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218
지난 몇 년 동안 관찰하면서 한제는 이 다섯 개의 빛 덩어리가 마치 그 안에 생명을 함유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한제보다 경지가 높은 수련자라 해도 그 사실을 발견하기 어려웠을 터였다. 한제가 그 빛 덩어리에 생기가 깃들어 있음을 알아낸 것도 윤회의 천도를 깨달음으로써 생사의 경지를 파악한 덕분이었다.
이 발견 이후 다섯 개의 빛 덩어리에 대한 흥미는 더욱 커졌다.
사도환은 일찍이 석주의 출현이 당시 주작국 고수들과 다른 별에서 온 수련자들의 정탐을 야기했다고 했다. 사도환 역시 죽을 위기를 여러 차례 넘기고 육신마저 잃은 후에야 원영만 석주 공간으로 숨긴 끝에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런 일련의 변화를 겪고 여러 수련자들의 추격을 경험하며 이 석주는 영겁의 시간을 지나 결국 한제의 손에 들어왔다. 그리고 다시 5백여 년이 흘렀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이 석주의 진정한 용도를 파악하지 못했다.
일반적인 물을 영기가 깃든 물로 바꿔주는 효능은 화신기 이상의 수련자들에게는 별다른 효과를 내지 못했다. 이 구슬에서 만들어내는 영기 또한 화신기 이상이 수련자에게는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토록 수준 높은 수련자들이 석주를 차지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면 분명 무언가 있을 터였다. 시간을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이라면 그들에게도 탐날 만한 효능이겠지만 주작국과 다른 별의 첨예한 대립을 일으킬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서 한제는 이 석주에 분명 자신이 알지 못하는 뭔가가 더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사도환은 일찍이 오랜 시간에 걸친 그의 연구와 분석으로 볼 때 오행의 속성이 완전히 구비되어야만 이 석주가 정말로 주인을 알아볼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그 신통함도 더욱 두드러질 것이라고 했다.
한제는 혹시 이 다섯 개의 빛 덩어리가 그 흰옷의 여인이 데리고 있던 오행의 령과 같은 존재로 바뀌지는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어쨌든 석주 밖으로 나온 한제는 새로운 설역국의 땅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석주 공간에서 지내는 동안 한제는 천도의 윤회를 익히기도 했다.
한데 천도를 통해 깨달은 생사의 경지 때문인지 시간을 더 이용하게 하는 석주의 효능은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바깥세상에서의 5년은 석주 공간 안에서도 5년이었다.
이 점에 대해 한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 그는 자신의 수준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으며, 앞으로 딱 5년만 더 생사의 경지를 체득하면 화신기에 이를 수 있다는 점 역시 짐작하고 있었다.
한제는 자신이 화신기에 오르면 일전에 처리했던 그 화신기 중기의 노파를 다시 만난다고 해도 천벌을 사용하지 않고 맞붙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이번에 석주 공간에서 나온 것은 한제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석주에 발생한 일련의 변화가 있었다고는 해도 그 안에 머무를 수 있는 기한은 여전히 5년이었다.
한제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걸었고 물이 있는 곳에 이르렀다.
눈이 뒤섞인 바람이 불어와 한기가 느껴졌다.
한제는 한참 뒤 먼 곳으로 시선을 두었다. 그곳에는 얼음과 눈으로 뒤덮인 성이 하나 있었고 그 중심에는 30층이 넘는 거대한 얼음 탑이 있었다. 그 얼음 탑 위에 있는 둥그런 구슬이 기이한 빛을 번득였다.
한제는 이곳에서 화신기에 이를 수 있도록 5년을 숨어서 보내고 싶었다.
한제가 그 얼음과 눈으로 뒤덮인 성에 도착했을 때, 그의 모습은 일반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
설역국의 일반인들은 새로운 나라에 도착한 뒤 수련자들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성들을 하나하나 세워 올렸다.
한제는 조용히 성안에 나타나 사방에 가득한 얼음과 같은 집들을 바라보았다. 낯선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성안에 돌아다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심지어 객잔이나 술집 따위가 있는 곳에도 사람은 적었다. 그나마 사람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은 얼음 조각을 만들고 있는 곳이었다.
거의 모든 집 앞에는 정과 망치를 든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거대한 얼음을 조각하며 끊임없이 망치를 두드렸다. 조악하기는 하지만 기이한 느낌이 나는 얼음 조각상들이었다.
사람들은 대화도 거의 없었다. 각자의 목적지로 향하는 그들의 눈은 오로지 얼음 조각상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게다가 하나의 조각상이 완성될 때마다 그것을 성의 중심부에 있는 거대한 얼음 탑 밖에 함께 옮겨주었다. 그곳에 조각상을 두면 얼음 탑에서는 누군가가 나와 그것들을 가지고 안으로 들어갔다.
한제는 이곳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를 힐끔거리는 사람들도 점점 많아졌다. 한제는 가볍게 한숨을 내쉰 뒤 몸을 돌려 구석진 자리에서 사라졌다.
★ ★ ★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1년이 지나갔다. 그동안 한제는 온 설역국을 돌아보았다. 거의 모든 성에 들어가 한 바퀴를 돌아보아도 그에게 신경을 쓰는 사람은 없었다. 그의 차림이 설역국 일반인들과 전혀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독특한 가죽과 풀로 만든 옷에 털가죽으로 만든 모자를 쓰고 있었다.
1년 동안 한제는 점차 설역국을 알아가게 됐다. 설역국 일반인들의 삶에서 유일하게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일은 설역국 수련자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뿐이었다. 얼음 조각상을 만드는 것도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로 바꾸기 위해서였다.
설역국 일반인들에게 황족이란 없었다. 각각의 성은 강력한 수련자의 소유였다.
얼음 조각상이 어떤 용도인지 한제는 알고 있었다. 완성된 얼음 조각상에는 전담 수련자가 진을 새겼고 모종의 특수한 방식으로 마치 시체 인형과 같은 존재로 만들기까지 했다. 그 방식에는 설역국 수련자가 다루는 공법의 정수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한제는 이를 연구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는 못했다.
이 얼음 조각상 꼭두각시 대부분은 설역국에 남지 않고 다른 나라에 판매되었다. 얼음 조각상이 발휘하는 수준에 따라 그 가격도 달라졌다.
가장 비싼 얼음 조각상은 원영기 수준이었다. 원영기 수준의 꼭두각시는 모든 성 안에서도 매우 드물었고 만드는 데 실패율도 굉장히 컸다. 그 다음으로 비싼 것은 당연하게도 결단기 수준의 얼음 조각상이었다.
화신기 수준의 얼음 조각상 꼭두각시는 한제도 아직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어쩌면 만들 수 없는 것인지도 몰랐다.
지난 1년 동안 한제는 몇몇 4성 수련국이 수백 개의 얼음 조각상을 사는 것을 총 세 번 목격했다.
그 얼음 조각상들은 얼음과 눈으로 뒤덮인 나라의 근본이자 대량의 물자를 획득할 수 있게 하는 중요 수단이었다. 뿐만 아니라 원래 4파 연맹국의 땅이었던 이곳에 존재하는 모든 영맥도 일반인들 손에 채굴되고 있었다.
말하자면 이 설역국에서 일반인은 노예나 다름이 없었다. 그들이 행하는 모든 노동은 수련자들을 위한 봉사였다. 하지만 한제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이를 영광으로 여기기까지 한다는 것이었다. 피곤해 죽을지언정 원망의 말은 한 마디도 없었다.
게다가 모든 성에서 가장 강력한 수련자를 조각한 얼음 조각상을 손에 가지고 있었다. 일이 아무리 힘들어도 심지어 죽음을 앞둔 순간에도 그들은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작은 얼음 조각상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정성을 다해 기도를 올렸다.
이런 여러 일들 때문에 한제는 이 설역국에 기이한 느낌을 가지게 됐다. 이 나라는 사방에 쌓여있는 눈과 얼음처럼 어떤 생기도 활력도 없었다. 곳곳에 공허하고 음울한 분위기만 가득할 뿐이었다.
한제가 선택한 곳은 어느 작은 마을이었다. 그는 비록 이 나라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얼음 조각상 꼭두각시를 제작하는 데 들어가는 신기한 법술에 대해 강한 흥미를 느꼈다. 자신이 만들어오던 나무 조각상에 그 법술을 적용시킬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생기도 활기도 없는 일반인들의 기이한 상태가 자기 체내에 자리한 생사의 경지 중 죽음의 경지에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한제는 설역국 북부의 작은 변방 마을에 자리를 잡았다. 크지도 않고 살고 있는 사람 역시 많지 않은 이 마을을 틀어쥐고 있는 것은 어느 결단기 수준 수련자였다.
그 수련자는 한제가 이 마을에 온 두 번째 날 밤, 기척도 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한제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셋째 날, 한제는 그 사람의 모습으로 11층에 불과한 이 마을의 얼음 탑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탄혼의 방식으로 그 결단기 수련자의 기억을 흡수해 버렸다. 허나 그자는 아직 살아 있었다. 탑 안의 금제를 통제하기 위해서라도 아직 필요했기 때문이다.
원래 이 수련자의 경지로는 얼음 탑을 가질 자격이 되지 않았지만 설역국 수련자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의 명망을 가지고 있는 그의 숙부가 그에게 이 작은 마을의 관리를 맡기고 11층짜리 얼음 탑을 준 상태였다.
그자의 기억을 통해 한제는 설역국의 그 유명한 ‘하늘의 딸’에 대한 정보도 알게 됐다. 그녀의 이름은 홍접으로 이미 주작국의 수련자와 몇 년 전 이 땅을 떠났다. 뿐만 아니라 일곱 명의 대장와 그들보다 나이가 더 많은 13명의 수련자들 역시 그녀와 함께 주작국으로 향했다. 이 13명의 수련자가 주작국으로 간 목적은 주작국의 관정(灌頂) 행사를 즐기는 것이었다.
스승
홍접이 주작국으로 들어가는 대가로 제시한 조건은 설역국을 5성 수련국으로 승급시키는 동시에 새로운 땅을 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두 번째 조건은 이미 만족이 된 상태였지만 아직 첫 번째 조건이 남아 있었다.
4성 수련국이 5성 수련국으로 승급하려면 영변기 수련자가 있어야 했다.
관정 행사는 굉장히 격렬한 법술로 모든 사람에게는 단 한 번의 기회만 존재했다. 실패율이 상당히 높지만 일단 성공하면 곧장 영변기에 이를 수 있었다. 하지만 폐단 역시 존재했다. 해당 수련자의 본래 수명이 얼마나 남았든, 관정 행사를 치르면 1백 년으로 변한다. 게다가 이 생에서의 경지는 영변기 초기에서 멈추게 된다.
대신 수명이 거의 끝에 이른 사람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기회였다. 때문에 최고 수준의 수련자들은 모험을 걸어볼 마음을 먹기도 했다. 어차피 그들에게 남은 수명은 많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 13명의 수련자 중 한 명만 성공하더라도 설역국은 1백 년간 5성 수련국이 될 수 있다. 그 안에 홍접과 7명의 대장로 중 한 명이라도 영변기에 이르면 설역국은 그 뒤로도 줄곧 5성 수련국으로 남을 것이다. 이는 주작국이 약속한 사항이었으며 홍접을 데려가는 데에 대한 조건이기도 했다.
주위의 4성 수련국들은 이미 언제든 설역국의 부속국이 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는 수련 연맹에서 오랜 시간 전해져 내려온 규칙이었다. 주작국에서 정한 바에 따르면 모든 수련자는 이에 반항할 자격은 있지만 변경은 불가능했으며, 반항의 대가는 소멸뿐이었다.
한제가 얼음 탑 밖으로 나서자 밖을 지키고 있던 한 쌍의 남녀 축기 수련자가 공손하게 인사했다. 탑의 주인의 제자들이었다.
한제는 살짝 고개를 끄덕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결단기 수준 수련자에게 세 명의 제자가 있었다. 그중 셋째 제자이며 가장 총애를 받는 제자인 눈앞의 아름다운 여자 제자는 언제든 몸과 마음을 다해 사부를 모실 준비가 되어 있기도 했다.
이런 일은 다른 수련국의 사제지간에서는 드물었고 그런 일이 설사 일어났다 해도 비밀스러운 일로 여겨졌다. 하지만 설역국에서 스승과 제자가 하룻밤을 함께 보내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또한 모두가 공공연히 알고 있는 일로 누구도 그에 대해 꾸짖거나 질책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 결단기 수련자는 홍접의 사부가 남자였다면 아마도 홍접의 봉양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제는 쓰게 웃었다. 설역국에 대한 인상은 더욱 나빠졌다.
눈앞의 남자 제자는 나이가 적지 않았지만 둘째 제자였다. 겉으로는 사부를 공경했으나 속으로는 사부와 사매의 관계에 대해 상당한 질투심을 품고 있었다. 이에 결단기 수련자는 조만간 기회를 잡아 둘째 제자를 밖으로 파견 보내 귀찮은 일을 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새로운 빙배(氷胚)가 왔나?”
한제는 뒷짐을 진 채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느릿하게 말했다. 빙배란 설역국 수련자들이 얼음 조각상을 부르는 호칭이었다.
둘째 제자는 얼른 공손하게 나서며 말했다.
“사부님, 방금 두 개의 설선(雪仙) 빙배가 도착했습니다.”
한제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가져와라. 너희 둘의 솜씨가 얼마나 나아졌는지 좀 보자.”
한제는 결단기 수련자의 기억을 통해 얼음 조각상을 꼭두각시로 만드는 방법을 상세하게 파악했다. 그 방법에는 몇몇 설역국 수련자들의 독특한 공법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런 공법은 빙청결(氷淸訣)이라고 불렸다. 상당히 정교하고 교묘한 공법이었다.
설역국 수련자들은 호흡을 할 때 세상에 존재하는 영기만이 아니라 얼음과 눈의 한기도 함께 흡수했다. 그 역시 필수적으로 흡수해야 하는 물질이었다. 이런 얼음과 눈의 한기가 점점 체제를 바꾸어 원영기 수련자로 하여금 원영을 빼내 얼음과 눈으로 이루어진 거인을 만들게 했다.
다만 이런 공법에는 등급이 있었다. 한제가 둔갑한 사람이 배우고 있던 것은 네 번째 구결에 불과했다. 이 역시 그의 숙부가 몰래 가르쳐준 것으로 그렇지 않았다면 네 번째 구결마저도 얻지 못했을 것이 분명했다.
둘째 제자는 얼른 대답한 뒤 저물대를 두드렸다. 순간 두 개의 거대한 30척짜리 얼음 조각상이 튀어나와 지면에 내려앉았다. 이 얼음 조각상은 사람의 머리에 새의 몸을 하고 있는 마수로 매우 흉측해 보였다.
한제는 지난 1년 동안 설역국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얼음 조각상으로 만들어진 것들은 모두 설역국을 수호하는 마수, 곧 설선(雪仙)임을 알게 됐다.
둘째 제자는 눈을 번득이며 가부좌를 튼 채 한참 앉아 있다가 왼손으로 빠르게 여러 결인을 그렸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의 검은색 눈덩이를 만들어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오른손으로 그 검은색 눈덩이를 조금 파낸 뒤 손가락 끝으로 얼음 조각상을 눌렀다.
순간, 검은색 기운이 그의 손가락 끝에서 빠르게 흘러나와 얼음 조각상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러자 경맥 같은 흔적이 생겨났다.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힌 둘째 제자가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오른손으로 다시 검은 눈을 좀 파낸 뒤 얼음 조각상을 눌렀다. 순간, 얼음 조각상의 경맥이 하나 더 늘었다.
이때, 둘째 제자의 왼손 위에 있던 눈덩이가 조용히 흩어져 사라졌다. 그는 창백해진 얼굴로 얼른 가부좌를 틀고 앉아 호흡했다.
한제는 내심 깨달음을 얻은 상태였다. 결단기 수련자의 기억에 따르면 하나의 설선 얼음 조각상 안에는 아홉 갈래의 경맥이 존재해야만 첫 번째 단계가 완성된다.
그가 생각에 빠져있던 그때, 여자 제자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교태 어린 눈빛으로 속삭이듯 말했다.
“사부님, 며칠 동안이나 제게 답을 안 주셨습니다. 제 경지에 또 변고가 생겼으니 오늘 밤은 꼭 사부님의 지도가 필요합니다.”
얼음 조각상에 존재하는 경맥의 작용을 고민하고 있던 한제는 여자 제자의 말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말해보아라, 무슨 변고냐.”
여자 제자는 흠칫 놀란 얼굴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그녀의 뺨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녀가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부님, 여기에서 말씀드릴까요?”
한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는 곧 결단기 수련자의 기억을 통해 여자 제자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 차렸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한제가 막 입을 열려는 순간, 여자 제자는 더욱 얼굴을 붉히며 교태 어린 눈으로 한제를 흘기더니 자신의 몸을 두드렸다. 그러자 그녀가 입고 있던 옷의 반이 벗겨졌다.
한제는 미간을 구기며 소매를 휘둘러 여자 제자의 옷을 다시 입혔다. 그리고 냉랭한 표정으로 여자 제자를 바라보았다.
순간 여자 제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얼른 바닥에 꿇어앉은 그녀는 두려운지 벌벌 떨기 시작했다. 한참 뒤에야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언제 다시 자신이 사부의 심기를 건드릴지 몰라 걱정스럽고 무서웠다.
이때, 호흡을 가다듬던 둘째 제자가 눈을 번쩍 뜨더니 여자 제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아무 말도 없이 다시 왼손으로 결인을 하더니 검은 눈을 응집해 얼음 조각상의 경맥을 이어서 만들기 시작했다.
둘째 제자는 오랜 시간 끝에 아홉 갈래의 경맥을 만들어냈다. 그 대부분의 시간은 스스로의 호흡을 가다듬는 데 쓰였다. 얼음 조각상을 만드는 것이 그에게 적지 않은 부담인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