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229
한제는 뭔가 깨달은 듯 중얼거렸다.
그때, 주작성 안에서 다섯 개의 빛기둥이 솟아올랐다. 그 안에는 각각 한 사람씩 들어 있었는데 그중 두 사람은 한제와 마찬가지로 주작성을 보고 있었다. 그들 역시 뭔가 깨달은 듯한 모습이었다.
한제는 자신의 몸을 맴돌고 있는 선계의 영기가 자신을 그들 쪽으로 끌어들이려 함을 느꼈다. 결국 그를 포함한 여섯 번째 빛기둥이 나타나면서 빛기둥들은 육각형의 도안을 이루었다.
수련자들 사이의 거리는 그리 멀지도 가깝지도 않았다.
한제는 그중 유일한 여자 수련자는 설역국의 그 하늘의 딸이자 1백 년 만에 화신기 후기에 진입한 천부적인 자질의 소유자인 홍접임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허나 한제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사실 그녀가 나타날 것은 충분히 예상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자신을 본 적이 없으니 정체가 탄로 날 염려도 없었다.
나머지 네 사람 중 한 명은 반쯤 벌거벗어 드러난 근육이 마치 수련자가 아니라 일반인 세상의 무사처럼 강건해 보였다. 그의 미간에는 보일 듯 말 듯한 도끼 모양의 반점이 있었는데 이를 본 순간 한제는 그가 거마족 사람임을 확신했다. 그 신분 역시 결코 낮지 않을 터였다.
다른 한 사람은 소년처럼 보였으나 그 눈에는 피에 굶주린 듯 무정한 빛이 번득였다. 한제는 그를 힐긋 보고는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그 소년의 기운은 한제의 본체가 가진 기운과 상당히 흡사했다. 허나 그 강도는 다소 떨어져서, 만약 한제의 본체가 이곳에 있었다면 그 살기(煞氣)만으로도 그 소년을 충분히 억제할 수 있을 터였다.
정작 한제를 긴장하게 한 것은 나머지 두 사람이었다. 특히 백발의 노인은 두 눈을 감고 뒷짐을 진 채 무표정한 모습으로 마치 자기 집 앞 꽃밭이라도 거닐 듯 유유자적했다.
시선을 느낀 듯, 그 노인은 눈을 번쩍 뜨더니 한제를 마주보며 빙긋 웃었다. 한제 역시 눈길을 피하지 않고 노인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거두고 마지막 사람에게로 눈빛을 돌렸다.
중년의 남자는 손에 든 조롱박 안의 무언가를 한 모금 들이켰는데 눈빛은 텅 비어 보였다. 마치 어떤 일도 그의 흥미를 끌지 못할 것 같았다. 한제와 눈이 마주쳤을 때도 그의 눈빛에도 어떤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 중년 남자를 제외한 다섯은 줄곧 서로를 관찰했으나 누구도 입을 열지는 않았다.
저 다섯은 모두 높은 경지의 수련자였다. 한제는 내심 경계심을 높이면서도 감격스러웠다. 자신도 어느 정도 고수가 됐다는 느낌이었다. 주작성을 벗어나 선계의 문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게다가 자신이 저들을 경계하는 것처럼 저들도 자신을 은근히 경계하는 것이 느껴졌다.
한제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자부심이 들었다. 시골마을의 소년에 불과했을 당시 어느 누가 이런 날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이 모든 것은 연이은 생사의 위기를 견디며 일구어낸 결과로 그는 자부심을 가질 자격이 충분했다.
여섯 개의 빛기둥은 육각형 모양을 이루며 빠른 속도로 먼 우주를 향해 날아올랐다.
머지않아 눈앞에 거대한 금빛 문이 나타났다.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문 앞에서 사람은 개미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 문에는 커다란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고대 신 서사의 기억 속에서도 언급된 바 있는 우(雨) 자였다. 이 문은 우(雨)의 선문(仙門)인 것이다.
한데 문에는 손자국이 하나 나 있었고 그 손자국 가장자리에는 거미줄과 같은 수많은 균열이 있었다. 그리고 문 아래에는 자잘하게 부서진 평평한 대가 늘어서 있었고 그 위에는 이미 몇 사람이 각각 하나의 대를 차지하고 있었다.
한제를 비롯한 여섯 사람이 도착하자 육각형의 그림은 순간 무너져 내렸고 그들은 마치 한쪽으로 튕겨나가듯 거대한 힘에 이끌려갔다. 한제는 뒤로 살짝 물러나 1백 척 길이의 대 위에 올랐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부근의 대 위에 자리를 잡았다.
주위를 둘러본 한제는 내심 놀랐다. 크기가 서로 다른 대들은 모두 같은 재질이었고 그 가장자리의 모양으로 미루어 본래는 하나였던 듯했다. 한제는 아마도 아득한 옛날, 선계가 파괴되기 전에는 거대한 하나의 대가 놓여 있었을 것이라 추측했다.
다시 문으로 시선을 돌린 한제는 아마도 선계의 문에 난 수많은 균열은 그 위에 있는 손자국 때문에 생겨난 듯했다. 그 손자국을 남긴 힘이 얼마나 강한지 짐작조차 어려웠다.
높이를 알 수 없을 만큼 높은 우의 선문을 바라보던 한제는 한껏 치솟았던 자부심이 한순간 눈 녹듯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이런 미지의 존재에 비하면 자신은 여전히 개미만큼이나 미약한 존재에 불과했다.
잠시 후,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대 위에 자리를 잡으면서 이제 남은 대가 없었다.
한제는 그들을 하나하나 관찰했다. 그들의 경지는 각기 달랐고 심지어는 원영기 수련자도 있었다. 한제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검은 옷을 입은 청년 하나가 도착해서는 사방을 훑어보더니 더 이상 빈 대가 남아 있지 않자 한 백발 노파가 있던 대 위에 내려섰다. 그 대는 무척 넓어서 스무 명이라도 충분히 수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청년이 대 위에 착지하자마자 노파가 거친 목소리로 외쳤다.
“꺼져!”
청년이 뭔가 대꾸하려던 순간, 노파가 미간을 찌푸리며 오른손으로 허공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청년은 깜짝 놀란 듯 비명을 지르며 얼른 뒤로 물러났다. 그러더니 굳은 얼굴로 노파를 힐끔 노려보고는 방향을 틀어 옆에 있는 대 위에 자리를 잡았다.
그 대 위에는 가부좌를 튼 중년 사내가 있었다. 한제와 함께 주작성에서 온 사내였다. 조롱박을 들어 무언가를 마시던 그는 그 청년에게 신경도 쓰지 않았다.
검은 옷의 청년은 잠시 눈치를 보다가 가장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머지않아 또 누군가가 다가왔다. 화신기 수준인 그 또한 빈 대가 없음을 확인하고는 어딘가로 향했다. 의도한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공교롭게도 그는 주작성 사람들이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거마족 사내가 차지하고 있던 대에 올라 냉랭하게 소리쳤다.
“비켜라!”
거마족 사내는 피식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그의 몸이 부풀기 시작했다. 거대해진 몸으로 그는 놀란 얼굴의 상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자리 없다!”
말을 하는 사이, 그의 이마에 자리한 도끼 모양의 흔적이 빠르게 번쩍거렸다. 그러자 상대는 두려움이 어린 눈으로 거마족 사내를 바라보며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거마족⋯⋯.”
그러더니 그는 얼른 뒤로 물러나 그 대를 떴다.
그가 다음으로 노린 곳은 하늘의 딸, 홍접이 있는 대였다. 허나 그는 홍접을 한 번 살피더니 포권을 취하고는 그 대에서도 자리를 떴다.
자신으로서는 화신기 후기인 홍접을 건드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안 것이다.
그는 다시 허공으로 올라 사방을 훑었다. 백발노인은 제일 먼저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중년 사내가 자리한 대에는 이미 한 사람이 더 있었으므로 역시 제외했다.
다음으로 피에 굶주린 듯한 눈빛의 소년이 있는 대를 살피던 그는 이내 생각을 접었다. 소년은 절대 순순히 물러날 것 같지 않았다.
파괴된 선계
반면 겉보기에 백면서생 같아 적당히 구워삶을 수 있을 듯한 한제가 자리한 대로 향했다.
그러자 술을 마시던 중년 사내가 고개를 돌려 그쪽을 바라보았다. 거마족 사내 역시 흥미진진하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피에 굶주린 듯 흉악한 눈빛을 번득이던 소년과 백발노인도 곁눈질을 했다. 어쨌든 한제는 그들과 같은 주작성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한편, 홍접은 한제에게 어딘가 익숙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았다.
사내는 한제가 자리한 대 위에 올라 냉랭하게 말했다.
“여기는 내가 점찍었으니 목숨이 아깝다면 다른 곳으로 가게.”
사내는 연이은 실패를 만회하려는 듯 목소리에 한층 힘을 주었다. 허나 한제는 덤덤한 표정으로 상대를 힐끔 바라본 후, 말없이 오른손을 휘둘렀다.
순간 그의 손목에 채워져 있던 팔찌가 벗겨지더니 하늘로 솟아올라 펑 하고 거대한 두꺼비로 변했다. 그러자 사내는 깜짝 놀라며 외쳤다.
“뇌와(雷蛙)!”
그의 저물대에 든 법보들에 비하면 뇌와는 필살기라 할 수준도 못 됐기에 한제는 처음부터 뇌와를 드러내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 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은 뇌와가 한제의 가장 강력한 법보라 여길 가능성이 높으니 그에 대한 대비책만을 세우느라 진정한 한제의 힘에는 신경조차 쓰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자신을 쉽게 여긴 상대에게 본보기를 보이지 않았다가는 두고두고 귀찮아질 것이 뻔했으니 강력한 인상을 남길 필요가 있었다.
뇌와는 나타나자마자 배를 불룩하게 부풀려서는 거대한 번개공을 쏘아냈다. 사내는 얼른 뒤로 물러나는 동시에 두 손으로 여러 결인들을 그렸다. 그러자 음양의 영패 하나가 그의 앞에 나타나 번개공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완벽히 막아내지는 못했는지 그는 선혈을 토하며 뒤로 달아났다. 번개공은 음양의 영패를 밀어낸 뒤 반쯤 줄어든 후 돌아왔다. 뇌와는 입을 크게 벌려 반으로 줄어든 번개공을 삼켰다.
한제는 사내를 물러나게 했으나 경계심은 오히려 커졌다. 역시 이곳까지 온 화신기 수련자답게 뇌와의 번개공은 겨우 반 정도의 효과밖에 내지 못했다.
뇌와는 화신기 중기 정도의 수련자는 충분히 처리할 능력이 있었다. 번개공에는 경지의 힘이 배어 있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그 정도 위력은 가졌다.
사내는 한참이나 뒤로 날아간 뒤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뇌와를 쳐다보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한제를 향해 포권을 취한 뒤 더는 다른 대를 탐하지 않고 그저 허공에 떠올라 가부좌를 틀고 좌선을 시작했다.
한제는 흠칫 놀랐다. 사내가 호탕한 건지 아니면 마음속에서 담아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홍접은 뇌와를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거마족 사내는 전의가 번득이는 눈으로 한제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고 백발노인은 한제를 힐긋 바라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유일하게 함께 온 소년만이 뇌와를 본 순간 눈빛이 흔들렸다. 그의 수준은 벌레와 관련이 깊었기 때문에 개구리나 두꺼비 종류의 마수에 상당한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한편, 술을 마시던 중년 사내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더니 중얼거렸다.
“뇌와라⋯⋯ 정아, 내가 또 뇌와를 보았다. 그러나 안타깝구나. 당시의 그 사람은 아니야.”
한제가 손을 휘두르자 뇌와는 다시 구수권으로 변해 그의 손목에 감겼다.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모두 한제를 경계하게 됐다.
한제는 덤덤한 눈빛으로 저물대에서 술주전자를 꺼내 묵묵히 마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 안쪽에서 쉭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작은 소리였으나 곧 점점 커지더니 결국에는 우레처럼 우르릉 하는 소리가 되었다.
선문이 안쪽으로 느릿하게 열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열린 문틈으로 금빛이 쏘아져 나왔다. 엄청난 빛이 사방의 어둠을 몰아냈다.
이내 선문이 완전히 열리자 수련자들은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그 안쪽으로 사라졌다.
한제는 급하게 들어가지 않고 주작성에서 온 다섯 수련자들이 모두 들어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급하지도 느리지도 않게 움직였다.
선문에 진입한 순간, 거대한 기운이 마치 폭풍처럼 선계의 문 안으로부터 튀어나왔다. 살상력이 있는 기운은 아니었다.
모두가 들어서자 선계의 문이 느릿하게 닫혔다. 그와 동시에 한제의 앞에 손바닥만 한 옥정(玉鼎) 하나가 떠올랐다. 한제는 그 솥을 저물대에 집어넣었다.
한제는 고서를 연구한 적이 있는데 그때 이 솥의 이름이 회(回)라는 것과 특정한 구역에서 생각만 하면 대략 30분 만에 정복해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선계를 떠나 어느 수련성으로든 돌아갈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저 멀리 거대한 소용돌이가 하나 있었고 다른 수련자들은 하나둘씩 그 소용돌이 안으로 사라졌다. 한제 또한 소용돌이 쪽으로 몸을 훌쩍 날렸다.
소용돌이에 들어서자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눈앞에서는 빛들이 번쩍여 눈이 부셨으나, 이 인상 깊은 장면을 놓치기 싫었던 한제는 이를 악물고 눈을 부릅뜬 채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발밑에는 반짝이는 빛의 조각들이 깔려 있었다. 둥글게 자리한 이 빛의 조각은 마치 거울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지금의 선계는 갈가리 찢겨져 수많은 파편이 되었고 선계의 영기도 거의 흩어진 상황이었다. 남아 있는 것은 일부의 부스러기에 불과했다.
한제의 몸은 빠르게 떨어졌고 그 부스러기들 역시 빠른 속도로 커져갔다. 한제는 자신이 그 많은 조각 중 가장자리의 조각으로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순간, 한제는 저물대에서 구리 방울을 하나 꺼냈다. 그것은 고대 신의 땅에서 만난 상고시대의 수련자들에게 받은 세 개의 법보 중 하나로 크기를 바꾸어가며 적을 가둬둘 수 있었다.
바닥에 내려서자마자 주위를 둘러본 한제는 충격을 받았다.
이곳에는 조금의 생기도 없었다. 땅 군데군데 마른 풀이 있었고 저 멀리는 높은 산이 있었으나, 그 산봉우리는 반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절단면은 매끄럽고 평평했다. 누군가가 법술로 깔끔하게 잘라낸 것이다.
산 아래에는 궁전들이 있었으나 그것들 역시 다 무너져 폐허에 가까웠다. 궁전들은 산봉우리에서 잘려나간 부분에 짓눌려 있었다.
한편, 땅에는 너무 깊어 그 끝을 알 수가 없을 정도로 거대한 구덩이가 있었다. 구덩이 군데군데에서는 흰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쥐 죽은 듯 고요한 세상이었다.
“이곳이⋯⋯ 선계인가?”
한제는 다소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선계가 이미 소멸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직접 보니 믿을 수가 없었다.
상고시대의 수련자들은 수준이 화신기에 이르면 곧장 선계의 소환을 받고 이곳으로 와 수련했다고. 말하자면 선계는 수련자들에게 성지(聖地)와도 같은 곳이었다. 그리고 성지란 침범이 불가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