁할 것이었다.
한참 생각해도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자 한제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생각을 바꿔 그는 일단 인력술을 연습했다. 꿈속에서 1년여의 시간을 보내면서, 그는 이미 열 번 시도하면 여덟아홉 차례의 성공을 거둘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또 한 달이 지났다. 한제의 횡포에 수련생들의 원성이 자자할 무렵, 문파는 연말에 열리는 정식 제자 시합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또한 올해는 대산파에서 10년에 한 번 씩 열리는 수련생 시합도 예정되어 있었다.
3위 안에 드는 수련생에게는 정식 제자의 동자가 될 자격이 주어지기 때문에 수련생들의 의욕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자연히 잡무처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없었다.
한제는 정식 제자 시합에 참가할 생각이 없었다. 그럴 시간이 있다면 꿈속에서 수련을 하는 것이 훨씬 나았다.
큰 눈이 내려 산의 길목이 막혀버린 날이었다. 깃털처럼 날리는 눈꽃이 대지를 은백색으로 뒤덮었다.
한제는 수련도 하지 않고 장원에 서서, 인력술을 펼치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커다란 손이 사방을 휘저으며, 한제의 주위에서 분분히 날리는 눈발을 분산시켰다. 덕분에 한제의 몸에는 눈꽃 하나도 내려앉지 못했다.
그는 집이 있는 마을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매해 이맘때면 부모님은 화로에 불을 피우곤 했었다. 그는 화로 옆에서 책을 읽었고 아버지는 그 옆에서 공구로 나무를 조각했으며, 어머니는 절인 채소를 저장하느라 바빴다.
때때로 책을 읽다 지치면 그는 아버지 곁에 앉아 조각하는 것을 구경했다. 흥미가 일 때면 아버지를 도와 직접 조각을 해보기도 했다. 문득 자신의 방 침상 아래에 숨겨둔 나무 팽이들도 떠올랐다. 낮에는 빙판길 위에서 팽이를 돌리곤 했다.
이런 기억들을 떠올리던 한제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선인들의 세상에서 속세의 흔적은 지워야 했다. 이런 추억들도 수련에 방해가 되는 잡념일 뿐이었다.
한제는 두 눈을 감았다가 번쩍 떴다. 속세의 흔적이 너무 많아 그것을 치워낼 수도 끊어낼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마음 깊이 묻어두기로 했다.
그때, 누군가 다가오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응기 2단계에 이른 그는 ‘신식(神識)’이라 불리는 선인의 본능을 깨우친 상태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가오고 있는 사람은 바로 이현으로 잠시 후 문이 열리더니 털모자와 모피 옷으로 몸을 덮은 이현이 들어왔다.
“형, 안 추워? 왜 그렇게 허술하게 입고 밖에 나와 있어?”
“계산해보니까 네가 올 때가 되었더라고. 그래서 이렇게 마중 나왔지.”
한제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사실 조금도 춥지 않았다. 응기 2단계에 진입한 후로 그는 몸이 상당히 강해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현은 호탕하게 웃더니 모자를 벗으며 다가와서는 한제를 자세히 살피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한제 형, 왜 몇 달 전이랑 이렇게 달라 보이지?”
한제는 놀리듯이 대답했다.
“당연하잖아, 난 이미 응기 2단계에 진입했으니까. 선인에 속하는 사람이라고!”
입을 비죽거리던 이현은 방으로 향하며 말했다.
“헛소리! 형이나 나나 자질이 부족한 건 매한가지인데 그나마 난 영기단의 도움이라도 받지. 그런 내가 아직 응기 1단계에 머물러 있는데 형이? 말도 안 되지!”
한제는 변명하지 않았다. 때로는 진실을 말해도 믿지 않을 때가 있음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리 친한 사이도 아닌 이현에게 모든 것을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사실 이 무렵의 한제는 자신이 사람과 쉽게 가까워지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여기까지 놀러 온 걸 보면 연단방 일이 바쁘지 않은 모양이지?”
방으로 들어선 한제는 따뜻한 물을 한 잔 건네며 약 올리듯 말했다. 이현은 물을 후후 불어가며, 한 모금 마시고는 웃으며 말했다.
“몇 달 동안 형이 연단방에 한 번도 안 왔잖아. 형 몫을 가져다주러 왔지.”
그는 품에서 꾸러미 하나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이에 한제는 꾸러미를 쳐다보지도 않고 보일 듯 말 듯 웃으며 이현의 말을 기다렸다. 이현은 아무런 목적도 없이 뭔가를 줄 사람이 아니었다.
한제의 시선에 얼굴이 약간 붉어진 이현이 불쑥 말했다.
“한제 형, 듣자하니 지난 몇 달 동안 잡무처에서 잘 지내고 있다던데?”
“그냥 말해. 도와줄 수 있는 거라면 도와줄게.”
한제는 자신의 잔에 물을 따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이현은 멋쩍게 웃더니 비밀스러운 이야기라도 하는 듯 목소리를 잔뜩 죽였다.
“한제 형, 난 형이 똑똑한 사람이라는 걸 전부터 알고 있었어. 솔직히 말해줘. 수련생들한테서 천리부 받아놓은 것 좀 있지? 나 좀 빌려줄 수 있어?”
한제는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몇 개나?”
이현은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적어도 2백 장은 필요해!”
“그렇게 많이? 대체 뭐에 쓰려고?”
한제가 놀라며 물었다. 지난 몇 달 동안 모은 부적이 5백 장에 달했으니 2백 장을 빌려주는 건 문제가 안 되었지만 그 용도가 궁금했다.
이현은 한숨을 내쉬며 씁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도 두 달 후의 연말 정식 제자 시합에 참가할 자격이 있어. 물론 순위 안에 들 긴 힘들겠지만 그렇다고 그냥 포기하기는 싫어. 듣기로는 이산 그 녀석은 2단계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는 모양이야.”
“어떻게 그리 빠를 수가 있지?”
한제는 너무 놀라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타고난 자질은 역시나 중요한 모양이었다.
반면 이현은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좋은 사부를 뒀기 때문이지. 그 녀석 사부는 수완이 얼마나 좋은지, 우리 스승님께 조화단(造化丹)을 한가득 얻어갔어. 그건 문파 내에서도 정말 진귀한 약이거든. 그런 걸 먹었으니 속도가 빠를 수밖에 없지.”
한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의심스럽다는 듯 말했다.
“근데 그거랑 부적을 빌리는 게 무슨 상관이야?”
“형은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아서 모르는구나. 매년 문파 시합이 열리기 전 한 달 동안 정식 제자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교역회가 열려. 거기서는 시합을 앞두고 각자의 보물을 교환하지. 이전에 몇 번 참가한 사람한테 들었는데 교역회장에는 비검도 법술도 약도 모두 있대.”
그 이야기에 한제도 가슴이 뛰었다. 그는 비검이나 법술에 대해서는 별생각이 없었지만 응기 단계 돌파에 필요한 구결을 얻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래
“근데 어떻게 서로를 믿고 거래를 하는 거야?”
이현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형도 구미가 당기는 모양이네. 그러니까, 교역회에는 규칙이 하나 있어. 사실 그 규칙은 교역회에 참가할 자격이기도 한데 반드시 변신단(變身丹)을 가지고 있어야 해. 변신단을 복용하면 몇 시진 동안 외모와 목소리가 변해서 누구도 알아볼 수 없게 되기 때문에 정체를 숨길 수가 있지. 하지만 축기기(筑基期)에 이른 사람이라면 상대의 정체를 간파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해. 물론 축기기에 이른 사람이 교역회에 나타날 리는 없겠지만…”
한제의 눈이 반짝였다.
“부적은 그 변신단을 구하기 위해 필요한 거구나?”
흠칫 놀란 이현이 이내 씨익 웃었다.
“역시 형은 똑똑해. 맞아, 그 약은 우리 스승님한테 있어. 매년 이맘때면 개인적으로 판매하시는데 하나당 부적 2백 개래!”
한제는 잠시 망설이다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재미있겠다. 나도 가보고 싶어.”
이현이 얼른 말했다.
“좋아, 같이 가자. 난 조화단을 얻을 거야. 이번 교역회에 그걸 가지고 나올 제자가 있다는 소문이 있거든.”
한제는 저물대에서 100개씩 묶어둔 부적 2덩이를 꺼냈다. 부적들을 받아 자신의 저물대에 넣으며 이현은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한제 형, 보름 뒤쯤 다시 보자. 그때 데리러 올 테니까 같이 가자.”
둘은 잠시 이야기를 더 나누었고 이현은 곧 떠났다.
혼자 남은 한제는 생각에 잠겼다. 그는 이번 교역을 통해 가능하다면 응기 다음 단계로 넘어갈 구결을 손에 넣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게 있다 해도 맞바꿀 만큼 가치 있는 물건이 자신에게 있을지 의문이었다. 부적도 약을 사는 데 다 써버렸다.
허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에게는 영기가 깃든 샘물이 있지 않은가? 그 샘물이라면 정식 제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것이었다. 변신단으로 모습을 바꾸고 참여할 테니 정체를 들킬 염려도 없었다.
마음을 정한 한제는 생각을 접고 인력술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꿈속에서 1만 번도 넘게 연습한 덕에 숙련도가 높아져, 이제 조롱박을 대상으로는 몇 번을 시도하든 매번 성공할 수 있었다. 이제 현실에서도 작은 물건들을 직접 움직일 수 있는 단계였다.
부피가 큰 것에는 성공률이 떨어졌으나, 체내 영기가 증진하고 응기 2단계에 진입한 후로는 인력술의 위력 또한 놀라울 정도로 높아졌다.
몇 시진이나 훈련을 하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날이 어두워졌고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한제는 꿈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잠시 서서 내리는 눈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지난 한 달 동안 응기 2단계의 수련을 진행하면서 석주의 효력이 깃든 샘물의 효과가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아직 크게 떨어진 것은 아니라서 양을 좀 더 마시는 것으로 보충하고 있었지만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응기의 단계가 높아질수록 효과가 약해지다가 어느 날 갑자기 아예 사라지면 어쩐단 말인가?
“석주를 담근 액체 중 이슬이 가장 좋고 그다음으로 샘물이 좋았어. 하지만 이슬은 모으는 데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겨울철에는 모으기가 더 힘들어. 샘물이 가장 간단하고 양도 많은데 그 효과가 사라져버린다면? 대체할 무언가를 찾아야만 해.”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한제는 갑자기 뭔가에 생각이 미쳤다. 그는 계속해서 쌓이고 있는 눈을 인력술로 움직여 방 안의 항아리에 넣기 시작했다. 눈이 항아리의 반 정도 차자 항아리 곁으로 다가가 손가락을 튕겼다. 수십 번 시도한 끝에 갓난아이 주먹만 한 불덩이가 나타났다. 불덩이는 이글이글 타오르며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러자 항아리에 담긴 눈이 순식간에 녹아 내렸다. 녹기 전에는 그리 많아 보이더니, 막상 녹이고 나니 양이 그리 많지 않았다.
눈이 다 녹았을 때, 한제의 이마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 연속으로 두 종류의 법술을 사용하니 꽤나 힘이 들었다.
한제는 석주를 꺼내 그 물에 담갔다가 1각 후에 다시 꺼냈다.
그동안 이리저리 연구한 결과 석주를 샘물에 넣어두면 효과가 올라가는 것은 딱 1각까지였다. 그 이상은 아무리 오래 넣어둬도 1각을 넣어뒀을 때의 효과와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