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224
지금 한제의 모습은 살육을 벌이던 때와 거의 차이가 없었지만 그 기질은 판이하게 달랐다.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혹시 그때의 그 사람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저 마음에 담아둘 뿐 감히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3성 수련국이 4성 수련국으로 승급하기 위해서는 해당 나라에서 화신기에 이른 수련자가 필요했다. 4성 수련국은 근본을 탐사할 수 있는 신통한 능력을 가지는데 이 신통한 능력은 주작국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주작국 수련자의 능력을 능가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 능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이 화신기 수련자는 줄곧 그 나라에 거주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그리고 1백 년이 지난 후에야 4성 수련국에 보고를 한 뒤 새롭게 등급을 정할 수 있었다.
이 조건은 한제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노인의 말을 들은 한제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조나라 사람이긴 하나 이곳에서 1백 년을 머물 수는 없네. 미안하군.”
노인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어렸다. 그뿐만 아니라 주위의 모든 수련자가 그랬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었다.
한제는 작게 한숨을 내쉰 뒤 오른손을 뻗어 허공을 쥐었다. 순간 그의 손에서 열 개의 빛 덩어리가 나타났다. 잠시 망설이던 한제가 오른손을 흔들자 그 빛 덩어리들은 각각 지는 해 주위에 자리한 열 명의 수련자들에게 날아가 녹아들었다. 열 명의 수련자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몸을 떨었으나, 그 고통은 얼마 가지 않았다. 잠시 후, 그들의 얼굴에는 기쁨이 차올랐다.
흰옷의 중년 수련자 역시 그중 하나였다.
“난 이곳에 머물러 있을 수 없지만 영력의 종자를 심어둘 수는 있다. 이 영력의 종자는 너희들의 수련을 도울 것이다. 만약 너희 중 원영기 후기에 이르는 자가 나타난다면 곧바로 내가 알게 될 것이다. 그럼 이곳으로 와서 도와주도록 하겠다.”
한제는 덤덤하게 말을 마친 뒤 그 흰옷의 중년 남자를 자세히 살피며 미소를 지었다. 그 흰옷의 중년 남자에게 심어둔 영력의 종자는 다른 사람들에게 심어둔 것과 다르게 목숨을 세 번까지 지켜주는 역할도 했다.
화신기 수련자가 세상에 존재하는 영기를 응집해 만들어준 열 개의 영력 종자의 가치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
흰옷의 중년 남자는 멍하니 한제를 바라보았다. 그에 대한 낯익은 느낌이 점점 더 강해졌다. 하지만 뭔가가 막 떠오르려고 하던 그때, 갑자기 두통이 느껴졌다. 두통은 갈수록 격해져 그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금세 넘어섰다. 바로 그때,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이 방금 얻은 영력의 종자로부터 흘러나왔고 잠시 후에는 두통이 사라졌다.
그가 몸을 살짝 떨었다. 온몸에서 식은땀이 배어나왔다.
“더 생각하려 하지 말아라. 언젠가 네가 원영기에 이른다면 자연히 전생의 일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지나치게 많은 것들을 알아봐야 네게는 고통일 테니⋯⋯.”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의 마음속에서 울렸다.
중년의 사내는 흠칫 놀라 한제를 바라보았다. 한제는 그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한제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조나라 땅을 훑어보았다. 뜻밖의 사건이 없는 한 조나라에서 원영기 후기에 이른 수련자가 나오기 전까지 그가 다시 이곳에 오는 일은 없을 터였다.
한제는 천천히 위로 솟아올라 하늘 끄트머리에서 사라졌다. 지면에 꿇어앉아 있던 모든 수련자들은 분분히 고개를 들었다. 그중 흰옷의 중년 수련자의 눈에는 견고한 빛이 어려 있었다.
“반드시 원영기에 이르겠습니다. 반드시!”
바로 그때, 하늘에서 갑자기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하나의 조각상이었다. 그 조각상이 대산의 꼭대기 봉우리에 내려앉은 순간, 이 봉우리는 무궁한 영기를 품게 되었다.
“그것은 조나라를 동급 수련국의 침입으로부터 세 차례 지켜줄 것이니 잘 지키도록 해라.”
멀리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4파 연맹국이 겪었던 참상을 떠올린 한제가 조나라를 위해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조치였다.
수백 년 후, 다른 나라 수련자들이 조나라의 모든 길을 끊어놓고 침략 준비를 마쳤을 때, 조나라의 모든 수련자들은 성스러운 산이라 불리는 대산 밑에 모여 절을 했다.
그러자 이 성스러운 산은 다른 나라 수련자들의 비웃음 속에서 부드러운 빛을 발하더니 조나라 전체를 감쌌다.
그리고 그 빛이 사라져버렸을 때, 조나라에 들어와 있던 다른 나라 수련자들은 이미 모두 숨을 거둔 상태였다.
조나라, 결명곡 외부. 한들한들 바람이 불고 햇빛이 따사로운 날이었다. 하늘에서는 구름이 유유히 떠 가는 것이 꼭 누군가가 화신기에 올랐던 징조라고는 전혀 없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수십 년 후면 이 결명곡은 다시 열려 역외전장으로 통하게 되어 있었다.
한제는 지금 이 골짜기 밖에 있었다. 그는 어느 절벽 위에 서서 골짜기 안쪽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쉰 뒤 오른손을 허공으로 뻗어 움켜쥐었다. 순간, 30척 정도 되는 공간의 균열 하나가 허공에 나타났다.
그 공간의 균열이 생겨난 곳은 수백 년 전 한제의 육신이 폭발했던 바로 그 위치였다.
화신기에 이른 뒤 한제가 처음으로 한 것은 당시 자신의 육신이 폭발함에 따라 공간의 균열 안에서 흩어져 사라졌던 저물대를 다시 응집시켜내는 일이었다. 그 저물대에 들어 있던 다른 물건이야 그렇다 쳐도 그 검집 만큼은 찾고 싶었다. 지금 그의 수중에는 이미 검집이 두 자루나 있었다. 한제는 줄곧 그 검집에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라고 생각해왔다.
한제는 오른손을 공간의 균열 안쪽으로 뻗었다. 그의 원신은 천천히 감응에 나섰다. 생각의 흐름에 따라 하나하나의 빛의 점들이 공간의 균열로부터 응집되어 나왔다.
이 빛의 점들은 서로 하나로 응집되었고 곧 저물대 하나가 한제의 앞에 나타났다.
신식으로 그것을 한 번 훑은 한제의 눈빛이 번득였다. 그 저물대 안에 들어 있는 물건들은 온전치 않았고 당초 들어있던 것의 반 정도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가 원하던 그 검집은 없었다.
한제는 추측에 나섰다. 너무 오랜 시간이 흐른 탓에 저물대는 새로 응결시킬 수 있어도 그 안에 들어 있는 물건은 공간의 균열 안에서 사라지고 만 것일까?
하지만 그 검집은 당시 한제가 한단(寒丹)으로 제련해둔 상태였기에 화신기에 이른 지금, 그 검집과 한 가닥의 감응을 느낄 수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한제는 공간의 균열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공간의 균열은 곧장 줄어들어 자취를 감추었다.
그곳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흉포한 기운과 생기를 멸할 듯한 차가운 바람만이 가득했다. 뿐만 아니라 여러 색깔로 반짝이는 무수히 많은 빛들도 있었다. 심지어 시커먼 색의 거대한 돌들도 부유했다.
그 순간, 한제는 고대 신 서사의 기억 속에서 보았던 우주를 떠올렸다. 다만 이곳에는 별은 없었다.
한제는 오른손을 휘둘러 제자리에 부호를 하나 남겼다. 그리고 엄청난 속도로 이동했다. 이 기이한 공간에서 그는 마치 하나의 유성처럼, 원신이 감응을 느끼는 쪽으로 질주했다.
때때로 초승달 모양의 갈라진 틈이 그의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틈에서는 엄청난 흡인력이 생겨났지만 한제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한제의 속도는 점점 더 빨라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 자루의 검집이 꽂혀 있는 거대한 검은 암석이 나타났다. 분명 바로 그 검집이었다.
하지만 그 검집의 사방에는 네 개의 검은 그림자가 있었다.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검은 그림자는 검집을 향해 가부좌를 튼 듯 앉아 있었다. 밝은 빛줄기들이 검집으로부터 발산되어 네 개의 검은 그림자에 의해 흡수되었다.
멀리서 이 광경을 본 한제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추었다. 그는 담담한 눈빛으로 오른손을 휘둘렀다.
순간 검집이 부르르 진동하더니 암석으로부터 천천히 뽑혀 나왔다. 바로 그때, 네 개의 검은 그림자가 불쑥 고개를 돌려 한제를 바라보았다. 이 검은 그림자들은 두 눈에 푸른빛을 번득이며 한제를 주시했다.
허나 한제는 여전히 담담한 모습이었다.
첫 번째 검집
검집은 높이 솟아오를수록 웅웅 우는 소리를 냈다. 이때, 네 검은 그림자의 입에서 틈이 벌어졌고 뒤이어 더욱 많은 세밀한 빛들이 그 검집으로부터 흘러나와 그들에게 흡수되었다. 그와 동시에 그림자 중 하나가 벌떡 일어섰다. 그 순간, 그림자는 갑자기 크게 불어나더니 한 덩이의 검은 구름이 되어 한제를 감쌌다.
한제는 냉소했다.
“겨우 귀매(鬼魅)에 불과한 것들이 힘을 쓰려 드느냐!”
말을 마친 그는 왼손으로 허공을 가리켰다. 순간 한 갈래의 기공이 그의 손가락 끝에서 쏘아졌다. 결코 강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한제의 경지를 함유한 기공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사멸의 기운을 풍겼고 순식간에 그 검은 구름을 향해 달려들었다. 검은 그림자는 곧장 생기를 잃어갔고 비참한 비명을 내지르면서 검은 기운을 발산했다. 자세히 보면 그의 몸은 기이한 빛으로 감싸여 있었다. 빛의 작용에 의해 그의 몸은 갈수록 작아졌고 이내 완전히 소멸해 버렸다.
그 그림자가 소멸한 순간 한제는 오른손을 다시 움직여 또 한 갈래의 기공을 쏘아 보냈다. 기공은 검은 그림자가 사라진 곳으로 파고들었다. 순간, 사방으로 흩어졌던 검은 기운이 갑자기 한곳으로 응집되어 거대한 마신(魔神)의 형상을 이루었다. 이 마신의 얼굴은 고대 신 서사의 기억에 존재하는 적을 토대로 생사의 경지로 변환시켜 만들어낸 결과였다.
마신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한 차례 포효하며 두 손을 펼쳐 나머지 세 개의 검은 그림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한제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원신은 생사의 경지에 푹 빠진 채 생사의 경지를 통해 삶과 죽음 사이에서 뽑아낸 기이한 힘을 통제했다.
이는 한제에게 있어 진정한 화신의 신통력을 발휘하여 천지의 힘을 통제한 첫 번째 경험이었다. 화신기 수련자가 일정한 위력을 구비한 신통력이 아니라 고정된 법술을 사용하는 경우는 굉장히 드물었다.
검집 곁에 있던 세 개의 검은 그림자는 순간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그 중 하나는 단박에 검집에 들러붙더니 그것을 말아 쥔 뒤 검은 암석 안에서 튀어나와 먼 곳으로 질주하듯 달려갔다.
나머지 둘은 곧장 고개를 돌리더니 두 눈에서 푸른빛을 번득이며 마신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중 한 녀석의 몸은 마신의 형상을 향해 달려든 그 순간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수많은 검은 갈래로 갈라져 사방팔방에서 마신의 형상 안으로 파고들었다.
또 다른 검은 그림자는 그 기회를 틈타 한제에게 달려들었다. 그 두 눈에서 번득이던 푸른빛에서 요사스러운 기운이 감돌았다.
한제는 덤덤한 표정으로 오른손을 살짝 움직여 미간을 두드렸다. 그의 원신이 정수리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 검은 그림자는 모습을 드러낸 원신을 본 순간, 비명을 지르며 두 말 않고 방향을 틀어 달아나려 했다. 하지만 그 속도는 원신에 비하면 너무도 느렸다. 원신이 손을 움켜쥐자 검은 그림자는 더는 도망치지 못하고 비명만 질러댔다. 한제의 원신은 그 그림자를 그대로 꿀꺽 집어삼켰다.
검집을 가지고 도망치던 검은 그림자는 갈지(之)자 형태로 움직였다. 한제의 순간이동을 피하기 위한 움직임인 듯했다.
한제는 또다시 냉소했다. 순간 그의 원신은 제자리에서 사라져서는 공간의 균열의 일부가 되었다. 마치 질주하고 있는 검집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난데없이 허공에서 나타난 손 하나가 검집을 움켜쥐고 원신에게 돌아왔다.
이는 화신기 수련자가 세상에 녹아들어 행하는 이동 기술인 나이법(挪移法)이었다. 모든 화신기 수련자가 다룰 수 있는 기술이 아니라 경지의 깨달음에 근거하는 것으로 순간이동보다 몇 배는 더 강력했다.
검은 그림자를 삼킨 그 순간, 한제는 그 기억을 뽑아냈다. 검은 그림자는 신통력이 강력한 수련자의 몸에서 분리된 집념이었다. 이 집념은 공간의 균열 안으로 들어와 그 안의 차가운 바람을 통해 수련한 결과 사멸의 몸이 형성되어 법보의 혼으로 만들어진 상태였다.
단, 지능은 그리 높지 않았다. 공간의 균열 안에서 오랫동안 머물다가 우연히 발견한 검집에서 기이한 파동을 느낀 집념은 그것에 대고 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검집을 집어든 한제는 오른손을 뻗어 마신의 형상을 가리켰다. 순간, 방금 체내의 검은 그림자를 소멸시킨 마신은 천천히 붕괴되어 한 줄기 영력이 되어서는 흩어져 사라졌다.
검집에 들러붙어 있던 검은 그림자는 한제의 손짓 한 번에 질겁하여 모습을 그러냈다. 한제가 모습을 드러낸 그것을 집어 들고 영력을 살짝 불어넣자 검은 그림자는 무너져 소멸되었다.
네 개의 집념이 사라짐으로써 그것들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고 신통력이 뛰어난 수련자는 이 사실을 알게 됐다.
한제는 몸을 훌쩍 날려 그 자리에서 사라졌고 미리 부호를 남겨두었던 곳에 나타났다. 그는 공간을 균열을 연 후 밖으로 나갔다.
결명곡에 나타난 한제는 멈추지 않고 곧장 질주하듯 날아갔다.
한 달 뒤에는 멀리 떨어진 조나라의 어느 오래된 전송진을 통해 모습을 드러냈다.
“우정이 출현했으니 천도가 시작될 날이 머지않았다. 이제 겨우 화신기 초기에 이르렀으니 영변기까지는 갈 길이 멀지만 희망이 없는 것도 아니지. 영변기에 이르면 사도환을 깨울 수 있을 테고 당시 주작국의 최고 고수였던 그는 수성(修星) 결정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 테니까. 그 보물을 얻게 된다면 분명 큰 효능을 낼 수 있을 거야.”
한제가 중얼거렸다.
“영변기에 이른 뒤 아버지와 어머니를 부활시킬 수 있을지는 모르겠군. 윤회와 생사의 천도를 깨달아 연구를 이어갈수록 불가역적인 천도도 더 깨달아 가고 있으니… 벗어나기 어렵다는 사실도… 부활시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울 거야.”
한제가 한숨을 내쉬었다.
“됐다. 이 일은 나중에 다시 생각하자. 만약 정말 부활시킬 수 없다면 일반인의 땅을 찾아 부모님을 윤회의 굴레로 되돌려야지. 그러면 이 삶에서 나와 부모님 사이의 인연도 끝이 나겠지만⋯⋯.”
한제에게 시급한 것은 새로운 금번을 만드는 것이었다. 묵간석은 하나밖에 남지 않았으니 조심해서 사용해야 했다. 당분간은 이미 망가진 금번을 수리하기도 힘들었다. 천벌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이나 할 수 있다면 다행이었다.
“난 화신기에 이르렀지만 법보가 너무 적어. 천도가 시작될 날이 언제일지 알 수는 없으니 그전까지 최대한 준비를 해야겠군. 선계의 영기를 꼭 얻고야 말겠다!”
생각을 정리한 한제가 눈을 번득였다. 초나라로 돌아가려던 원래의 계획은 지웠다.
한참 고민하던 그는 이를 악물고 저물대를 두드렸다. 순간 오랫동안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던 흡혈 마수가 저물대에서 날아올라 허공을 맴돌았다.
한제는 몸을 훌쩍 날려 흡혈 마수의 등에 가부좌를 틀었다. 흡혈 마수는 거대한 주둥이에서 서늘한 한기를 번득이며, 곧장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아첨하는 듯한 기색을 보였다.
마수의 얼굴에 그런 표정이 걸려 있는 모습은 퍽 괴상해 다른 사람이 봤다면 간담이 서늘해졌을 터였다. 하지만 한제는 빙긋 웃으며 저물대에서 단약 한 병을 꺼내 몇 알을 앞으로 내던졌다. 순간 흡혈 마수는 두 눈에 희색을 띄며 앞으로 날아가 단박에 그 단약들을 집어삼켰다.
이런 식으로 한제가 단약을 앞으로 내던질 때마다 흡혈 마수는 그 단약을 쫓으며 앞으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병에 든 단약은 반도 남지 않았다. 그러자 단약 병을 챙겨 넣은 한제는 흡혈 마수를 두드리며 짓궂게 말했다.
“이 망할 녀석, 오늘 먹을 단약은 끝이다. 빨리 날아간다면 내일은 좀 더 주마.”
흡혈 마수는 휙 소리가 나도록 빠르게 날았다. 강렬한 바람이 한제를 스쳤다.
이동하는 동안 한제의 마음은 퍽 즐거웠다. 오랫동안 고대했던 복수도 마쳤고 화신기에 올랐다. 기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한제는 길게 휘파람을 불며 세상을 살폈다. 그를 받치고 있는 흡혈 마수도 그를 따라 소리를 냈다.
두 가지 소리는 갈수록 커졌다. 흡혈 마수가 하늘을 가르며 날아가자 그 밑에 있는 수련국들에서는 깜짝 놀란 듯 신식으로 몇 번 훑어보곤 했다. 하지만 한제의 경지와 흉악하게 생긴 흡혈 마수를 확인하고는 곧장 신식들을 거두어들였다.
한데 바로 그때, 한 수련국의 어느 일반인 도시에서 온몸이 구질구질한 노인 하나가 축기 수준의 어린 수련자 한 명을 향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미간이 충만하고 보라색 빛을 발하는 것을 보니 범상치 않은 인물이구나. 허나 아쉽다. 옆에서 지도해주는 사람이 없다면 평생 결단에 이르기는 힘들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