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219
둘째 제자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얼음 조각상 아래 꿇어앉았다. 그리고 사뭇 경건한 얼굴로 중얼거리며 기도를 올리더니 이를 악물고 오른손을 들어 빠르게 그 아홉 개의 경맥이 응집된 곳을 눌렀다.
하지만 펑 소리와 함께 1백 척 넘게 밀려난 그는 피를 토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얼음 조각상에 깃든 아홉 갈래의 경맥은 마치 아홉 마리의 뱀처럼 그 안에서 빠르게 회전하더니 그중 두 개의 경맥이 부딪혔고 얼음 조각상은 폭파하여 얼음 파편으로 터져 버렸다.
둘째 제자는 창백한 얼굴로 부끄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한제는 그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도 않고 눈을 번득이며 한참 동안 고민했다. 머릿속으로 결단기 수련자의 기억을 더듬던 한제는 이 얼음 조각상을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점을 파악하게 되었다.
한데 그 순간, 한제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멀리서 이쪽을 향해 질주하는 한 갈래 검광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검광 위에 서 있는 것은 한 청년이었다. 당당하고 준수한 청년은 짙은 검은색의 가죽 옷을 입고 있었는데 다른 국가 수련자들의 의복과는 여러 모로 달랐지만 독특한 호쾌함이 느껴졌다.
한쪽에 서 있던 셋째 제자는 두 눈을 밝게 빛냈다.
“사형이 돌아왔다!”
둘째 제자의 눈에 어두운 빛이 한 줄기 스쳐지나갔다가 곧장 기쁜 내색을 내비쳤다.
한제는 결단기 수련자의 기억을 통해 그와 이 첫째 제자가 혈연관계임을 알 수 있었다.
첫째 제자는 천재에 가까운 자였다. 1백 년이 채 되기도 전에 축기를 가득 채운 그는 결단기까지 한 단계만 남겨둔 상태였다.
하지만 결단기 수련자가 이 첫째 제자를 아끼는 것은 표면상일 뿐이었다. 결단기 수련자는 첫째 제자를 결단기 후기 경지의 여자 제자와 혼인시킴으로써 양측의 연맹을 달성할 계획을 하고 있었다.
검광은 이미 바짝 가까워진 상태였다. 얼음 탑 앞에서 착지한 첫째 제자는 옷자락을 휘날리며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낭랑하게 외쳤다.
“사부님을 뵈옵니다. 다행스럽게도 사부님의 명령대로 네 개 문파의 잔당이 숨어 있는 곳을 찾아냈습니다!”
한제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나 내심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결단기 수련자의 기억에 의하면 최근 몇몇 일반인이 설역국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수상한 자를 마주쳤다고 제보를 해왔기에 첫째 제자를 보내 진상을 파악하게 한 상태였다.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4파 연맹국의 잔당은 당시에는 경지가 높았어도 이 기이한 얼음과 눈에 몇 년 동안 침식되면서 대부분은 지치고 다친 상태였다.
그렇다고 해서 방심할 수는 없었다. 일반적으로 이런 일을 마주할 때에는 빙설(氷雪) 신전에 보고를 하면 신전에서 알아서 처리하는 편이었다.
이런 일에 신전은 상당히 열성적이어서 오늘 보고를 올리면 내일 당장 나가 확인할 정도였다.
한제는 덤덤한 눈빛으로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앞장서도록!”
첫째 제자는 흠칫 놀랐다. 이전에는 이런 일들이 있어도 사부가 굳이 직접 위험을 무릅쓰고 나서지는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별다른 질문 없이 고개를 연거푸 끄덕인 뒤 앞장섰다.
둘째 제자와 셋째 제자는 서로를 돌아보며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사부를 따라나섰다. 사부가 직접 나서는데 따라 나서지 않았다가 나중에 무슨 골치 아픈 일이 생길지도 몰랐다. 이에 그들은 머리가 저릿해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한제의 뒤를 쫓아 나설 수밖에 없었다.
네 명은 네 개의 검광을 그리며 날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멈춰 선 첫째 제자가 전방의 눈과 얼음 산맥을 가리키며 말했다.
“비설(飛雪) 얼음 조각상을 통해 직접 두 눈으로 그자가 이곳에서 사라진 것을 봤습니다. 분명 이 얼음으로 덮인 산 아래에 그들의 은신처가 있을 겁니다.”
신식으로 사방을 훑은 한제의 표정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지만 두 눈은 한곳에 쏠려 있었다.
“여기에서 기다리도록!”
한제는 지시를 내린 뒤 앞으로 날아갔다.
한제는 신식을 통해 이 얼음으로 덮인 산 아래에 한 줄기 금제의 진이 있음을 확인했다. 그 안에는 신식의 파동 두 갈래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결단기 수련자의 것이었다. 한데 다른 하나는 기이하게도 때로는 결단기였다가 때로는 원영기, 심지어 때로는 화신기 수준의 파동을 보였다.
이런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그 수련자의 신식이 붕괴되어 수준이 혼란스러워진 상태인 것이다.
명예
한제는 얼음으로 덮인 산에 착지하자마자 땅속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그리고 곧장 금제를 따라 빠르게 안으로 향했다.
곧이어 한제는 금제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금제는 한제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순식간에 금제의 구조를 파악한 한제는 오른손을 흔들어 한 줄기의 잔영의 원을 만들어냈다. 순간 두 개의 금제가 하나로 융합되었다.
몸을 훌쩍 날려 금제를 통과한 한제는 그 안으로 진입했다.
금제 안으로 들어간 한제는 눈앞에서 검광이 흔들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열 갈래가 넘는 검광이 질주하듯 그에게로 다가왔다.
한제는 덤덤한 눈빛으로 오른손을 들더니 외쳤다.
“생(生)!”
윤회의 천도가 끊임없이 반복되며 만들어낸 생사의 경지가 순간 한제의 손짓 아래 손가락 끝에 응집되었다. 가벼운 손가락질 한 번에 천도를 품은 그것은 선인에게 길을 안내하듯 신묘한 능력을 보였다.
검광에서 깜짝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비검은 통제에서 벗어나 서로 이어져서는 원을 이루더니 한제의 손가락 끝을 뱅글뱅글 돌았다. 그 비검에서는 반짝이는 빛이 나타났고 빛 아래 비검은 아까보다 몇 배는 더 강한 영력을 발산했다.
하지만 그 비검에 배어 있는 신식은 천도의 위력 아래 완전히 제거되어 버렸다.
한제는 멀지 않은 곳에 떨어져 있는 잔뜩 놀란 얼굴의 청년을 바라보았다. 청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헤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청년의 뒤로는 얼음으로 만들어진 침상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그 위에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두 눈을 감은 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한제가 손가락 끝을 가볍게 튕기자 순간 열 개가 넘는 비검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청년은 그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는 비분강개한 얼굴로 주먹을 말아 쥔 채 외쳤다.
“우리 고향을 파괴하더니 이제는 우리를 죽이기 위해 여기까지 쫓아 들어왔느냐. 씨를 말려 죽이기 전까지는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이냐? 오늘 너희들은 우리를 죽일 수 있을지 몰라도 내일은 누군가가 너희를 멸하려 할 것이다!”
청년의 목소리에는 깊은 원한이 서려 있었다.
한제는 청년을 힐긋 바라보았다가 그 뒤쪽에 있는 노인을 살폈다.
청년이 한제의 시선을 가로막고는 잠시 침묵하다가 철퍼덕 소리가 나도록 꿇어앉았다. 피가 흐를 정도로 아랫입술을 꾹 깨문 그는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의 사부님은 건드리지 말고 날 죽여라! 난 수묵문의 차기 문주(門主)다. 날 잡아간다면 공훈을 인정받을 것이다. 네가 우리 사부님을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한다면 저항 않고 얌전히 따라 나서겠다. 그러지 않는다면 넌 내 시체밖에 건지지 못할 것이다!”
한제의 눈빛은 덤덤했으나 그는 내심 감동했다. 그는 청년과 그 뒤의 노인을 번갈아보며 느릿하게 말했다.
“왜 목숨을 걸고 스승을 구하려고 하는 거지?”
청년은 씁쓸한 목소리로 답했다.
“사부님은 나의 아버지와 다름없다. 내가 말려들지만 않았어도 일찍이 떠나실 수 있었을 텐데 나 때문에… 나를 구하기 위해⋯⋯.”
“환아, 일어나라. 그 사람은 설역국의 수련자가 아니야.”
가부좌를 튼 채 침상 위에 앉아 있던 노인이 느릿하게 눈을 뜨며 말했다.
청년은 흠칫 놀랐다가 곧 기쁜 기색으로 잔뜩 흥분한 말투로 말했다.
“사부님, 이⋯⋯ 일어나셨군요!”
한제는 노인을 바라보다가 포권을 하며 말했다.
“수묵문의 선배님을 뵈옵니다!”
마른기침을 몇 번 한 노인의 얼굴이 더욱 심하게 붉으락푸르락했다. 생사의 경지를 파악한 한제는 한눈에 그 노인에게 맴도는 죽음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노인은 고개를 들어 한제를 바라보며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도우, 이 노인네는 몸이 다쳐 손님을 맞이하기에 편치 않으니 이해 바라오. 여기까지 온 것은 무엇 때문이오?”
한제는 작게 한숨을 내쉰 뒤 말했다.
“선배님께서 숨어 계신 곳은 이미 설역국의 수련자들에게 발각된 상태입니다. 얼른 피하십시오!”
말을 마친 그는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저물대 안에서 단약 한 병을 꺼내 앞으로 슬쩍 밀었다. 단약병은 둥둥 떠서 침상 위로 날아갔다.
“부상이 심하십니다. 이 단약으로 치료는 하지 못하더라도 통증을 어느 정도 완화시킬 수는 있을 테니 멀리 떠날 때까지 도움은 될 겁니다. 세상은 넓으니 다시 기력을 회복할 기회를 얻게 될지도 모르지요.”
노인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단약병은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도우가 보기에 내가 얼마나 더 도망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오?”
한제는 침묵한 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곳이 나의 집이오. 난 이곳에서 태어났으니 죽음 역시 이곳에서 맞이할 거요.”
노인의 목소리는 작았으나 이 순간만큼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힘이 느껴졌다.
한제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포권을 취한 후 자리를 떠났다.
그가 이곳에 온 것은 불쌍한 이들을 돕기 위해서였다. 어쨌든 그는 무려 30년 동안 4파 연맹국에서 살아왔다. 게다가 설역국의 수련자들이 침입하는 것을 직접 목격하기까지 했다. 비록 이 상황을 바꿀 수는 없었지만 능력이 닿는 한 돕고 싶었다.
한제가 몸을 돌려 떠나던 그 순간, 노인은 고개를 숙여 단약병을 바라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오른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그의 소매 안에서 두 개의 깃털이 남은 부채가 튀어나왔다.
“도우, 이 법보를 가져가시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보은이오.”
부채를 손에 쥔 한제의 안색이 변했다. 이 법보는 당시 4파 연맹국의 수련자 아홉 명이 죽인 흰색 옷의 여인이 사용하던 그 부채였다. 한제는 당시 그 여인이 숨을 거둔 뒤 그녀의 부채가 어느 화신기 후기 수련자의 손에 들어갔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한제는 몸을 돌려 노인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장 그 노인이 당시 부채를 손에 넣었던 그 화신기 후기의 수련자임을 확인했다.
자리를 뜬 한제의 마음은 복잡했다. 얼음으로 뒤덮인 산에서 나오자 세 명의 제자는 감히 아무 것도 묻지 못하고 그저 묵묵히 한제의 뒤를 따랐다.
한제가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노인과 청년은 얼음으로 뒤덮인 산에서 나왔다. 두 사람은 한제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다가 빠르게 얼음으로 뒤덮인 산에서 벗어났다.
설역국의 가장자리에서 노인은 한 손바닥을 빛의 장막에 대어 틈을 열었다. 그리고 한제로부터 받은 단약 중 반을 덜어내 청년에게 건네고는 자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가자 앞으로는 네 스스로의 힘에 기대야 할 것이야. 이 스승은 더는 너를 보호해줄 수 없으니⋯⋯.”
청년의 눈에 슬픔이 차올랐다. 그는 뭔가 말하려 했으나 그 순간, 노인이 소매를 휘둘러 청년을 빛의 장막 건너편으로 밀어버렸다. 그리고 빛의 장막은 원래 상태로 돌아왔다.
청년은 빛의 장막 너머에서 멍하니 자신의 사부를 바라보며 바닥에 꿇어앉았다. 두 눈이 새빨개진 그가 갈라진 목소리로 외쳤다.
“사부님!”
노인은 껄껄 웃더니 자신에게 남은 반 정도의 단약을 한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끊임없이 솟아올랐다. 이 순간, 그는 비록 잠시이긴 해도 일전의 수준을 회복하게 되었다.
노인은 소매를 휘둘러 어딘가로 돌진했다. 그 목표는 설역국의 중심 지대에 있는 빙설 신전이었다. 죽더라도 고향에서 나라를 지키고 갈 것이다!
이전의 모든 명예는 머나먼 추억으로 변해버린 상태였다.
허나 맹렬한 불길이 떨어져도 봉황은 죽지 않는다. 두 날개가 다 타버린다고 해도 그 의지는 하늘로 승천하는 법이니⋯⋯.
사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청년의 마음에 지난날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한참 뒤, 그는 여러 차례 절을 한 뒤 주먹을 말아 쥐고 자리를 떠났다.
“저 진환이 맹세하겠습니다. 반드시 설역국을 멸망시키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