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92
빠른 속도로 하늘을 날아 이동하던 흑천 역시 안색이 변한 채 우뚝 멈추어 서서 신식을 펼쳐 천천히 탐색에 나섰다.
동시에 조나라 중앙의 통천탑에서 좌선하고 있던 뚱뚱한 중년 남자도 눈을 번쩍 뜨며 먼 곳을 내다보았다. 그의 눈빛이 기이하게 변했다.
“이⋯⋯ 이건 거마족의 통천술(通天術) 아닌가!”
한편 한제는 조심스럽게 금빛 피를 거둔 뒤 얼른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리고 단약 몇 병을 꺼내 하나하나 삼킨 뒤 고신결을 이용해 빠르게 소화시켰다.
두 구의 시체 인형 중 남아 있는 한 녀석은 멍하니 한제 곁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뭔가 이상한 기척이라도 느껴지면 곧장 돌진할 터였다.
★ ★ ★
다음 날, 한제는 두 눈을 번쩍 뜨고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만약 그에게 그토록 많은 단약이 있지 않았더라면 고대 신의 신통술을 쓴 후유증은 보름도 넘게 이어졌을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시체 인형을 힐긋 바라보았다. 시체 인형의 몸에도 약간의 상처가 나 있었다. 옥패의 기록에 따르면 시체 인형은 자가치유가 가능하다고 했다. 이에 한제는 결인을 그린 뒤 시체 인형의 미간에 찍었다. 그러자 시체 인형은 검은 안개로 변해 한제의 저물대로 되돌아갔다.
한제는 복잡한 심정으로 등일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았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한 상대였다.
사실 한제는 최후의 필살기인 천벌의 가닥까지 쓸 생각을 했다. 허나 그리된다면 그의 복수는 더 이상 이어지지 못할 수도 있다.
그 천벌의 가닥은 통천탑에 있는 상급 수련국 사자를 상대하기 위해 마련해둔 수단이기 때문이다.
천벌의 가닥을 쓰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건만 고대 신의 피 한 방울을 얻기까지 했으니 남는 장사였다. 비록 그 핏방울은 썩 순수한 편은 아니라 한 번 사용하고 나니 사라져 버렸지만 이를 통해 고대 신의 신통술을 펼칠 수 있다는 사실은 확인했다. 그리고 목숨을 구하기에는 그 한 차례만으로도 충분했다.
한제가 저물대에서 금번을 꺼내 살핀 후, 등 씨 가문을 처리한 뒤에는 천벌을 막을 수 있는 곳을 찾아 마지막 금제 하나를 걸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해서 이 금번을 완벽하게 완성해낸다면 또 등일 같은 자가 나타난다 해도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한제는 처음으로 자신의 법보가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심지어 청동 거울마저 폭발해버렸다. 본래 법보가 많지 않았던 한제에게는 치명적인 손실이었다.
사실 한제의 법보 중 금번 외에는 딱히 내세울 만한 것이 없었다. 예의 그 칼집은 꽤 괜찮았으나, 비검의 위력이 부족해 다시 제련할 필요가 있었다.
이번 전투를 통해 한제는 극의 신식이 무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 세상에는 그에 대항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극의 신식을 최고 수준까지 수련한다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그러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더구나 극의 경계를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 오기라도 한다면 그에게는 방법이 없다.
상황이 이러하니 법보의 중요성이 더욱 커졌다. 한제는 세 개의 저물대를 꺼내놓고 심각한 표정으로 그것들을 살폈다.
그는 금번을 흔들어 사방에 검은 막을 펼치고 두 마혼에게 주위를 지키게 했다. 등일에게 대항하느라 부상을 입은 시체 인형은 소환하지 않았다.
등 씨 가문을 멸하다(1)
작업을 마친 한제는 정신을 집중해 그중 하나의 저물대를 집어 들었다. 고왕의 저물대로 위에는 ‘란’이라는 글자가 수놓아져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체내의 영력이 미친 듯이 맴돌았고 분신으로 만들어진 원영은 눈을 번쩍 떴으며, 영력의 위압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또한 그의 손이 닿은 순간, 그 저물대에서는 강력한 저항력이 일었다. 한제는 심장이 덜컥했다.
“설마…”
설마가 아니라, 확실했다. 고왕은 아직 살아 있는 것이다.
한제는 무언가 결심한 듯 손으로 저물대를 몇 차례 쓸어내렸고 그럴 때마다 그 안에 깃든 고왕의 신식이 줄어갔다. 하지만 한제는 그만큼 격렬한 영력의 반항에 부딪히고 있었다.
1각 뒤, 한제는 이마에 땀이 맺힌 채 거친 숨을 몰아쉬며 몇 개의 단약을 삼켜 호흡을 안정시켰고 다시 이를 악물고 극의 신식을 발동했다. 그의 오른손에 나타난 극의 신식은 체내의 영력과 함께 저물대를 뚫고 들어갔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많은 힘을 소모해야 했다.
한제는 연달아 몇 병의 단약을 복용했고 어느 순간 고왕의 저물대에서 하얀 빛이 튀어나왔다. 그 빛은 점점 어두워지다가 이내 사라져 버렸다.
한제는 한시름 놓았고 기대감에 가득 찼다. 고왕의 저물대는 이미 완전히 열려 있었다.
그러나 신식으로 그 저물대를 살피던 한제의 표정이 기괴해졌다.
고왕의 저물대에 들어 있는 물건은 두 개의 최고급 영석과 질박한 검집 하나가 전부였다. 그 주인의 높은 수준을 생각할 때 매우 실망스러웠다.
검집을 손에 들고 한참 살피던 한제의 표정이 굳어갔다. 이 검집은 그가 가지고 있는 것과 똑같았다. 다만 그 위에 새겨진 부호만 달랐을 뿐이다.
잠시 망설이던 한제는 자신의 검집을 꺼내 두 개를 비교해보았다. 한데 바로 그때, 갑자기 두 검집에 새겨진 부호가 빛나기 시작했다. 그 빛은 한참 뒤에야 서서히 사라져갔다.
한참 동안 이를 관찰하던 한제는 두 검집을 모두 회수했고 고왕의 저물대는 한 줌 재로 만들어버렸다.
실망스런 마음에 한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나머지 두 개의 저물대로 시선을 돌렸다. 그중 하나는 화분국 전신전의 동굴 속, 기이한 시체 밑에 놓여 있던 것이었다.
다른 하나에는 열 개가 넘는 법보가 들어 있었다. 이 법보들은 고대 신의 땅에 있던 상고 시대 수련자들의 물건으로 그 수준이 너무나 강해 갖은 노력 끝에 겨우 청동 거울 하나만 통제하는 데 성공한 바 있다.
하지만 그 거울은 그리 강력한 법보는 아닌 듯했다. 이름과 썩 어울리지 않는 법보의 위력을 한제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 저물대 안을 신식으로 훑어보았다. 그 법보들에는 여전히 방어용 빛의 원이 드리워져 있었는데 제거할 수가 없었다. 한제는 마치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보물을 앞에 두고도 하나도 챙기지 못한 느낌이었다.
한제는 마지막 저물대를 집어 들고 신식으로 훑어보았다. 저물대가 발하는 저항력에 영력과 극의 신식을 함께 불어넣어 그 안에 담긴 신식을 지우려 했다. 한데 신식이 저물대에 닿은 순간, 한제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마치 자신의 의식이 몸을 떠난 듯한 느낌을 받았다.
눈앞에는 익숙한 대지가 펼쳐져 있었고 그 위를 한 청년이 질주하고 있었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청년은 갑자기 우뚝 멈추더니 고개를 들었다. 그러더니 서늘하고 냉랭한 눈으로 느릿하게 말했다.
“넌 절대 도망칠 수 없어!”
한제의 의식이 다시 몸으로 돌아왔다. 그는 흠칫 놀라며 눈을 떴다. 그 청년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도 없었다. 어쩌면 자신보다 훨씬 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그때 펼쳐진 배경을 한제는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곳은 수마해였다. 그리고 그 사람은 당시 화분국의 전신전 동굴에 있던 그 마른 시체였다. 한제의 앞에 놓인 것은 바로 그의 저물대였다. 어찌된 일인지 그 시체는 깨어났고 이 저물대를 찾아다니는 모양이었다.
만약 그가 살기만 드러내지 않았다면 저물대를 돌려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대의 반응을 보건대, 이제 상황은 돌이킬 수 없게 됐다.
잠시 망설이던 한제는 곧장 신식과 영력의 힘을 더해 계속해서 저물대에 자리한 신식을 지워나갔다.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다. 이런 속도로 저물대의 신식을 완벽히 지우려면 수백 년은 걸릴 듯했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저물대들을 모두 챙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등가성이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은 점점 더 냉랭해지더니,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등화원, 내가 간다!”
★ ★ ★
지난 며칠 동안 거의 모든 등 씨 가문 사람들이 등가성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이곳에 있어야만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을 보면서 등화원의 안색은 점점 어두워졌다. 그는 한제가 언젠가 여기로 올 것을 알고 있었다.
등가성은 지금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구름처럼 모여든 등 씨 가문 사람들은 등가성으로 들어온 뒤에서야 자신들의 가주가 어째서 학살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는지 알게 되었다. 나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한 층의 금제 때문에 나올 수 없었던 것이다.
공포와 함께 정체 모를 살인귀에 대한 소문이 등가성 전역을 헤집었다. 등 씨 가문 사람들은 살인귀의 정체에 대해 토론하면서 수많은 소문이 맴돌았다.
등화원은 그런 소문들이 돌아다니지 않도록 제지했지만 소용없었다. 등가원에 퍼진 두려움의 기운은 갈수록 짙어졌다.
이른 아침, 햇빛은 밝았고 구름 한 점 없었다. 등 씨 가문에 대한 학살이 벌어진 지 9일 째 되는 날이었다.
등 씨 가문 사람들은 죽은 자를 빼고는 모두 등가성에 모여 있었다.
★ ★ ★
이른 아침, 한제는 흡혈 마수를 탄 채 등가성으로부터 1만 리 떨어진 곳에 이르렀다.
그의 뒤에 매달린 시체들은 약간 썩었지만 법술에 의해 머리만큼은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그들의 머리로 탑을 만들어 바치겠다던 약속 때문이었다.
한제는 천천히 등가성으로 다가갔다. 등가성을 바라보며 살의와 동시에 감개무량함을 느꼈다. 4백 년 전, 등화원의 손에 몸과 목숨을 잃었고 지금 다시 돌아왔다. 하늘을 뒤덮을 듯한 살기를 안고…
등가성 1만 리 밖의 공터에 훌쩍 뛰어내린 한제는 냉랭한 눈으로 등가성을 바라보며 교룡의 힘줄에 매달린 시체들을 바닥에 하나씩 쌓았다. 시체의 몸통은 잘라내고 머리만을 모아 쌓는 그의 동작은 군더더기 없었고 표정은 더없이 냉랭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바닥에 쌓여 가는 시체들의 표정에는 두려움과 분노, 슬픔이 가득했다.
머리가 높이 쌓일수록 강력한 원한이 피어올랐다. 사방에서 음산한 바람이 불어왔고 하늘도 약간 어두워졌다.
인두(人頭)로 이루어진 거대한 탑이 천천히 공터 위에 모습을 갖춰가기 시작했다. 소름이 끼치는 광경이었다.
한제는 마지막 머리를 탑의 꼭대기에 올려놓고 오른손을 밀어 올렸다. 순간 이 수천 명의 머리로 이루어진 탑이 솟아올라 둥둥 떠다녔다. 그리고 그를 따라 천천히 등가성으로부터 1만 리 지점에 펼쳐진 금제의 진 안쪽으로 들어섰다.
“등화원, 내가 왔다! 오늘 여기 있는 그 누구도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이다!”
원한이 가득한 목소리가 등가성 전역에 왕왕 울렸다.
순간, 등가성은 적막으로 뒤덮였다. 허나 이내 몇몇 고수들에 이어 점점 많은 사람이 인두의 탑을 발견했고 이내 두려움에 질린 숨소리가 곳곳에서 흘러나왔다.
등화원은 어두운 안색으로 성 위에 서 있었다. 그의 곁에는 등 씨 가문에 남은 마지막 원영기 수련자 네 사람이 있었다.
이들은 등화원의 지시에 따란 순간 그 자리에서 사라졌고 한제로부터 1천 척 정도 떨어진 곳에 다시 나타났다. 이들은 곧장 각종 법보를 꺼내들었다.
하지만 그들 넷으로는 역부족이었다. 한제는 냉정함과 광기를 모두 가지고 지난 4백 년간의 묵은 원한을 모두 쏟아냈다. 그는 오늘 피에 굶주리고 살인에 목마른 미친 자가 될 작정이었다.
한제가 극의 신식을 발동하자 붉은색 번개에 네 명의 원영기 수련자는 꺼낸 법보를 사용할 틈도 없이 비명을 질러댔다. 그들의 몸은 극의 신식으로 이루어진 창살에 의해 갇히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한제는 몸을 훌쩍 날려 그 창살 쪽으로 다가가서는 날렵하게 칼을 휘둘렀다.
누군가의 목이 떨어지자 한제는 가볍게 발길질을 했고 인두탑을 이루는 머리가 하나 늘었다. 목이 잘린 시체에서 흐르는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가 다시 바닥을 적셨다.
한제는 맹렬하게 몸을 틀었다. 그의 손에는 또 하나의 비검이 들렸고 칼부림 한 번에 한 사람의 머리가 또 떨어졌다. 동시에 인두탑의 머리가 하나 더 늘었다. 네 명의 원영기 수련자가 둘로 줄어드는 데 걸린 시간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극의 신식으로 이루어진 창살 안에 남은 두 사람에게는 반항할 틈도 주어지지 않았다. 한제의 ‘죽어!’라는 한마디에 창살을 이루고 있던 극의 신식이 수축하여 얇은 철망으로 변하더니 두 사람의 몸을 위에서 아래로 휙 그었다. 조각난 살과 뼈가 뒤섞인 피가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머리만큼은 완벽하게 보존됐다. 인두탑의 머리가 두 개 늘었다.
연이어 네 사람을 죽인 한제는 고개를 들어 등가성 위에 있는 등화원을 바라보며 잔인한 미소를 띠었다. 그 미소를 본 등화원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네 명의 원영기 수련자를 그렇게 쉽게 죽여 버리다니. 대체 이한제의 수준은 어느 정도에 이른 것인가?
등화원은 어질어질했다. 그는 자신이 큰 착각을 했음을 알게 됐다. 사방을 가로막은 금제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저 이한제가 직접 배치한 것이었다.
“등화원, 잘 지냈나?”
한제가 마치 오랜 지기라도 만난 듯 물었다. 심지어 그의 표정은 다정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런 표정과 달리 행동은 잔악무도했다. 한제가 오른손을 허공에서 움켜쥐자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등가성을 훑었고 동시에 수십 명의 비명이 흘러나왔다. 그중에는 남자도 여자도 있었고 수련자도 일반인도 있었다.
한제는 움켜쥔 오른손에 힘을 꽉 주었다. 순간 펑 소리가 줄을 이었고 좀 전에 비명을 지른 사람들의 몸이 터져나갔다. 마치 등가성 전체가 피를 흘리는 듯했고 그 와중에 피 한 방울이 등화원의 얼굴에 튀었다. 등화원의 몸이 경미하게 떨렸다.
인두탑을 이루고 있는 머리가 열아홉 개나 더 늘어났다.
“이한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