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213
하지만 그때마다 배후에는 주작국의 그림자가 있었다. 이번에도 설역국에서 모종의 방법으로 주작국을 설득해 묵인 아래 전쟁을 감행했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무태의 분석에 대해 한제는 한참을 고민했다. 4파 연맹국이 그의 고향은 아니지만 수도 성안의 이 골목길은 30년 넘게 지내왔던 곳 아니던가.
그는 가게 밖에 서서 하늘 가득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무태에 따르면 설역국이 정말 멸국전을 하려는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4파 연맹국에서는 이미 몇몇 수련자를 뽑아 세 개 조를 구성했다. 한 조는 우호적인 관계의 4성 수련국을 찾아가 연합을 찾았고 또 한 조는 4파 연맹국이 소속된 5성 수련국을 찾아가 지원군을 요청했으며, 마지막 한 조는 일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주작국으로 향했다. 그중 주작국으로 간 조를 제외한 나머지 두 조는 이미 돌아왔으나, 그 결과는 암담했다.
주위의 4성 수련국 대부분은 예의 바르게 4파 연맹국 사람들을 맞이했으나 전쟁에 대해서는 대답을 회피했다. 심지어 몇몇 국가에서는 아예 문을 닫고 만나주지도 않았다. 한곳에서는 그들이 속한 5성 수련국에서 이미 설역국과 4파 연맹국 사이의 일에 절대 끼어들지 말라는 지령을 받았음을 은연중에 알려주기도 했다.
5성 수련국으로 간 조도 잔뜩 가라앉은 얼굴로 돌아왔다. 5성 수련국에서는 자신들은 참여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빈손으로 돌아올 수 없었던 그 조의 수련자들은 갖은 방법을 동원해 충격적인 사실을 알아냈다. 설역국에는 주작국에서도 감히 어쩌지 못할 정도로 천부적인 자질을 가진 여인이 하나 있다는 것이다.
단 1백 년 만에 그것도 어떤 단약의 도움도 없이 화신기 후기 절정에 이른 여인은 주작성 역사상 근래 1만 년 내에 최고의 천재라고 일컬어진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녀를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주작국은 수련자를 보내 그녀의 자질을 확인하고는 주작국으로 성대하게 초청했다. 주작국이 천부적인 자질의 수련자를 초청하는 것이 종종 있었던 일이기는 했다. 다만 이 설역국 여인에게는 이례적으로 상당히 높은 신분을 부여했다고 한다.
주작국의 목적은 7성 수련국으로 발돋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7성 수련국에 이르기 위해서는 수련자의 수준 외에 다른 준비도 필요한데 주작국은 심지어 첫 번째 조건마저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 주작성에서는 이토록 뛰어난 천재에게 온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이 여인이 주작국의 요구에 따르는데 제시한 조건은 단 하나, 설역국을 5성 수련국으로 승급시키고 그 황폐하고 차가운 땅에서 다른 곳으로 이주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바로 그때, 4파 연맹국 안에서 우정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것은 한 설역국 수련자의 것으로 밝혀졌다. 설역국과 4파 연맹국 사이에 전쟁의 기미가 피어오르기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4파 연맹국으로서는 그 우정이 왜 4파 연맹국에 그것도 하필 왜 세자의 손에 나타난 것인지에 의문을 가지며 이 모든 것이 음모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이 소식에 4파 연맹국은 그야말로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
한제의 마음도 무거워졌다. 우정으로 인해 발발한 줄로만 알았던 전쟁에 이토록 깊은 내막이 숨겨져 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거의 텅 빈 골목에 서서 여러 가게들을 보고 있노라니 씁쓸했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사람이 붐비고 가게들은 이른 아침부터 분주히 문을 열었다. 한데 지금은 전쟁으로 인해 모두가 큰 영향을 받고 있었다.
수련자들은 일반인을 마치 개미나 그보다 더 낮은 존재로 여겼다. 마치 자신들도 원래는 그들과 같았음을 잊은 듯했다.
한제는 이 일에 끼어들기도 싫었고 이를 막을 도리도 없었다. 대도(大道)는 무정한 법이었다. 윤회(輪回)의 천도를 깨달은 한제의 마음은 조용히, 그러나 쉼 없이 변하고 있었다. 그는 골목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떠날 때가 됐군. 마지막 일만 마치고 곧장 떠나는 거야.”
말을 마친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가게 문을 살짝 닫았다.
두꺼운 솜옷과 가죽모자 차림에 뒷짐을 진 그는 천천히 걸었다. 그의 모습은 점점 흐릿해지다가 결국 하얀 눈으로 뒤덮인 하늘과 땅 사이의 어느 곳에선가 사라졌다.
한제는 매우 빠르게 비행했다. 도중에 수없이 많은 수련자를 마주쳤는데 그들의 얼굴은 한없이 어두웠다. 대화도 매우 적었다. 기껏해야 가볍게 목례를 하는 게 전부였다.
한참 뒤, 한재는 4파 연맹국의 동쪽 끝에 이르렀다. 그곳은 본래 빽빽한 숲이 있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았다. 있는 것이라고는 흰 눈으로 덮인 땅 뿐이었다.
이 눈밭은 정리 작업이 된 옆의 공터와 비교하면 마치 거대한 산맥 같았다. 그곳에서 풍기는 서늘한 기운에서는 절망의 냄새가 났다.
한제는 허공에서 아래에 펼쳐진 눈밭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다가 두 손으로 빠르게 결인을 그렸다. 그러자 순간 평원 위로 기이한 바람이 불었다. 그 소리는 듣는 사람을 애통하게 만드는 곡성과도 같았다.
눈은 줄곧 내렸고 바람도 계속 불었다. 마치 한없이 넓고 아득하면서 허무한 천도처럼, 끝도 없이⋯⋯.
하지만 그토록 강한 바람이 부는데도 쌓인 눈은 흩어지지 않았다. 한제는 여전히 침착한 얼굴로 가만히 허공에 떠 있었다.
점차 설원 위에 반경 1천 척 정도의 소용돌이가 나타났다. 그 소용돌이 안에서 쌓인 눈들은 천천히 양쪽으로 흩어졌다.
그러는 동안 지나가던 수련자들이 점차 주위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결국 설원 위의 소용돌이는 점점 더 커지더니 거대하고 깊은 구덩이가 됐고 그 아래로 빽빽한 나뭇가지가 드러났다.
한제는 그것을 힐끔 본 뒤 손으로 결인을 거두었다. 그의 몸이 곧장 아래로 가라앉아 소용돌이 속으로 떨어졌다. 1천 척 범위에는 수많은 나뭇가지가 가득했다. 모두 한제가 조각상을 만들 재료들이었다.
30년 전에 마련한 재료들을 거의 다 썼기에 마지막으로 조각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재료가 더 필요했다. 1만 리 이상 떨어진 여기까지 온 것은 이를 위해서였다. 이번에 찾는 재료는 최소한 1백 년 이상 된 나무여야만 했다.
소용돌이 속에서 신식으로 사방을 살핀 한제는 나뭇가지 몇 개를 잘라 저물대에 담았다.
한참 뒤, 그는 다시 위로 떠올라 또다시 옆에 소용돌이를 만들어냈고 그렇게 재료를 모아갔다. 충분한 재료를 모으는 데는 무려 7일이 걸렸다.
지난 7일 동안 이 평원은 거의 완벽하게 정리되었다. 충분한 양의 목재를 마련한 한제는 곧장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한데 이 모든 과정은 주위에 몰려든 수련자들을 통해 4파 연맹국으로 전달되었다. 그 소문을 듣고 직접 이곳에 와본 몇몇 수련자들은 한제의 수준을 확인한 뒤 공손한 태도를 갖추었다.
무태 역시 이 일을 알게 되었다. 그는 잠시 고민한 뒤 사람들을 이끌고 직접 그곳으로 가 아무 말도 없이 묵묵히 한제를 도왔다. 그러지 않았다면 겨우 7일 만에 충분한 양의 목재를 마련하기는 힘들었을 것이고 이 평원이 이렇게 말끔하게 정리되지도 않았을 터였다.
무태는 끝내 한제에게 가담해달라는 부탁은 하지 않고 그저 씁쓸한 표정으로 포권을 취한 뒤 함께 온 사람들과 떠났다.
무태는 4파 연맹국에 이미 끝이 다가왔음을 직감했다. 이제 와서 한제가 가담해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그 자신조차도 살길을 찾기 위해 깊이 고민하고 있는 중이었다.
한제는 무태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뒤 곧장 가게로 향했다.
그는 의자에 앉자마자 왼손에는 목재를 오른손에는 조각칼을 들었다.
아주 오랫동안 준비해오던 조각상이었다. 이번에 그가 조각할 것은 매우 많았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해낼 목표이기도 했다. 그의 화범 역시 이미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기에 한제는 이 마지막 조각을 통해 화신기에 올라설 생각이었다.
만약 실패하더라도 조금이나마 수준이 향상될 것이다. 그렇다면 화신기까지의 거리는 더욱 줄어드는 셈이었다. 이미 그는 천도의 깨달음을 한 번만 얻어도 곧장 화신기에 이를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가 조각하려는 것은 수련자의 길에 오른 그 순간부터 화범을 시작한 그 순간까지 자신이 죽였던 모든 사람이었다.
10년 화신
한제가 처음으로 죽인 사람은 사부인 손대주였다.
나무 부스러기와 톱밥이 날리더니 조각상이 서서히 모습을 갖춰갔다. 손대주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의 절망과 공포가 표정에 그대로 드러났다.
그 조각상을 바라보는 한제의 마음은 평온했다. 만약 당시에 손대주가 그의 조롱박에 욕심을 내지 않았다면 그렇게 죽음을 맞이할 일도 없었을 터였다. 원인과 결과는 순환하는 법이었고 삶이 있으면 죽음도 있는 것이다.
두 번째 조각상은 한 중년 남자였다. 눈에는 피에 굶주린 듯한 빛이 어려 있었고 입술이 굉장히 얇아 척 보기에도 각박해 보였다. 오른손에는 죽음의 기운을 풍기는 비검이 은은하게 빛났다. 그는 한제가 죽인 두 번째 사람이자 지묵 노인의 제자였으며 장호의 스승이기도 했다.
조각상을 힐긋 본 한제는 그것을 한쪽에 내던졌다.
세 번째로 조각한 것은 길고 긴 복수의 삶을 시작하게 만든 등력이었다.
등력과의 일이 하나하나 머릿속에 떠올랐다. 1각이 흐른 뒤, 등력을 담은 조각상이 완성되었다. 매우 준수했으나 오만하고 고고한 모습이었다. 오른손은 결인을 그리고 있었고 어두운 눈 깊숙한 곳에는 탐욕이 깃들어 있었다. 입꼬리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자신과의 악연으로 시작된 등 씨 가문의 멸문을 알고도 그가 웃을 수 있을지 궁금했다.
조각상이 하나씩 완성될 때마다 한제는 한쪽에 내려놓았고 곧 바닥은 조각상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럴수록 살기가 갈래갈래 피어나면서 점차 진해져갔고 그에 따라 가게 안의 살기도 한층 더 짙어졌다. 일반인은 모르겠으나 만약 수련자가 봤다면 한제의 가게가 한 층의 얇은 얼음으로 뒤덮여 있음을 알 수 있을 터였다.
한제는 자신의 손에 죽은 사람들을 하나하나 조각해나갔고 4백 년이 넘는 자신의 인생을 더듬었다. 마치 낯선 누군가의 인생을 들여다보듯이…
기억은 어린 소년 시절 대산파에 들어갔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자질이 부족했으나 석주 공간에서 사도환을 만나 급격히 성장하기 시작했고 그러던 와중 대산파는 현도종의 손에 쫓겨나고야 말았다. 이에 그는 대산파를 떠나 홀로 수련을 하기 시작했고 우연히 장호를 만났으며, 그의 스승을 죽인 후 등가성으로 갔다가 등력과 마주쳤다. 그때 떨어지게 된 장호는 생사조차 알 수 없었다.
한제는 도망치던 끝에 결국 등력을 죽였고 우여곡절 끝에 시음종을 통해 결명곡으로 들어갔으나, 그때의 사건으로 인생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등화원의 손에 부모님이 죽고 일가가 몰살당했으며 한제 자신의 육신은 스러졌다. 가까스로 사도환의 도움을 받아 역외 전장으로 진입한 후, 4백 년간은 힘을 키우고 복수를 위한 살육의 삶을 살았다. 그 결과 그는 무정하고 냉혈한 자가 되어갔다.
화분국과 수마해, 고대 신의 땅에서 벌어진 일들이 떠올랐다. 만마백일주살(萬魔百日誅殺) 영패로 지정된 그때는 한제 인생에서 두 번째로 많은 사람들을 죽인 시기였다.
고대 신의 땅에서 알게 된 맹타자 등의 인상은 뼈에 새겨져 잊기 어려웠다. 그곳에서 보낸 시간 동안 한제는 심신이 모두 한 차례 탈변을 겪었다.
여러 위기 끝에 고대 신의 땅에서 나온 이후, 초나라에서 원영기에 올랐고 모완과 재회했다. 그리고 4백 년간을 벼른 복수를 마침내 끝마쳤다. 이제 조나라의 등 씨 가문은 말 그대로 씨가 말랐다.
기억을 떠올리는 동안 하나하나 조각상이 만들어졌고 그의 손은 잔영을 남길 정도로 점점 빨라졌다. 머릿속에 떠오른 기억들 역시 점점 빠르게 넘어가 마침내 30년 넘게 이어져온 화범의 시간에 이르렀다. 생로병사를 따라 진행되는 한 사람의 인생이 천천히 한제에 그려졌다.
한참 뒤, 한제의 머릿속에 더 이상 떠오르는 기억은 없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단 두 글자 생(生)과 사(死) 뿐이었다.
생과 사는 윤회의 천도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종의 변화였다. 한제가 조각해낸 지난 4백 년의 살육의 결과가 죽음이라면 일반인으로서 살아온 지난 30년은 삶이었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이전에 윤회의 천도를 깨달은 그 순간, 그에게는 마치 한 층의 종이를 뚫은 듯한 인상이 남았다.
한제가 눈을 번쩍 떴을 때, 가게 안의 조각상은 이미 셀 수가 없을 정도였다. 한제의 두 눈에는 사악하고 기이한 빛이 맴돌았다. 당시 고대 신의 땅에 있던 탁삼의 눈빛과도 닮아 있었다.
그는 수많은 조각상을 바라보며 두 손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조각상들이 갑자기 진동하기 시작하며 한제의 두 손으로 모여들었다. 점차 그 수가 많아졌다. 한제의 두 손 사이에 검은색 소용돌이가 나타났고 조각상은 하나씩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마지막 조각상이 검은 소용돌이 안으로 사라진 뒤, 한제의 눈빛이 소용돌이로 향했다. 허리춤의 저물대가 저절로 열리더니 그 안에서 살기(煞氣) 어린 피 구슬 세 개가 빠져나와 소용돌이로 향했다. 그리고 마지막 구슬이 소용돌이로 들어간 순간, 한제는 두 눈을 기이하게 빛내며 두 손을 움직였다.
그 움직임에 따라 소용돌이가 형태를 바꾸어 가더니 검은색의 사각형 도장 하나로 변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도장에는 한 사람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얼굴 없이 그저 몸만 있을 뿐이었다.
이 검은 도장에는 지난 4백 년간 한제가 자행한 모든 살육이 포함되어 있었다. 죽음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셈이었다.
한제는 오른손을 검은색 도장 위에 얹었다. 검은색 도장은 천천히 체내의 원영으로 녹아들어갔다.
30년간 살아온 가게를 못내 아쉽다는 듯 둘러본 한제는 이내 오른손을 휘둘렀다. 순간 가게 안의 모든 조각상이 사라졌다.
잠시 후, 그는 가게 문을 열고 눈보라 치는 어둠을 향해 걸어 나갔다. 눈과 바람은 갈수록 거세졌다.
가게 밖으로 나섰을 때만 해도 말년의 노인이었던 그의 모습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천천히 정정해져갔고 얼굴 가득했던 주름 역시 사라져갔다. 결국 거리의 초입에 이르렀을 때쯤 한제는 다시 청년 이한제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비록 화신기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한층 더 가까워져 있었다. 생사(生死)의 경지를 파악하고 천도를 깨달은 그의 몸이 하늘로 둥둥 떠올랐다.
알 수 없는 신기한 힘이 하늘에서 뻗어 나와 그를 위쪽으로 끌어당겼다.
곧 화신기에 이를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지금 그에게는 깨달음이나 경지가 아니었다. 단지 10년간 조용히 폐관수련을 할 장소만이 필요했다. 그때면 자연스레 화신기에 이를 수 있을 것 같았다.
한제는 열 집 중 아홉 집이 비어버린 골목을 바라보았다. 지난 30년의 삶이 녹아 있는 골목이었다. 그곳의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가 모두 한제의 마음속에 또렷했다. 못내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한참이나 골목 안을 살피던 한제는 모든 것을 마음속에 깊게 새긴 뒤 서서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 ★
4파 연맹국 남쪽의 한 성에서 1만 리 떨어진 곳에는 수많은 일반인이 간단한 방한용 가옥을 짓고 살아가고 있었다. 이들은 쌓인 눈을 정리하기 위해 이곳에 소집된 일반인들로 대우 역시 이 가옥 중 한곳에 살고 있었다.
그 가옥 안에는 서른 명이 더 있어서, 그리 넓지 않은 방이 꽉 차 있었다. 대우는 여럿이 잘 수 있는 침상에 누워 멍한 눈으로 천장만 바라보았다.
그는 지금 아내와 아들 그리고 한제를 떠올리고 있었다.
과거의 모든 것은 폭설의 재난 속에 흩어져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많은 눈이 내리기 전 그는 배불리 먹고 살았고 자신의 가게에 일꾼까지 몇 명 거느린 사장이었다. 아들은 신선이 되기 위해 수련자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 골목 안에서 그는 꽤나 잘나가는 편이었다. 아내와 줄곧 금슬이 좋았고 생활은 윤택했다. 그는 한제가 더 나이가 들면 더는 조각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 그를 모실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돌아가신 지금 그에게 한제는 자신의 아버지나 다름이 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이 엄청난 눈이 모든 것을 바꾸어놓고 말았다.
그는 자신의 아내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몇 개월 전 부녀자와 아이들까지 소집된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줄곧 불안했다. 원래부터 몸이 좋지 않은 아내가 이 추운 겨울에 과연 이 험한 일을 감당해낼 수 있을까?
곁에 있는 사람들이 얼어 죽어갈 때마다 대우의 마음은 칼로 도려낸 듯 아팠다. 그들에 대한 동정심 때문이 아니라 깊은 절망감과 아내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걱정 때문이었다.
그는 아내가 이 혹독한 날씨와 일들을 견뎌내지 못하고 그의 곁에서 영영 떠나갈까 봐 걱정스러웠다.
한제 역시 걱정됐다. 그가 보기에 이미 완연한 노인에 불과했으니, 한제가 이 찬 바람에 무사할지 걱정됐다. 한제마저 떠난다면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