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202
화롯불이 하늘거리며 한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밝아지기를 반복했다. 조각상들 역시 그래서 더욱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조각상들을 하나하나 살피는 동안 마음의 추위는 점점 줄어들었다. 하지만 고독은 적어졌어도 슬픔은 짙어진 상태였다.
“놓을 수가 없구나. 놓을 수가⋯⋯.”
한제가 중얼거렸다. 일찍이 수련자의 길에 올랐을 때에도 가족에 대한 정을 놓지 못했던 그는 지금도 그러했다.
하지만 이 감정은 분명 당시의 그것과는 달랐다. 화신이 되려면 먼저 일반인이 되어야 한다. 혈육 간의 정을 모조리 놓아버린다면 일반인이 되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화신기 수련자가 강한 것은 그 수준이 뛰어나서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마음에 숨겨진 깊은 감정이 더 중요했다. 그 감정 덕분에 그들은 일반인이 될 수 있었으며, 그 감정을 통해 원영기를 돌파해 화신기에 이를 수 있었다.
한제가 일반인으로서 생활하는 와중에 큰 우여곡절 없이 일반인과 같아질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부모님에 대한 생각에 푹 빠져 있던 그는 점점 그 감정을 깨닫게 되었고 그러자 체내의 영력이 다시 미친 듯이 소용돌이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 소용돌이는 점차 몸 밖으로 빠져나왔고 가게 안에 있는 모든 나무 조각상에서는 영기가 피어올라 한제 체내의 영력과 같은 파동을 일으키며 빠르게 회전했다. 점점 그 영력의 회전이 갈수록 빨라지면서 가게 밖으로 빠져나갔다.
내리던 눈은 가게 지붕에 닿은 순간 그 회전에 따라 하나하나의 눈뭉치가 되어 사방으로 미끄러져갔다. 그 눈뭉치는 갈수록 커졌다.
한참 뒤에야 한제는 정신을 차렸다. 그가 정신을 차린 순간, 사방의 선반에 놓인 나무 조각들 중 반 정도가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갈라졌다. 하지만 그것에서 흘러나오는 영력은 이전보다 더욱 묵직해졌고 심지어 품질 역시 올라간 상태였다.
한제는 깊은 숨을 들이마신 후 자리에서 일어나 가게 문을 열었다. 냉기 어린 눈과 차가운 공기가 얼굴로 들이닥쳤다. 한제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덤덤하게 말했다.
“나 이한제는 반드시 화신기에 이를 것이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발은 더욱 커졌고 바닥에 쌓인 눈도 어느새 두꺼워졌다.
그때, 맞은편 대장간 문이 벌컥 열리더니 대우와 그의 아비가 문밖으로 나왔다. 한제를 본 그들은 흠칫 놀란 듯했다. 대우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뽀드득 소리를 내며 눈을 밟고 한제의 앞으로 다가온 그가 소리쳤다.
“삼촌, 우리 올 걸 알고 있었어?”
말을 마친 그가 가게 안으로 들어가 화롯가 앞에 앉았다.
대우의 아비는 사람 좋게 웃으며 나무로 짠 바구니를 들어올렸다.
“한제, 안 바쁘지?”
한제는 미소를 지었다.
“안 바빠요. 들어오세요.”
대우의 아비는 가게로 들어간 뒤 부러운 눈으로 사방 가득한 조각을 바라보았다.
화로 옆에 앉아있던 대우는 한제 부모님의 조각상을 보고 작게 탄성을 지르며 말했다.
“삼촌, 이 조각상은 여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새로 만든 거야?”
한제는 가게 문을 닫고 그 옆에 서서 말했다.
“이전에 만들어둔 거야.”
대우는 그 조각상에서 눈도 떼지 못하며 말했다.
“삼촌, 이게 누군데?”
한제는 그리움이 담긴 눈으로 느릿하게 말했다.
“가족들…”
대우는 흠칫 놀라 더는 묻지 못하고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제 아비가 가져온 바구니로 다가가 뚜껑을 열었다. 바구니에는 먹음직한 요리 몇 가지와 술 두 주전자가 들어 있었다.
한제는 기쁜 얼굴로 대우의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대우 아버지는 뭔가 미안한 기색으로 입을 열 듯 말 듯했다. 지난 3년간 매일같이 본 사이였지만 저 호쾌한 사내가 이렇게 우물쭈물하는 것은 처음 봤다. 분명 무슨 도움을 바라고 온 듯했다.
“형님, 하실 말씀 있죠? 해보세요.”
대우의 아버지는 한참이나 머뭇거리다가 손을 비비며 난감하다는 듯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대우는 바구니 안의 요리들을 바라보며 침을 꼴깍 삼키더니 음식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매서운 눈길에 얼른 손을 거두며 불만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작정하고 돈 빌리러 왔으면서 그렇게 부끄러워할 게 뭐가 있담.”
대우의 아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개져서 욕을 내뱉었다.
“이 망할 자식, 집으로 돌아가!”
대우는 혀를 쏙 빼물며 한제에게 말했다.
“삼촌, 아버지가 부끄러워하니 내가 말할게. 엄마가 옆 가게를 빌려서 가게를 좀 넓힐까 하는데 돈이 좀 부족하대.”
대우의 아버지는 한숨을 내쉬며 한제를 바라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집사람이 하도 가게가 적으니 찾아오는 손님이 적은 거라고 성화를 부려서 말이야. 옆에 이 씨가 가게를 비운다고는 하는데 돈이 부족해서…”
한제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바구니 안에 술주전자를 들어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
“얼마나 필요하신데요?”
대우의 아버지는 한동안 고민하다가 말했다.
“옆 가게가 꽤 크기도 하고 한 번에 2년 치 임대료를 달라고 하더라고. 은 50냥⋯⋯ 음⋯⋯ 30냥, 30냥이면 될 거야.”
대우가 입을 비죽이며 중얼거렸다.
“엄마가 분명 80냥은 더 필요하다고 했는데⋯⋯.”
대우는 말을 끝내기도 전에 아버지의 매서운 눈길에 입을 꾹 닫았다.
한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무 말도 않고 뒷방으로 향했다. 그곳에 놓인 커다란 궤짝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모두 돈이었다. 한제는 거기서 금 한 덩이를 가지고 돌아와 대우 아버지에게 건넸다.
대우의 아버지는 금을 본 뒤 깜짝 놀라 얼른 입을 열었다.
“이렇게 많게는 필요 없네. 얼른 집어넣게. 은 30냥이면 충분해.”
그가 보기에 이 금 한 덩이는 적게 잡아도 열 냥은 될 것 같았다. 필요한 돈에 비하면 너무나 많았다.
한제는 술주전자를 들며 웃었다.
“형님, 이것은 돈은 아니라 술값입니다. 지금껏 외상으로 마신 것에 더해 앞으로 매일 한 병씩 마실 것까지 미리 내는 겁니다. 이렇게 맛 좋은 과일주 10년 치 값이라면 오히려 싼 거지요.”
대우의 아버지는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감격한 표정으로 말했다.
“한제⋯⋯ 저⋯⋯.”
대우가 말했다.
“아버지, 챙겨요. 삼촌은 나무 조각 하나에 금 열 냥도 더 넘게 판다니까요.”
대우 아버지는 다시 한 번 아들을 노려보았다. 잠시 후 깊은 숨을 들이마신 그는 술주전자를 들고 벌컥벌컥 들이켠 뒤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한제, 10년이고 뭐고 여기 머무는 동안 매일 술 한 주전자씩 보내겠네.”
한제는 가볍게 웃으며 눈앞의 부자를 바라보았다. 좀 전까지 그를 괴롭히던 마음속의 고독함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훈훈함마저 느껴졌다.
그날 밤, 대우의 아버지가 술을 어찌나 마셔대는지 두 주전자로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대우는 줄곧 집과 한제의 가게를 오가며 술심부름을 했고 덕분에 두 사람은 열 주전자를 비웠다.
결국 대우의 아버지는 잔뜩 취해 드러누웠고 손에 금을 꼭 쥔 채 대우의 부축을 받아가며 겨우 집으로 돌아갔다.
떠나기 전, 대우는 한제에게 휘파람을 불며 말했다.
“삼촌, 우리 집에 이 술이라면 넘치도록 많아. 아빠가 다른 사람들한테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사실 지하실에 몇 단지는 있을 걸? 옛날부터 전해져 온 거래. 그 지하실 밑에도 엄청 많이 묻혀 있나 봐. 그 술을 팔지 않겠다고 아버지가 고집만 부리지 않았어도 삼촌한테 돈 빌릴 일은 없었을 텐데…”
말을 마친 대우가 아버지를 부축해 맞은편 문으로 사라진 후, 화롯가로 돌아온 한제는 내심 새삼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금 열 냥은 일반인들에게는 굉장한 돈이었지만 수련자에게는 돌과 같아 쳐다볼 가치도 없는 물건이었다.
그는 다시 목재 하나를 들고 뭔가를 조각해나갔다.
경지
또다시 3년이 흘렀다. 대우네 가게는 두 배 이상 넓어졌고 대우 어머니의 생각대로 장사도 이전보다 훨씬 나아졌다.
하지만 그러면서 일거리도 늘어, 온종일 아버지 곁에서 쇠 다듬는 일을 돕느라 대우의 휴식 시간은 더욱 줄어들었다.
하루 장사가 끝나고 나서야 대우는 피곤한 몸으로 술 한 주전자를 들고 한제를 찾아와 그가 조각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제 17살이 된 대우는 쇠 다듬는 일로 몸이 더 단단해져 이제 한겨울에 얇은 옷 하나만 걸치고 다니면서도 전혀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하지만 세월을 이길 수 없었던 그의 부모 얼굴에는 주름이 더 늘었고 더 깊어졌다.
한제의 외모에도 변화가 생겼다. 그는 더 이상 청년이 아니라 중년에 접어들었고 얼굴에도 조금씩 주름이 나타났다.
사실 이는 그가 일부러 법술을 이용해 만들어낸 것이었다. 만약 6년이나 지났는데도 처음의 외모가 전혀 변하지 않는다면 선량하고 순박한 이웃들이 뭔가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 말이다.
지난 3년간 서도는 점점 더 자주 방문했다. 이제 거의 달마다 찾아와 엄청난 양의 금과 은, 그리고 맛좋은 술을 놓고 갔다. 지속적으로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였다. 그게 세자 마마의 뜻이라는 말도 심심찮게 흘렸다.
한제는 세자에 대해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가 수도에 자리 잡은 것은 그저 일반인의 감정을 느낌으로서 자신의 경지를 높이기 위해서였다. 일반인들의 권력 투쟁에 끼어들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어느새 가을이었다. 길가 나무잎들이 바람에 날려 맥없이 떨어졌다. 어딜 가도 낙엽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가게에서 나온 한제는 두꺼운 옷을 입고 머리에는 가죽 모자까지 썼다. 만약 조나라나 초나라 사람이 본다면 그가 당시 그토록 잔혹한 학살을 저지르고 다니던 한제임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이는 그와 직접 싸웠던 수련자들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지금의 그는 겉모습뿐만 아니라 생각도 마음가짐도 일반인들과 차이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가 일반인과 분명히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눈이었다. 흰자와 검은자의 구별이 분명하고 탁한 기운 없이 여전히 맑게 빛났다. 때문에 그에게서는 뭔가 비범한 느낌이 흘렀다.
지난 3년간 한제는 단 한 번도 좌선이나 수련을 하지 않았다. 몸을 두르고 있는 붉은 안개도 2년 전 부지불식간에 피처럼 붉은 구슬로 응결되었고 지금은 저물대에 있었다.
밖으로 나오자 바람이 불었다. 서늘한 가을 바람에 한제는 옷깃을 단단히 여민 뒤 가게 문을 닫고 느릿하게 밖으로 향했다.
맞은편의 대장간에서 건장한 청년 하나가 나왔다. 손에는 버릴 숯이 들려 있었다. 가게 밖으로 나온 그는 한제를 보고 씨익 웃으며 말했다.
“삼촌, 또 공연 보러 가?”
한제는 몸을 돌리고 웃으며 말했다.
“대우야, 술 한 주전자 좀 가져와라.”
청년은 고개를 끄덕인 뒤 들고 있던 숯을 내버리고 얼른 가게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잠시 후 술주전자를 가지고 나온 그는 따스한 눈빛으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