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82
중년 남자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고개를 돌린 그가 여인을 바라보며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등수연, 이전에도 경고했지. 내 앞에서 이한제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마지막 경고야. 한 번 더 그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가만두지 않겠어!”
여인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이산과 함께 등가성으로 향했다.
그 무렵, 조나라 변방의 한 이름 없는 산골짜기에서 연이어 밝은 빛의 원이 나타났다. 곧 그 빛의 원은 점차 어두워지더니 결국 사라졌다.
곧 그 골짜기에서 백발 청년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미간에는 보라색 반점이 하나 찍혀 있었다. 가만히 눈앞에 펼쳐진 대지를 바라보던 그가 동쪽을 향해 천천히 무릎을 꿇더니 이마를 땅에 세게 몇 번 찧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는 지금껏 보인 것보다 훨씬 강한 살기가 깃들어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 한제가 돌아왔습니다. 이번에는 이 조나라를 피바다로 만들어보려 합니다.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면 하늘과 땅의 그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하늘에서 우르릉, 소리와 함께 번개가 내려치더니 굵은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내 빗방울은 비안개로 피어올랐다.
대산 산맥의 현도종은 비안개로 뒤덮여 있었다. 하늘에서 번개와 함께 우렁찬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빗방울이 투둑 소리를 내며 빽빽한 숲의 나뭇잎들을 때렸다.
그날 밤, 한제는 천천히 숲 사이를 걸었다. 덤덤한 눈빛으로 한참동안 저 멀리 대산 꼭대기의 현도종 대전을 바라보던 그는 이윽고 몸을 돌렸다. 이번 목표는 이곳으로부터 수백 리 떨어진 곳에 있는 한 작은 마을이었다.
깊은 밤, 마을에서 들리는 것이라고는 천둥소리와 빗소리뿐이었다. 온 마을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한제는 천천히 마을의 길을 따라 사방의 익숙한 집들을 살폈다. 그 눈빛에는 살기나 한기가 아닌 슬픔만이 담겨 있었다. 그 안에는 지울 수 없는 정(情)이 깃들어 있었다.
지난 4백 년은 정말이지 쏜살같이 지났다. 수련자들에게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일반인들에게는 강산이 수십 번은 변했을 시간이었다. 마을의 집들도 이미 여러 대에 걸치면서 변해 있었다.
마을을 둘러보던 한제의 시선이 한곳에 멈추었다. 그곳에는 어렸을 때부터 이 마을에 있었던 오래된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어렸을 적에는 그 밑에서 책을 읽거나 친구들과 놀기도 했던 그 나무였다. 그 시간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한제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걸음을 멈춘 그는 익숙한 집을 바라보았다. 주체할 수 없이 몸이 떨려왔다. 마을 입구에서부터 여기에 이를 때까지 봤던 모든 집들은 다 변해 있었는데 오직 이 집만은 그가 떠났을 당시와 똑같았다.
한제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끼익 소리와 함께 안쪽으로 열린 나무 문은 그가 안으로 들어가자 다시 천천히 닫혔다.
정원에는 쏟아지는 비 아래 나무 탁자가 하나 놓여 있었고 그 주위에는 여러 개의 작은 의자가 있었다. 한제는 묵묵히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자꾸만 눈물이 흘러내렸다.
한참 뒤 그는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모든 것이 그의 기억 속 광경과 똑같았다. 마치 아무런 변화도 없었던 것 같았다. 지난 4백 년의 모든 것이 꿈처럼 느껴졌다. 꿈에서 깨어나면 잠들어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는 신식을 굳이 펼치지 않아도 이곳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집의 중앙에 있는 거실에서 한제는 두 개의 위패를 발견했다. 위아래로 각각 하나씩 놓여 있었다. 위층의 위패에는 ‘이상재, 주영미의 위패’라고 쓰여 있었고 아래층의 위패에는 ‘장자 이한제의 위패’라고 쓰여 있었다. 두 위패 아래에는 향로 하나와 불을 피우지 않은 향들이 놓여 있었다.
한제는 비통한 마음으로 세 개의 향을 집어 불을 붙인 뒤 향로에 꽂았다. 그리고 천천히 절을 하며 이마를 바닥에 세게 찧었다.
“불효자 한제가 이제야 절을 올립니다. 다음에 올 때에는 등 씨 가문 사람들의 머리로 탑을 만들어 부모님께 바치겠습니다.”
짙은 살기가 그의 몸에서부터 피어올랐다. 순간, 거실 안에 서늘한 기운이 솟구쳐 올랐다. 비가 내리고 있는 밤의 서늘함이 배로 짙어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를 떠나려던 한제는 흠칫 놀란 듯 몸을 훌쩍 날려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잠시 후, 마차 한 대가 먼 곳에서부터 달려왔다. 마차 밖에는 도롱이를 입은 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 관자놀이가 높게 부풀어 오른 그의 두 눈이 번득였다. 일반 세상 속의 무림 고수인 듯했다.
그의 손에는 채찍이 하나 들려 있었다. 채찍을 내리치자 말이 히힝 소리를 내며 빠르게 내달렸다.
울퉁불퉁한 길에 마차는 계속해서 덜컹거렸다. 하지만 노인은 마치 마차에 찰싹 달라붙은 듯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랴!”
곧 그 노인은 고삐를 당겼다. 말은 길게 울며 앞발을 높게 들어 올렸다가 한제의 집 앞에 멈추었다.
노인은 훌쩍 뛰어내리더니 공손하게 마차 칸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마차 안에서 계집종 하나가 뛰어내렸다. 비취색 옷을 입은 채 긴 머리를 묶어 올린 계집종은 상당히 수려했다.
그녀는 마차 밖으로 나온 뒤 몸을 한 번 떨었다. 서늘한 빗물 때문인 듯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지우산 하나를 펼친 뒤 마차에 대고 말했다.
“아가씨, 도착했습니다.”
아름다운 여인이 차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천천히 아래로 내려온 그녀가 지우산 아래에 섰다. 여인의 창백한 얼굴은 병약해 보였으나, 오히려 그래서 더 아름다웠다.
여인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오들오들 떨었다. 그러자 계집종이 한손으로 우산을 들고 한손으로는 마차 안에서 보라색 옷을 꺼내 노인의 도움을 받아 여인의 몸에 둘러 주었다.
동시에 계집종이 불만스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아가씨, 비가 이렇게 오는데 꼭 오늘 오셨어야 했어요? 내일 와도 되잖아요. 몸도 약하신데 이러다 감기라도 들면 어쩌려고 그러시는지.”
여인은 가볍게 웃더니 앞으로 나아가며 말했다.
“너희들은 몰라. 할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시기 전 말씀하셨어. 매년 오늘이 되면 우리 이 씨 가문에 무슨 일이 있든 직계 자손들은 직접 이곳에 와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이건 전통이야.”
계집종은 여전히 불만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가씨, 수도에서 여기까지 거리가 얼마나 먼데요. 매년 이곳까지 오는데 무슨 이유라도 있는 건가요? 다른 애들 말을 들으니 이곳에는 이 씨 가문의 한 분파가 있었을 뿐이라고 하던데…”
가볍게 웃던 여인은 문을 열려는 노인을 제지한 뒤 가늘고 고운 손을 뻗어 직접 대문을 열었다. 그리고 말했다.
“넌 이곳이 처음이니 모르는 것도 당연하지. 기회가 있으면 꼭 말해줄게.”
정원으로 들어선 그들은 멈추지 않고 곧장 집 안으로 들어갔다. 계집종은 지우산을 접더니 휙휙 휘둘러 빗방울을 털어낸 뒤 손에 들고는 호기심 가득한 눈길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마차를 몰고 온 노인은 문 앞에 서서 눈을 감았다.
여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거실로 향했다. 계집종이 그 뒤를 바짝 따랐지만 여인이 저지했다.
“너는 이백과 밖에서 기다려. 나 혼자 들어갈 테니…”
계집종은 입을 비죽거렸지만 곧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은 빙그레 웃더니 작게 기침을 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로 들어간 그녀는 단에 놓인 두 개의 위패를 바라보다가 한쪽에서 깔개를 가져와 바닥에 깐 뒤 그 위에 엎드려 절을 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고 향을 피우려던 그녀가 우뚝 멈추었다.
그녀의 눈에 아직 향로에서 타고 있는 세 개의 향이 들어왔다. 깜짝 놀라 소리를 치려던 순간, 그녀는 온몸으로 훅 끼치는 서늘한 기운을 느꼈다.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그녀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이윽고 그녀의 눈에 백발의 청년 한 명이 나타났다.
“넌 누구의 후손이지?”
한제는 여인을 바라보며 느릿하게 물었다.
등화원 (3)
여인은 잔뜩 겁먹은 얼굴로 몸을 덜덜 떨며 말했다. 몸이 떨리는 바람에 목소리도 함께 떨렸다.
“다, 당신은 누구지? 왜 우리 이 씨 가문의 집에⋯⋯?”
한제는 그녀를 바라보며 오른손을 휘둘렀다. 순간 사방의 서늘한 기운이 사라지더니 어느새 주위가 훈훈해졌다. 여인은 몸도 좀 풀어진 듯, 이내 떨림도 사라졌다. 다만 눈빛만은 여전히 두려움에 질린 채 한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그녀의 오른손이 허리춤에 닿았다. 이어 맹렬한 장풍이 밖에서부터 쏘아졌고 그와 동시에 마차를 몰고 온 노인이 거실로 들어왔다. 하지만 그는 이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우뚝 멈춰서더니 저도 모르게 바닥에 쓰러져 기절해버리고 말았다.
여인의 꽃다운 얼굴이 굳어졌다.
“다시 한 번 묻지. 누구의 후손인가?”
한제는 바닥에 쓰러진 노인은 본 척도 않고 덤덤하게 물었다. 그가 처음 집을 보고 예상했던 것처럼 누군가가 지난 4백 년간 이곳을 관리했을 뿐만 아니라 새롭게 중건하기까지 한 상태였다.
“난 이운비의 딸이다. 여기까지 나를 쫓아왔다면 물을 필요는 없을 텐데!”
여인이 이를 악물며 물었다.
“이 집에 위패로 모셔진 자들과는 무슨 관계지?”
한제가 미간을 구기며 물었다.
“⋯⋯선조 형님의 가족이라 들었다.”
여인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눈앞에 있는 자가 만약 자신의 아버지 때문에 복수를 하기 위해 온 사람이라면 그런 것에 대해 물을 필요는 없었다.
한제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눈앞의 여인을 바라보며 더 이상 덤덤하지 못한 말투로 물었다.
“네 선조의 이름이 무엇이냐?”
“내 선조의 이름은 이한도⋯⋯.”
여인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눈앞에 있는 남자는 너무나 이상했다.
한제는 그 이름을 듣자마자 몸을 덜덜 떨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넷째 작은 아버지⋯⋯.”
이 씨 가문 중 부모님 외에 자신에게 잘 대해준 유일한 사람이 바로 넷째 작은 아버지였다. 그런 넷째 작은 아버지의 이름을 듣자 그에 대한 기억이 머릿속에 차올랐다.
한참 뒤, 깊게 한숨을 내쉰 그가 여인을 바라보았다. 눈앞에 있는 여인은 그의 후손이기도 했다.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 선조는⋯⋯ 몇 살 때 세상을 떠났지?”
여인의 눈에 깃든 의아함이 더욱 짙어졌다.
“선조께서는 98세에 돌아가셨다. 그분께서는 살아생전 표묘종 소속의 어느 신선의 눈에 들었고 하산하신 뒤 수도에 뿌리를 내리셨으며, 황제로부터 벼슬을 받았다. 우리 이 씨 가문이 수도에서 살게 된 것 또한 그때부터다.”
한제의 눈에 기쁨과 안심하는 빛이 감돌았다. 그는 잠시 후 다시 물었다.
“넷째⋯⋯ 그러니까 네 선조의 아들인 이준 역시 세상을 떠났느냐?”
여인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그녀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다. 당신이 대체 어떻게 그분의 함자를 알고 있는 거지? 그분은 선조께서 세상을 떠난 지 3년 쯤 후에 돌아가셨다.”
4백 년이라는 세월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구나.
한제는 넷째 작은 아버지의 소식을 들은 후부터 요동치던 마음을 겨우 다잡은 뒤, 눈앞의 여인을 바라보며 느릿하게 말했다.
“네 체내에 음험한 기운이 맴도는 구나. 어머니의 복중에 있을 때 다치기라도 했다더냐?”
여인은 멍한 눈으로 한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마음 역시 요동을 치고 있었다. 그녀의 체내에 자리한 음험한 기운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매우 적었다. 대부분은 그저 그녀가 허약한 체질을 타고 난 줄로 알고 있었다.
그녀는 한제를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 당신은 대체…?”
여인은 상대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품은 원한을 갚기 위해 온 것은 아닐 거라 생각하게 됐다. 자신을 죽일 작정이었다면 이토록 많은 말을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한제가 오른손을 한 번 휘두르자 여인의 이마에 푸른 기운이 떠올랐다. 그 기운은 점점 두터워지더니 그녀의 정수리로부터 솟아올랐다. 한제는 손을 휘둘러 그 푸른 기운을 산산이 흩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