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206
노인은 그 별거 아니라던 영패를 꺼내 줄줄이 소개했다. 마치 아끼는 장난감을 자랑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마지막으로 노인의 손에 들린 것은 텅 빈 영패였다.
“어떤 문파의 영패든 만들어줄 수 있다. 지금까지 팔아먹은 것만 해도 몇 개인지 셀 수 없을 정도니까. 내가 어디 없는 말 하더냐. 하나 살래? 백운종 장문인의 영패가 어떠냐?”
한제는 침묵한 채 노인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노인은 한제의 뒤통수에 대고 한참 동안 소리를 질러대다가 중얼거리며 영패들을 도로 챙겨 넣었다.
“다 판매할 상품들이다, 이 자식아. 물건도 알아볼 줄 모르면서… 내가 파나 봐라!”
말년
가게로 돌아온 한제는 화로 옆에 가부좌를 틀었다.
사방이 고요했다. 이 적막 속에서 한제는 세 화신기 수련자의 서로 다른 경지들을 떠올렸다.
중년 문인이 발휘한 무정의 경지, 노파가 발휘한 안일의 경지, 푸른 옷의 노인이 발휘한 세월의 경지가 하나하나 한제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점차 한제는 이 경지가 각자의 다른 인생에 근거해 천도를 깨우치면서 얻어진 것임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나의 경지는 대체 뭐가 될까?’
한제는 눈을 감았다. 한참 뒤 다시 눈을 번쩍 뜬 그는 목재 한 조각과 조각칼을 들었다.
나무 부스러기가 흩날렸다. 조각칼을 쥔 손은 쉬지 않고 물 흐르듯 움직였다. 점차 한쪽 손으로 결인을 하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한제는 완벽히 집중하고 있었다. 이 순간, 그 어떤 것도 한제의 정신과 마음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 그의 눈이 보고 있는 것은 모두 중년 문인의 무정의 경지였다.
한제의 손은 점점 더 빨라지더니 칼의 잔영만 보일 지경에 이르렀다.
한참 뒤, 한제의 손이 우뚝 멈췄다. 그의 손에 들린 조각칼이 팅 하는 소리와 함께 중간에서 부러져 버렸고 부러진 칼 조각은 옆의 목재 선반에 박혀 웅웅 소리를 냈다.
한제는 날아간 조각칼 따위에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의 눈은 오로지 조각상을 향하고 있었다.
조각상은 모습을 갖춘 상태였다. 오른손으로 결인을 한 채 온몸에서 무정한 기운을 풍기는 중년 문인의 모습에서는 생동감이 넘쳤지만 그 기운은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고 안으로만 파고들었다.
한제는 천천히 두 눈을 감고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손에 쥔 중년 문인의 조각상을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았다.
“뭔가가 모자라.”
한제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 차이는 무정의 경지에 있었다. 자신의 깨달음을 흉내 내서 조각을 완성할 수는 있었으나 중년 문인의 진정한 무정의 경지와는 분명 차이가 있었다.
한제는 부러진 조각칼을 바라보며 잠시 침묵하다가 오른손을 휘둘렀다. 부러진 조각칼은 정확히 옆에 있는 선반에 떨어졌다.
잠시 후 한재는 새 목재와 조각칼로 다시 무언가를 조각하기 시작했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 눈 깜짝할 사이에 또 10년이 지나갔다.
그동안 한제는 노년에 접어들었다. 귀밑머리가 희끗해졌고 꼿꼿했던 몸도 약간 굽기 시작해서 딱 봐도 늘그막에 이르렀다.
그의 가게에는 조각이 갈수록 줄었다. 지난 10년간 그가 완성한 것은 딱 하나, 백운종의 노파 조각상뿐이었다.
사실 노파의 나무 조각은 9년 전에 이미 완성된 상태였다. 중년 문인의 조각과 마찬가지로 약간 차이가 있어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한제는 자신이 화신기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차이가 발생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한제가 이후 9년 동안 다른 조각을 하지 못한 것은 그 푸른 옷의 노인 때문이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나무 조각에 그 노인이 가진 세월의 경지의 흔적을 새길 수가 없었다. 9년, 장장 9년 동안 그랬다.
그간 만들어낸 푸른 옷 노인의 조각상은 셀 수 없이 많았지만 그중 세월의 경지를 담아낸 것은 하나도 없었다. 한재는 그 모든 조각상을 재로 만들어 없애버렸다.
한제는 손에 든 푸른 옷의 노인 조각상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손이 조각상을 문지르자 그 조각상은 순식간에 재로 변해 흩어졌다.
한참 침묵하던 한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가게의 문을 열었다. 부드러운 햇빛이 쏟아졌다.
한제는 나무 의자 하나를 들고 문 앞에 앉아 가만히 행인들을 바라보았다. 맞은편의 대장간은 지난 9년 동안 몇 배는 더 확장된 상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네 살짜리 꼬마가 대장간에서 고개를 쏙 내밀고 한제를 바라보더니 씨익 웃었다. 짧은 다리를 놀려 한제 곁으로 달려온 아이의 작은 손에는 술주전자가 하나 들려 있었다. 아이는 그것을 한제에게 건넨 뒤 귀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할부지, 할부지 위해서 몰래 가져온 술이에요. 사탕은요?”
한제는 빙그레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오른손을 휙 휘둘렀다. 순간 그의 손에 손톱만 한 크기의 약이 나타났다. 아이는 얼른 그것을 받아먹었다. 한제는 주전자를 들어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아이가 두 손으로 턱을 받치고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할부지, 술 맛있어요? 매일 마시네요.”
한제는 미소를 지었다.
그때 대장간에서 한 사내가 나왔다. 그는 한제를 보더니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다가와 질책하는 듯한, 하지만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삼촌, 오늘은 더 마시면 안 될 텐데?”
한제는 허허 웃으며 말했다.
“그래, 한 모금만 더 마시고 그만 마시마! 대우야, 아버지는 좀 어떠냐?”
대우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
“고질병이지 뭐. 괜찮아.”
한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일반인의 삶에 그가 간섭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생로병사 역시 천도(天道)의 일부분이었다.
대우는 6년 전 재봉소 조 사장의 딸과 결혼을 했다. 옆에 있는 꼬마는 대우의 아이였다.
“할부지, 아직 대답 안 했잖아요. 술 맛있어요?”
아이는 한제의 팔을 잡아당기며 재차 물었다.
대우는 한제를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네 할아버지가 마시는 건 술이 아니라 인생이란다.”
한제는 고개를 돌려 대견하다는 눈으로 대우를 바라보며 그의 팔을 두드렸다.
“산책 좀 하고 오마.”
대우는 한제의 손에 들린 술주전자를 빼앗듯 받아들더니 한제의 가게 안에 넣고는 문을 닫았다.
“삼촌 분명 약속했어. 오늘은 더 마시지 않기로!”
한제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길가로 향했다. 약간 비틀거리며 걷는 그의 뒷모습은 영락없이 노년에 접어든 자의 모습이었다.
대우는 한숨을 내쉰 뒤 아이의 손을 잡고 대장간으로 돌아갔다. 아이는 입을 오물거리며 기쁜 듯 대우에게 말했다.
“아빠, 할부지가 사탕 줬어. 맛있어. 이 사탕은 먹으면 온몸이 따뜻해져.”
한제는 자신이 10년 넘게 살아온 길을 걸었다. 길에 붙은 가게의 사장들은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길가로 뛰어나와 한제에게 죽는소리를 했다.
“이 사장님, 장사가 워낙 안되어서 말입니다. 다음 달, 다음 달에는 꼭 임대료를 드리겠습니다!”
3년 전 이사 온 잡화점 사장이 하는 말이었다.
“그렇습니다, 영감님. 요즘 일이 너무 안 됩니다. 며칠만 더 시간을 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객잔 오 사장이 거들었다.
그와 비슷한 말들이 계속해서 쏟아졌다. 한제는 쓴웃음을 지으며 한 바퀴를 돌았다. 그 역시 어찌 된 일인지 알 수 없었으나, 지난 10여 년의 세월 동안 이 길에 있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 그에게서 돈을 빌려갔다. 대부분은 가게를 담보로 했던 탓에 지금 이 길에 있는 대부분의 건물은 결국 그의 것이 되었다.
한제 자신의 가게는 본래의 주인이 2년 전에 나타나더니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을 부르며 한제에게 팔아넘겼다.
이제 한제는 길을 나서기만 하면 가게 사장들이 뒤따라와 듣기 좋은 말들로 떠드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는 한제가 드물게 외출을 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심지어 몇 개월 동안 두문불출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그가 모습을 드러내기만 하면 여러 사장들은 그가 임대료를 재촉할까 봐 겁이나 긴장하곤 했다.
사실 그들이 지불해야 할 돈은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에 오래 살던 사람들은 한제의 온화한 성격을 알고 있기에 최대한 지불을 늦추기 위한 수작을 부리고 있었다. 때문에 임대료를 지불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이런 상황은 습관화되어갔다. 사람들은 돈이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한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천도의 일부라고 여겼다.
지난 9년간 많은 일이 있었고 이 길에 사는 사람 중 낯익은 이는 이제 많지 않았다. 한제는 그게 안타까웠다.
그는 손을 저으며 곁에 있는 사장들에게 말했다.
“오늘은 임대료 받으러 온 게 아니니 다들 물러가게.”
사장들은 한시름 내려놓으며 그의 곁을 떠나갔다.
한제는 뒷짐을 진 채 길을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길 입구에 이르렀을 때, 커다란 말 한 마리가 질주하듯 달려왔다. 말 위에는 한 중년 남자가 타고 있었는데 입가에서는 피가 흘렀다.
그는 한제를 보고 오른손으로 세차게 말고삐를 당겼다. 말이 히히힝 하고 멈추자 중년 남자는 그 위에서 훌쩍 뛰어내려 한달음에 한제에게 다가와서는 무슨 말을 내뱉기도 전에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 피에는 내장 조각들도 섞여 있었다. 사내는 핏기 하나 없는 얼굴로 몸을 휘청거리더니 바닥에 쓰러져서는 다급하게 외쳤다.
“이 선생님, 살려주십시오!”
한제는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담담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눈앞의 사내는 10년 전부터 새해가 될 때마다 적지 않은 돈을 가져다준 서도였다.
“무슨 일인가. 천천히 말해보게.”
한제가 말했다.
“선생님, 세자마마께서 위독하십니다!”
서도가 다급하게 쏟아내는 말을 통해 한제는 점차 사건의 경위를 알아갔다. 세자가 누구를 건드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자는 굉장한 신통력을 가진 자였고 그가 나타나자 세자 곁에 있던 수련자들이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지금 세자는 황궁에 숨어 있었고 상대 수련자는 뭔가 두려워하는 게 있기라도 한 듯 황궁으로 들어가지는 않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세자의 시종들에게 쏟아붓고 있었다.
영민한 서도는 상황이 좋지 못한 것을 보고 곧장 그 자리를 떠났지만 그 수련자의 일격에 중상을 입은 상태였다. 겁에 질리고 당황한 상태에서 그가 떠올린 것은 단 하나, 한제였다.
그때, 길 바깥쪽에서 붉은 도포를 입은 젊은 수련자 하나가 방자한 기운을 띤 채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를 본 서도는 몸을 벌벌 떨며 또 한 차례 피를 토해냈다. 잔뜩 풀이 죽은 그는 겁에 질린 눈으로 한제를 바라보며 말했다.
“살려주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