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210
이에 한제 역시 따로 손을 쓰지 않고 그저 일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대로 두었다. 그가 도울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앞으로 증문탁이 어떻게 발전을 하든, 어느 길을 어떻게 걷든 한제는 더는 신경 쓰지 않을 작정이었다.
이상한 눈
대우는 심부름꾼을 몇 명 고용했다. 이는 아버지의 철칙을 깨는 일이었다. 당시 그의 아버지는 증 씨네 대장간은 기술을 파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 다른 사람을 고용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자신들의 기술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는 것은 자신의 발등을 찍는 것과 다름없다고도 했다.
하지만 대우는 아버지의 철칙을 깨고 일꾼들을 고용한 뒤, 더 이상 대장간 일에 신경 쓰지 않고 마치 소년 시절로 돌아간 듯 온종일 한제의 곁에서 그가 조각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매일 곁에서 시중을 드는 이 중년 사내 덕분에 한제는 이전의 기억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대우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부터 새해가 될 때마다 아내와 함께 한제에게 상을 차려주곤 했다. 마치 한제를 자신의 아버지로 여기는 것처럼…
대우의 아내인 재봉소 딸은 지혜롭고 어진 여인으로 남편의 마음을 잘 헤아렸다. 그녀 역시 한제를 마치 자신의 시아버지처럼 여기곤 했다.
이에 한제는 노년기에 접어들었을 때 전에 없는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따뜻함은 그에게는 낯선 것이었지만 결코 싫지는 않았다.
서도 역시 이미 중년이 된 상태였다. 희끗희끗 머리가 세기 시작한 그는 이제 왕의 참모 총관이었다. 그가 모시는 왕은 당시의 그 세자였다.
세자가 왕위를 물려받은 뒤로 해마다 한제에게 보내는 선물은 더 늘어났다. 게다가 거의 매번 직접 찾아와서는 왕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꿇어앉아 이마를 찧어가며 절을 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한제는 내심 그 왕에 대해 탄복했다. 어쨌든 그는 일반인들 사이의 황족이었다. 그런 그가 이런 한결같은 모습을 보이는 것은 엄청난 끈기와 의지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그가 한제를 이렇게 극진히 대하는 것은 그와 좋은 관계를 맺음으로써 평안을 얻기 위해서일 뿐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해 겨울, 한 차례 큰 눈이 내렸다. 지난 30년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만큼 많은 눈이었다. 수도 전역이 눈으로 된 두꺼운 이불을 덮은 모양새였다. 처마와 나무 등은 서너 살 아이의 키만 한 높이의 눈으로 덮였다.
적지 않은 집들이 그 엄청난 눈에 폭삭 주저앉았고 심지어 몇몇 거지들은 길거리에서 얼어 죽기까지 했다. 거의 매일 아침마다 사람들은 수도 구석에서 잔뜩 웅크린 채 얼어 있는 시체 한두 구를 발견했다.
참으로 이상한 눈이었다. 수도 안의 사람들은 객잔에 앉아 떠들어댔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수도에 이렇게 많은 눈이 내린 적은 없다고…
눈은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하늘에서 천천히 날리다 땅에 떨어진 눈은 사람들의 발에 밟히면서도 천천히 쌓여 곧 그 발자국도 묻어버렸다.
수도의 점포 대부분은 어쩔 수 없이 문을 닫았다. 본래도 구석진 곳이라 인기척을 찾기 어려웠던 한제의 가게 골목은 눈을 씻고 봐도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화로 옆에 앉아 눈이 그치기만을 기다렸다.
확실히 이상한 눈이었다. 이 눈이 처음 내리기 시작한 순간부터 한제는 이 눈에 미약하게나마 살기가 깃들어 있음을 알아차렸다. 살기는 얕았지만 이 눈은 4파 연맹국 전역에 걸쳐서 내리고 있었으니 눈이 품은 살기는 사실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갑자기 엄청나게 추워진 것 또한 이 살기 때문이었다.
이 눈은 하늘이 아니라 허공 높은 곳 어딘가에서 조용히 나타난 존재였다.
눈이 내린 지 사흘째 되던 날, 수도 중앙에 있는 아홉 개의 검은 나무가 갑자기 내리친 거대한 벼락에 둘로 갈라져 버렸다. 그 안에 있던 수련자들은 피할 틈도 없이 모두 목숨을 잃었다. 뿐만 아니라 같은 시각, 4파 연맹국 안의 모든 수도에서 같은 일이 일어났다.
뒤이어 하늘에서는 거대한 눈뿐만 아니라 사방에서부터 수많은 옥패가 날아들었다. 이 옥패는 온 4파 연맹 안을 매우 빠르게 질주했고 축기 이상의 수련자를 만나면 그 손에 떨어졌다.
한제는 가게 위를 그냥 스쳐가려 한 옥패를 강제로 끌어당겼다.
옥패를 쥐고 신식으로 살핀 한제는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음침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우리 4파 연맹 국경 내의 수련자들이여, 전쟁 준비를 하라. 수묵문(水墨門), 백운종, 청목애(靑木崖), 흑혼파(黑魂派), 네 개의 문파는 대문을 열고 각지의 산(散), 마(魔), 고(苦) 세 종류의 수련자들을 소환하라. 돌아오지 않을 경우 그 결과에 대해서는 알아서 책임져야 할 것이다!”
한제는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그 옥패를 꽉 쥐어 부숴버린 뒤, 순식간에 가게 안에서 사라졌다.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수도의 상공이었다. 그는 몸을 훌쩍 날려 계속해서 위쪽으로 날아올랐다. 곧 상공 1만 리 지점에 이른 그는 끝없는 눈의 출처를 찾았다. 그 눈은 허공에서 조용히 나타나 땅으로 내리고 있었다.
한제는 그곳을 한참 살핀 끝에 실마리를 찾아냈다. 그 허공의 여러 곳에서 무언가를 숨기는 작용을 하는 금제의 파문이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금제라면 한제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 그는 오른손으로 두 눈을 쓱 문질렀다. 순간 한 줄기의 어스름한 빛이 그의 눈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 상태로 허공을 한참 주시하던 한제는 두 손을 연이어 흔들었다. 잠시 후 잔영의 원들이 그의 손에서 줄기줄기 흘러나왔다.
잔영의 원은 어느 허공에 이르더니 점점 하얀 연기를 피워 올렸다. 마치 얼음이 뜨거운 불에 의해 기화되는 것처럼 허공에서 나타나는 흰색 연기는 천천히 짙어졌고 한참 뒤 차차 흩어지면서 그 아래에 숨겨져 있던 진면목이 드러났다.
그것을 본 한제의 표정이 크게 변했다.
1만 리 상공의 허공에는 약 1백 척 길이의 거대한 공간의 균열이 나 있었다. 끝없는 눈은 바로 거기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제는 신식으로 그것을 훑어보았다. 수만 리 반경에만 해도 그런 균열을 포함하고 있는 금제는 1백 개가 넘었다. 4파 연맹 국경 안에는 이런 균열이 수도 없이 많을 것 같았다.
또한 그는 이 공간의 균열에 마치 신식을 흡수하는 듯한 힘이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다행히 그의 신식은 충분히 강해 그 흡입력을 가볍게 떨쳐버릴 수 있었다.
한제는 한참 고민하다가 경거망동하지 않고 가게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동안 본 것은 끝없는 눈뿐이었다.
가게 안으로 돌아온 한제는 뭔가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그 느낌은 거대한 공간의 균열을 본 순간부터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한참 동안 고민하던 그는 돌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이곳은 4파 연맹국의 국경 안이었다. 자신이 조바심을 낼 필요는 없었다. 자신보다 강한 수련자가 알아서 처리할 일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지만 허공에 나타난 공간의 균열은 마치 그림자처럼 한제의 마음을 떠날 줄 몰랐다.
돌연 한제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가게의 대문을 바라보았다. 한참 뒤, 똑똑 하고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그 소리는 박자를 타는 듯 똑같은 시간 간격으로 들려왔다.
한제가 오른손을 휘둘러 소리 없이 가게 문을 열어 보니, 도롱이를 입은 키 큰 남자가 서 있었다. 온몸에 눈이 두껍게 쌓인 그는 말없이 성큼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한제는 상대를 보자마자 덤덤하게 말했다.
“10년 만이군. 별일 없었나?”
상대는 하하 웃으며 도롱이를 벗었다. 엄숙한 얼굴이 드러났다. 두 귀가 가장 눈에 두드러졌다. 상대는 큰 귀의 수련자 주무태였다.
그는 벗어 든 도롱이를 툭툭 털었다. 그 위에 쌓여 있던 눈이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실려 날아갔다. 한제 가게 안에는 눈송이 하나 남지 않았다.
도롱이를 한쪽에 내려놓은 무태는 한제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그가 자리에 앉은 순간, 가게의 문이 조용히 닫혔다.
자리에 앉은 무태는 곁에 있던 술주전자를 들더니 주둥이에 입을 대고 꿀떡꿀떡 들이켰다.
한제는 말없이 상대를 훑어보았다. 10년 전보다 미간에 주름이 늘어 있었다. 지난 10년간 무언가에 조바심을 낸 모양이었다. 그의 수준은 10년 전에 비해 한층 더 성장했지만 한제에 비해서는 약간 떨어졌다. 한제가 체득한 윤회(輪回)의 천도가 그에게 더욱 깊은 깨달음을 선사한 모양이었다.
무태는 술을 거하게 들이켠 뒤 멀지 않은 의자 위에 있던 세 개의 조각상을 바라보았다. 백운종의 세 사람의 조각상이었다. 무태가 지난번 왔을 때만 해도 두 개뿐이었는데 지금은 하나가 늘어 있었다.
무태의 눈은 그 새로운 조각상에 고정됐다. 점차 그의 눈빛에 놀라움이 차올랐다. 그가 손을 휘둘러 그 조각상을 끌어당기더니 한참 동안 자세히 살폈다. 그러더니 그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복잡한 심경이 담긴 눈으로 한제를 쳐다보았다.
한참 뒤, 그가 작은 한숨을 내쉬며 쓰게 웃었다.
“과연 도우가 나보다 한 발 빨랐군. 난 지난 10년간 제자리걸음이었네.”
한제는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손을 한 번 흔들어 또 하나의 술주전자를 소환해냈다. 술을 한 모금 마신 한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우연의 일치일 뿐이지!”
탄식하던 무태는 고개를 숙여 그 조각상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청송 사숙의 세월의 경지를 조각해냈군. 이 조각상은 이미 원영기에 이른 최고의 법보라고 할 수 있지. 도우가 단 10년 만에 이렇게 진보했으니 탄복할 수밖에!”
한제는 소리 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마음에 든다면 가지시게!”
흠칫 놀란 무태의 눈빛은 더욱 복잡해 보였다. 한제를 힐끗 본 그는 다시 조각상을 살피다가 한참 망설인 끝에 저물대에서 옥패 하나를 꺼내 한쪽에 내려놓은 뒤 말했다.
“고맙네!”
무태는 한제에 대한 적의가 줄어드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훌륭한 법보를 사심 없이 주다니, 어지간해서는 베풀 수 없는 자비였다. 그는 이 조각상만 있다면 자신이 진정한 세월의 경지를 얻지는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깨달음은 얻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는 쉽사리 선택을 내리지 못했다. 그가 원하는 깨달음과 이 조각상에 배인 세월의 경지는 차이가 꽤 컸다. 당연히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한참 뒤, 그는 고개를 들어 한제를 바라보더니 다시 쓰게 웃었다.
“이 조각상은 필요 없네. 내게는 나의 길이 있으니… 이 옥패는 도우에게 주겠네. 여기에는 화신기의 신통술 하나가 기록되어 있지.”
한제는 기이한 표정으로 무태를 살폈다. 그가 무태에게 조각상을 준 것은 다른 뜻이 있기 때문이었으나, 겉으로 보기에는 세월의 경지를 깨달을 기회였다. 그러나 무태는 그 기회를 포기하고 자신이 선택한 화범의 깨달음을 유지하겠다고 결심했다. 한제가 지난 수백 년간 봐온 사람 중에서도 그런 굳은 마음을 가진 자는 많지 않았다.
한제는 웃음을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렇다면 실례하겠네.”
한제는 무태가 준 옥패를 신식으로 살핀 후 한쪽에 내려놓았다.
무태는 못내 아쉽다는 눈으로 조각상을 힐끔 보더니 이를 악물고 억지로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약간 어두운 안색으로 말했다.
“도우, 최근 내리는 눈에서 수상한 점을 발견한 게 있나?”
한제는 잠시 고민하다가 술주전자로 시선을 돌리며 조용히 말했다.
“이 눈은 분명 하늘에서 내리는 눈이 아니네.”
무태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렇지. 이 눈에는 살기가 깃들어 있어. 온 4파 연맹이 이 눈으로 뒤덮였네. 그 눈에서 풍기는 살기가 이미 하늘을 찌를 지경이야.”
한제의 표정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마치 자신과 무관한 일이라는 듯한 모습이었다.
설역(雪域) 수련자
무태는 한제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네 개의 문파에서는 몇몇 선배를 보내 조사 중이네. 그리고 마침내 1만 리 상공에서 금제로 숨겨진 설역(雪域) 수련자의 전송 균열을 발견했지!”
“설역?”
처음 듣는 단어였다.
무태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
“설역 역시 4성 수련국이지. 북쪽 끝의 얼음으로 뒤덮인 곳으로 그곳 수련자들은 눈과 얼음 관련한 신통술에 능하다네. 설역국에서 다른 수련국을 침범할 때는 일단 전송진을 발동해 상대 국가를 얼음과 눈으로 뒤덮은 후에 대대적으로 출동한다네.”
말을 마친 무태는 허공에서 오른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가게 문에 열리며 눈덩이 하나가 날아왔다. 무태는 그것을 손에 쥔 채 다른 손으로 결인을 했다. 순간 주먹만 한 불꽃이 나타나 열기를 뿜어냈다.
“보시게!”
무태는 불꽃 위에 눈덩이를 올려두었다. 한데 놀랍게도 연기가 사방으로 퍼지며 불꽃이 꺼졌고 눈덩이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대로였다.
한제 역시 놀란 눈치였다. 그로서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이 눈은 녹지 않는다네. 4파 연맹의 모든 땅이 눈으로 뒤덮이면 설역의 수련자들이 공격해 들어오겠지.”
무태가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제는 침묵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