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204
한제가 덤덤하게 말했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오른손을 휘둘렀다. 순간 노인의 기운이 완전히 변하더니 더럽고 비열한 거렁뱅이에서 위엄 넘치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의 몸에서 영력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대양처럼 그 깊이와 넓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존재감이 느껴졌다.
노인의 몸에서 어떤 기운이 서서히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한제는 술을 한 모금 들이켜더니 말했다.
“선배님, 제 집은 그다지 단단하지 못하니 거두시지요.”
노인은 가볍게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이 녀석아, 잘 보아라. 이것이 바로 경지다!”
노인의 몸에서 들끓어 오르던 기운이 순간 사납게 폭발할 듯 가게를 뒤덮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가게의 벽돌 하나, 기와 하나 망가지지 않았다. 심지어 밖으로 새어나간 기운도 없었다. 마치 가게의 안과 밖이 칼로 잘려 분리된 것만 같았다.
그 흉포한 기운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면서 한제의 몸은 저도 모르게 그에 저항하기 위해 강한 영력을 폭파시켰다. 하지만 그의 영력은 흘러나오자마자 그 흉포한 기운에 안내라도 받은 듯 동화되어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 미친 듯한 기세에 한제의 두 눈에 놀라움이 어렸다.
체내의 영력을 통제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는 자신의 원영이 광폭한 기운에 동화되어 지난 4백 년간 갖은 고생 끝에 이룬 모든 것을 상대에게 빼앗긴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이것이 바로 내 광증의 경지다. 당시 이 경지를 깨닫고 화신기에 이르렀지. 이 경지 아래, 모든 영력은 이 경지에 동화되어 내 통제를 받는다.”
노인의 목소리에 광기가 어려 있었다. 그는 한제를 힐긋 보더니 경지를 흩트렸다. 그러자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가게 안은 평온을 되찾았다.
단 몇 초에 불과했지만 한제의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는 깊은 숨을 들이마신 뒤 살짝 떨리는 손으로 술주전자를 들어 과일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한참 뒤에야 체내의 영력이 차차 안정되어 갔다.
“어째서 제가 이전에 만났던 화신기 수련자들에게서는 그런 경지의 느낌을 받지 못한 거죠?”
한제가 묻자 노인은 흠칫 놀라더니 머리를 긁적이며 난감한 듯 말했다.
“그건⋯⋯ 잊어버렸다. 경지를 통제할 수도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영변기에 이른 다음에야 가능한 일이니⋯⋯ 화신기 수련자들은 그저 법술을 발휘할 때에만 조금씩 사용할 뿐, 이런 경지를 발휘할 수는 없지. 히히, 유감스럽구나.”
한제는 쓰게 웃으며 노인을 힐긋 바라보다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경지⋯⋯ 이것이 경지로구나.’
노인은 시선을 돌렸다. 도둑처럼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던 그가 소리 죽여 말했다.
“화범(化凡)을 이용해 각자의 경지를 느끼고 그 경지를 통해 원영을 돌파하면 화신기에 이를 수 있다. 모든 수련자가 원영기를 돌파할 때 거쳐야만 하는 과정이지. 다른 사람의 경지를 느껴보니 훨씬 좋지 않으냐?”
한제는 눈을 번득였다. 다른 화신기의 경지를 느껴보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긴 했지만 장점 또한 컸다.
그는 노인을 바라보며 느릿하게 물었다.
“대가라도 치러야 합니까?”
노인은 눈을 가늘게 뜨며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대가? 그런 건 필요 없다. 널 데리고 이 4성 수련국을 돌아다니며 경지를 체득하게 해줄 수만 있다면 그만이야!”
한제는 말없이 상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침묵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노인은 불편한 기색이었고 머지않아 헛기침을 하더니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 이 조각상들 꽤 괜찮아 보이는데⋯⋯ 저⋯⋯.”
“좋습니다. 전부 가져가십시오.”
한제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노인은 갑자기 눈을 까뒤집더니 화가 난다는 듯 가슴을 치며 말했다.
“네놈의 이 저급한 법보를 가지고 내가 뭐에 쓰겠느냐? 완성되지 않은 저것들이야 쓸 만한 기질이 보이긴 한다만 역시 필요 없다. 이렇게 하는 게 어떻겠느냐? 날 봐라, 이렇게 소탈하고 늠름하고 용감한 사람을 보면 가슴이 뛰지 않느냐? 나야말로 저런 조각으로 남기기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냐?”
말을 잇던 노인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하지만 말을 끝마칠 무렵에는 자신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가슴까지 앞으로 내밀었다.
뜻밖의 말에 흠칫 놀란 한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하지만 지금은 제 수준이 낮아 불가능하니, 화신기에 이른 뒤에 조각해드리겠습니다.”
노인은 곧장 기뻐하며 얼른 말을 이었다.
“급할 것 없다, 급할 것 없어. 완전한 조각상을 만들어주기만 하면 되는 거야. 음⋯⋯ 그래, 내 나체를 조각한다면 더욱 완벽한 나를 남길 수 있겠구나. 그렇게 해서 여러 개를 만드는 거다. 1백 개, 1백 개면 되겠다!”
노인은 벌써부터 행복해졌다. 나중에 기생집에 가서 예쁜 기생을 만나면 자신의 조각상을 하나씩 줄 생각이었다. 그러면 그 기생들도 자신을 평생 기억하리라.
자신의 조각상이 미녀의 품에 안긴 모습을 상상하니 노인은 흥분이 됐다. 볼수록 한제가 마음에 든다고 생각하며 그는 손을 뻗어 한제를 붙잡고 동시에 가게 안에서 사라졌다.
★ ★ ★
그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수도에서 10만 리 떨어진 곳의 구름 위였다.
한제는 신식으로 사방을 살피고는 깜짝 놀랐다. 단번에 10만 리에 달하는 거리를 순간이동으로 움직이다니, 충격이었다. 노인의 힘에 한제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원영기 후기인 자신의 힘만으로는 1천 리가 한계였다. 화신기에 이른 뒤에는 어느 정도까지 순간이동을 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결코 10만 리에 이르지는 못할 터였다.
한제는 영변기 수련자라도 이렇게 가볍게 10만 리를 순간이동할 수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더구나 노인은 혼자가 아니라 자신을 데리고 이 정도 거리를 이동했다. 생각할수록 두려운 힘이었다.
허나 노인은 이내 숨을 헐떡였다. 10만 리를 이동하는 것이 역시 쉬운 일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는 한제의 놀란 얼굴을 보고 얼른 득의양양하게 턱을 들어 보였다.
“아, 나이를 먹어서 힘이 빠졌나? 고작 10만 리밖에 이동하지 못하다니, 부끄럽구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세 살 먹은 아이라도 노인이 으쓱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한제는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노인은 숨을 돌린 뒤 성을 내듯 말했다.
“너 이전에 이렇게 먼 거리를 순간이동해본 적 있냐?”
“없습니다.”
한제가 솔직히 답했다.
“그런데도 왜 놀란 티도 내지 않는 것이냐?”
노인이 한제를 노려보았다. 자신의 힘을 찬양하지 않는 한제가 원망스러운 모양이었다.
한제는 무심한 얼굴로 노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선배님의 수준은 제 평생 봐온 모든 수련자를 통틀어 가장 뛰어납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가볍게 콧방귀를 뀐 노인이 으쓱하며 말했다.
“다음에는 1백만 리를 이동해주마.”
그러더니 먼 곳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기가 백운종이다. 가자. 내가 널 대신해 저 종파를 건드려줄 테니.”
한제는 잠시 망설이다가 노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선배님, 이대로 바로 가는 겁니까?”
노인이 오른손을 흔들자 그의 손에 두 개의 밀짚모자가 나타났다. 그중 하나를 한제에게 넘긴 그가 말했다.
“써라. 너보다 경지가 두 단계 이상 높은 자가 아니라면 너를 꿰뚫어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아끼는 것이니 쓰고 난 다음에는 돌려줘야 한다!”
밀짚모자를 받아 든 뒤 신식으로 살핀 한제는 내심 매우 놀랐다.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는 밀짚모자였지만 실상은 놀라웠다.
밀짚모자 안에는 수없이 많은 진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진의 정밀도는 여태 보지 못한 수준이었다. 상고 시대의 금제에 비해도 결코 떨어지지 않았다.
그나마 가장자리의 진만 겨우 파악했을 뿐, 그 중심은 한제의 신식으로는 단시간에 꿰뚫어 볼 수가 없었다.
한제는 절대로 이 모자를 돌려주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천 개의 조각상을 더 만들어주는 한이 있더라도 돌려주지 않을 작정이었다.
노인이 모자를 쓰자마자 금색 빛의 고리가 드리워졌다. 한제가 그것을 신식으로 훑자마자 그 금색 빛의 고리가 마치 하나하나의 예리한 칼날처럼 그의 신식을 깊게 찔러왔다.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한숨을 내쉰 한제는 절대로 돌려주지 않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 번 다지며 밀짚모자를 썼다.
노인은 한제를 힐긋 바라본 뒤 오른손으로 기이한 결인을 그렸다. 그러자 저 멀리 허공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났고 주위의 영력이 미친 듯이 몰려들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림자는 실체를 갖추더니 금색 갑옷 차림에 손에는 검을 든 거인의 형상으로 바뀌었다. 거인의 얼굴은 흉악했고 눈빛은 거칠었다. 그의 거친 시선은 노인의 손이 가리킨 곳을 향했다.
“금자 때려 부숴라!”
노인의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금자라 불린 거인은 검을 휘둘렀다. 순간 태양처럼 눈부신 한 줄기 금빛이 하늘을 가르며 허공에 물결과 같은 파문을 일으켰다.
파문은 갈수록 거대해지면서 쾅 소리와 함께 파편이 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거인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천천히 사라졌다.
노인은 불만족스럽다는 듯 몇 마디 중얼거렸다. 한제는 노인이 그 거인을 욕하는 것을 어렴풋이 들을 수 있었다.
파편이 흩어진 순간, 가벼운 영력의 기운이 그 그림자 사이에서부터 고리 형태로 퍼져갔다.
파멸적인 위력이 깃든 그 거대한 힘에 한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때, 노인이 오른손을 휘두르자 한제 앞에 빛의 장막이 생겨났다.
노인은 확산되며 다가오는 고리 형태의 빛에도 즐거운 표정이었다.
파문의 확산이 끝나자 그림자가 있던 곳이 뒤틀리더니 하얀 구름 위에 장관이 펼쳐졌다. 수많은 누각이 드러났고 일곱 빛깔의 빛이 그 누각들로부터 뿜어져 나왔다. 한제가 초나라에서 보았던 것보다 몇 배는 더 아름다웠다.
특히 그 누각들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대했다. 순간 성난 듯한 여러 목소리들이 그 누각에서 흘러나오는가 싶더니 수십 개가 넘는 강한 기운이 쏘아지듯 튀어나왔다.
한제는 그쪽을 신식으로 훑었다. 강한 기운들 속에 원영기 수련자들이 있었다. 수십 갈래의 기운 중 원영기 수련자의 것은 서른 개 정도였고 나머지는 모두 화신기 수련자들의 것이었다.
한제는 긴장감과 경계심이 곤두섰다. 겨우 일개 종파에 이렇게 많은 실력자들이 있다니, 역시 4성 수련국이었다. 3성 수련국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이들의 종파 하나로도 3성 수련국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수련자들은 밖으로 튀어나와 한제와 노인을 둘러싼 부채꼴 대형을 이루었다. 그들은 모두 흉흉한 표정으로 한제와 노인을 훑으려 신식을 펼쳤다.
한데 그중 절반 이상은 놀란 듯 눈을 홉떴다.
한제는 그들의 신식이 자신과 노인을 훑은 순간 밀짚모자로부터 대량의 금빛이 뿜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이 금빛에 닿은 신식은 뜨거운 용암에 닿은 눈처럼 순식간에 녹아 사라졌다.
노인은 한손으로 결인을 그렸다. 그러자 순간 모자에서 금색 빛이 발산되면서 금빛 날개를 가진 봉황의 허상이 나타났다. 봉황이 날개를 펼쳐 퍼덕이자 그들을 둘러싼 수련자들의 신식이 전부 흩어져 사라져버렸다.
몇몇 수련자는 신음을 흘리며 휘청거렸다. 표정도 잔뜩 굳어 있었다.
그때, 검은 도포를 입은 중년 문인이 날아올랐다. 그의 얼굴은 핏기없이 창백했으며, 눈에는 어떤 빛도 남아 있지 않아 오히려 한제와 비슷하게 흑백이 또렷하게 구분되어 보였다. 범상치 않은 느낌이었다.
앞으로 나온 그는 포권을 취한 뒤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