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90
“가! 이제 당신과 나는 아무런 관계도 없어!”
등수연의 눈에 절망의 빛이 어렸다. 멍하니 이산을 바라보던 그녀는 어찌나 세게 이를 악물었는지 아랫입술에서 피가 흐르는 데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는 눈물범벅이 된 채 앞으로 나와 이산의 손을 잡으려 애썼다.
하지만 이산은 다시 뒤로 물러서며 냉정하게 말했다.
“당신이 가지 않는다면 내가 가지!”
말을 마친 그가 몸을 돌려 반대 방향으로 느릿하게 날아가기 시작했다.
등수연은 이산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 담긴 절망이 한층 더 짙어졌다. 마치 칼로 베는 듯 마음이 아팠다. 고통을 이기지 못한 그녀는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 그리고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매몰차게 떠난 이산 역시 찢어질 듯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일족의 죽음을 목격한 그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이 순간, 이산이 느끼고 있는 고통은 등수연이 느끼고 있는 고통보다 결코 덜하지 않았다.
등수연은 비참하게 웃음을 지으며 이산을 향해 중얼거렸다.
“가지 마⋯⋯.”
이산은 흠칫 몸을 떨더니 주먹을 말아 쥐고 매섭게 뒤를 돌아보며 수연을 향해 소리쳤다.
“꺼져!”
말을 마친 그는 질주하듯 내달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모습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등수연의 입가에서 다시 피가 흘렀다. 그녀는 이산이 사라진 쪽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비참한 웃음을 흘리며 몸을 돌렸다. 그녀의 눈에는 먹먹하고 아득한 빛이 어려 있었다.
세상이 넓다 하나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자신에게 가장 소중했던 두 남자 중 한 명은 생사를 알 수 없었고 다른 한 명은 그녀를 내쳤다. 그녀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이었다.
10여 리를 날아간 이산의 주먹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가족들이 죽어가는 모습이 하나하나 그의 뇌리를 스쳐갔다. 그러나 잠시 후 그 기억은 등수연의 슬픈 표정과 절망적인 눈빛으로 바뀌어갔다.
땅에 내려선 이산은 아주 옛날 가족들이 지내던 마을이 있는 방향을 향해 꿇어앉아 머리를 바닥에 찧었다. 그의 입에서 고통에 겨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버지, 어머니, 저는⋯⋯ 불효자입니다!”
말을 마친 그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몸을 돌려 등수연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가족들, 특히 부모님이 냉랭한 표정으로 자신을 배신자라고 불효자식이라고 욕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눈물을 흘리며 등수연을 쫓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멍한 얼굴로 하늘을 날고 있는 아내를 발견했다. 그녀는 마치 뭔가를 느낀 듯 고개를 돌려 이산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 눈에는 기쁨과 행복이 가득 들어찼다.
하지만 두 사람이 막 만난 그 순간, 짙은 살기가 천천히 하늘 끄트머리에서부터 내려왔다. 거대한 마수 위에서 바람에 백발을 흩날리고 있는 청년이 차가운 표정으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뒤로는 셀 수 없이 많은 시체가 빽빽하게 딸려 있었고 짙은 피 냄새가 느껴졌다.
수연은 무의식적으로 이산의 뒤에 숨어 벌벌 떨었다.
이산은 그 청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믿을 수 없다는 듯 그의 두 눈이 커졌다.
“너⋯⋯ 이한제!”
“이산!”
한제는 흡혈 마수 위에서 훌쩍 뛰어내려 이산의 앞에 섰다. 그리고 그의 뒤에 있는 여인을 힐끗 쳐다보았다.
이산은 무의식적으로 수연의 앞을 막아섰다. 한제를 향한 그의 눈빛이 복잡했다.
한참 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진즉 알아차렸어야 하는 건데. 가족의 복수를 할 만한 힘을 가진 사람은 너밖에 없으니까.”
한제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입을 열었다.
“이산, 미안하다.”
이산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때 미안하다고 했다면 용서하지 못했을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은⋯⋯ 우리가 복수해야 할 사람은 한 명, 등화원이야.”
한제의 눈이 서늘한 빛을 번득였다. 그가 느릿하게 말했다.
“등화원 그자는 도망치지 못해. 모든 등 씨 가문 사람들도 그렇고.”
등수연은 몸을 바르르 떨고 있었다. 너무나 두려웠지만 이내 이를 악문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내 아버지는⋯⋯.”
“조용히 해!”
이산이 미간을 구기며 등수연의 말을 막아섰다. 그리고 침착한 목소리로 한제에게 말했다.
“이 사람은 네 형수인데⋯⋯.”
이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제가 덤덤하게 말했다.
“하지만 등 씨이기도 하지.”
등수연의 몸은 덜덜 떨렸지만 한제를 보는 그녀의 눈에는 깊은 원한이 어려 있었다.
이산의 마음은 한층 더 복잡해졌다.
이산
한제는 하늘 끝자락에 걸린 저녁 해를 바라보며 느릿하게 물었다.
“이현은, 아직 현도종에 있나?”
이산은 고개를 저으며 씁쓸하게 말했다.
“이현은 결단기에 이르지 못해서⋯⋯ 이미⋯⋯ 죽었어.”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던 한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 여자와 조나라를 떠나.”
말을 마친 그는 이산을 다시 쳐다보지도 않고 몸을 훌쩍 날려 흡혈 마수에 올라탔다.
사람마다 자신의 생각이 있는 법이다. 이산은 이미 등수연이 죽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한제를 바라보던 이산의 머릿속에서는 가족들과 부모님이 죽어가던 참상이 다시 피어올랐다. 마치 모든 가족이 그를 노려보며 가문의 배신자라고 손가락질하는 것만 같았다.
이산은 씁쓸하게 웃으며 몸을 돌려 수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이산은 심장이 덜컥했다. 아내의 눈에서 깊은 원한의 빛을 읽었기 때문이다.
이산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등수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수연아, 가자.”
말을 마친 그가 오른손을 뻗어 수연의 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었다.
흠칫 놀란 수연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산과 오랜 시간을 보내왔지만 그토록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준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행복은 딱 거기까지였다. 이산의 오른손이 그녀의 정수리를 움켜쥔 채 영력을 불어넣어 그녀의 생기를 끊어놓았기 때문이다.
등수연은 고통 없이 숨을 거두었다. 그토록 사랑하던 이의 품에서 ⋯⋯.
이미 숨을 거둔 아내의 시체를 안은 이산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는 한제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한제, 나는 이 씨 가문의 배반자가 될 수도 등 씨 가문 사람으로 하여금 한 줄기 여한을 남겨둘 수도 없었다.”
말을 마친 그는 고향이 있는 쪽으로 꿇어앉아 이마를 몇 번 찧은 뒤 스스로 생기를 끊었다. 입가에서 한 줄기 선혈이 흘러내렸다. 그는 품에 안은 아내를 가련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수연아, 걱정 마. 내가 함께⋯⋯.”
흡혈 마수에 올라 있던 한제의 몸이 흠칫 떨렸다. 등수연을 가리키던 빛이 사라졌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는 즉시 몸을 날렸다.
멍하니 이산 부부의 시체를 바라보는 한제의 마음 역시 복잡했다.
이산의 선택은 명확했다. 가족의 복수와 부인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고뇌하던 그는 결국 자기 손으로 사랑하는 여인의 숨을 끊고 이어 자신의 목숨 역시 내놓았다.
한제는 오른손으로 이산의 미간을 두드렸다. 한 덩어리의 미약한 영혼의 불이 금방이라도 꺼질 듯 위태롭게 이산의 미간에서 떠올라 한제의 손에 들어왔다.
한제는 한숨을 내쉬고는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 ★ ★
조나라 수도 동북부에는 거대한 저택이 한 채 있다. 수도에서 명성이 자자한 이 씨 가문의 집이었다. 지금, 그 저택에 백발의 청년 하나가 나타났다. 그는 저벅저벅 걸어 뜰 안으로 들어갔지만 누구도 그의 존재를 알아차리지는 못했다.
백발 청년은 어느 건물 앞에 멈춰섰다. 방 안에는 한 여인이 침상에 누워있었다. 배가 살짝 부푼 것으로 보아 아이를 가진 듯했다.
청년은 그 여인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한 덩이의 하얀색 빛이 나타났다. 가볍게 한숨을 내쉰 그가 오른손을 휘두르자 그 하얀색 빛은 방 안에 있는 여인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뱃속에서 아직 영혼을 갖지 못한 채 막 형태만 갖춘 갓난아이와 천천히 융합되었다.
“반드시 신선계에 발을 들이게 될 것이다. 어쩌면 훗날 만나게 될지도 모르지.”
백발 청년은 혼잣말을 중얼거린 뒤 자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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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 현도종(玄道宗).
당시 한제가 폐관수련을 하던 뒷산의 빽빽한 동굴 중 가장 위편에는 천연 동굴이 하나 있었다. 흑천은 그 안에 있는 원추형 바위에 가부좌를 튼 채 눈을 감고 좌선 중이었다.
그의 얼굴은 4백 년 전과 거의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얼굴이 넓고 귀가 커 위엄 있는 모습이었다.
물방울 몇 개가 동굴 천장에서 자라난 종유석들을 타고 바닥에 움푹 팬 웅덩이로 떨어지며 맑은 소리를 냈다.
한참 뒤, 흑천의 얼굴에 기이한 빛이 번득이더니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그의 두 눈이 해와 달을 품은 듯 번쩍 빛났다.
흑천은 오른손을 들어 느릿하게 손가락을 꼽아보았다. 그러더니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얼굴로 앞쪽을 가리켰다. 순간 수십 척 밖에 있는 석벽이 번쩍이더니 뒤이어 열 개의 빛이 천천히 그 석벽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