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23
오랜만에 와보니 새삼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검령각에는 하얀색 옷을 입은 제자 한 명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서른 정도 되어 보이는 그는 동그란 체형에 얼굴도 낯설었다. 합동 훈련에 참가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한제를 한 번 훑은 그가 놀란 듯 먼저 입을 열었다.
“사제, 어쩐 일이지? 여기는 응기 4단계 이상인 제자들만 올 수 있는 곳인데…”
한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대주가 준 영패를 꺼내 사내에게 건넸다. 그러자 통통한 사내의 표정이 순간 기괴하게 바뀌었다. 그는 억지웃음을 지은 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결국 못 참겠다는 듯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손 사숙에게는 습관이 있지. 다른 문파와의 교류가 있을 때마다 비검을 선보이는 습관 말이야.”
엄숙한 표정으로 말하던 손대주를 떠올린 한제는 난처한 듯 씁쓸하게 웃었다.
통통한 사내는 억지로 웃음을 참은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사제, 들어오게나. 세 번째로 좋은 검을 추천해주지. 아마 보면 깜짝 놀랄걸? 난 처음 이곳을 맡았을 때 그 비검을 보고 이 조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검인 줄 알았을 정도라니까.”
연거푸 고맙다고 대답하며 안으로 들어가던 한제는 미간을 찌푸렸다. 방 안에서 어떤 파동 같은 것이 퍼져 나오고 있음을 신식으로 느낄 수 있었는데 문제는 그 파동 때문에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던 것이다.
검령각의 사내는 아차 하는 표정으로 이마를 탁 두드리더니 말했다.
“미안하네. 내 검령각의 결계를 거두는 걸 깜빡했군. 잠시만 기다리게.”
한제는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생선 가시가 목에 걸린 듯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을 막는 힘에 마치 모욕을 당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자존심에 상처가 났다. 지난 4년, 꿈속 공간에서의 시간까지 더한다면 20년이 훌쩍 넘는 시간의 길고 긴 수련이 눈앞에 스쳐 지나가면서 참을 수 없는 분노가 터져 나왔다.
그는 이를 악물고 큰 보폭으로 앞을 향해 나아갔다. 한 걸음, 두 걸음…
매 걸음마다 그를 막는 힘이 강해졌지만 그럼에도 한제는 그 힘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 마침내 방 안으로 들어갔다.
신식으로 방을 훑은 한제는 당황했다. 이상한 방이었다. 이곳에서는 신식의 작용에 방해를 받는 듯 3보 이내의 거리밖에 살필 수가 없었다.
그때 흰옷의 사내가 기겁한 표정으로 얼른 다가왔다. 검령각을 책임지는 그는 이곳의 금지 조치가 얼마나 강한지 잘 알고 있었다. 일찍이 이곳에 멋대로 들어오지 못하는 사숙들도 여럿 보았으니, 정식 제자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 진법환(阵法壞)이 고장이라도 났나?”
사내는 진법환을 확인하기 위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허나 몇 걸음 내딛기도 전에 거대한 힘에 부딪혀 마치 파도에 휩쓸린 조각배처럼 저 멀리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끙 앓는 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킨 그는 반쯤 넋이 나간 듯 중얼거렸다.
“고⋯⋯ 고장 난 게 아니잖아!”
그때 한제는 열심히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방 안에는 길이가 다른 옛 검들이 저마다의 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하나하나 비검을 스쳐 지나던 한제의 눈길이 딱 멈췄다. 사내가 말한 최고의 비검이 바로 이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사실 이는 비검이 아니라 네모난 문짝이라고 해야 더 적합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두 뼘의 너비에 3척의 길이였고 전신은 금빛으로 번쩍거렸다. 이 빛은 법술로 꾸며낸 것이 아니라, 진짜로 검에 입혀진 금에서 발산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니, 이는 눈속임에 불과했다. 그 금박 아래에 숨겨진 것은 보통의 무쇠로 어떤 특이한 구석도 없었다. 손잡이 부분에는 두 개의 커다란 보석이 박혀 있었고 심지어 검에 장식된 술도 금실로 엮여 있었다. 왠지 들기만 해도 천하무적이 될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다른 검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한제는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이 검이라면 혹시라도 나중에 급히 돈이 필요할 때 적당히 팔아넘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검 앞의 작은 패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 검의 이름은 금부. 500년 전 한 선조가 만들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위력을 가졌다. 금부를 고른 자는 만약 이 검이 부러진다면 반드시 다시 붙여야 하며, 팔아넘겨서는 아니 된다. 이를 지키지 못하는 자는 문파에서 축출될 것이다.
한제는 속으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한 손으로 금부 비검을 쥔 채 그 검에 대고 말했다.
“내 비록 가난해서 네가 부러진다고 해도 다시 붙여줄 수는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널 골라야겠다.”
비검을 저물대에 챙긴 뒤 검령각에서 나온 한제를 흰옷의 사내는 긴장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방금까지 그의 얼굴에 걸려 있던 비웃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는 두려운 눈빛으로 한제에게 겨우 잘 가라고 인사했다.
손대주의 약초밭으로 돌아가 비검을 내놓자 손대주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한참이나 어물거리다가 한제를 또 한참을 바라보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내가 이 금부를 봤을 때에는 건드릴 수도 없었는데 배짱이 좋구나. 좋아, 사흘 뒤 이 검을 가지고 현도종과 네 사숙들에게 보여주도록 해라.”
★ ★ ★
사흘 뒤, 대산파의 종이 아홉 번 울렸고 그 소리는 온 산간에 오래도록 퍼져나갔다. 그러자 장문인을 비롯한 모든 사숙과 그 제자들이 분분히 대전으로 모여들었다.
그때 하늘에 떠오른 검은색 점 하나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마침내 모두의 눈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길이가 1천 척에 달하며 발이 1천 개인 지네였다. 현도종을 지키는 신수(神獸)로 다리가 1천개라 하여 천수(千手) 지네라 불리는 이 지네는 시커먼 몸으로 검은 구름 사이를 오가는가 하면 천둥소리를 내며 빠르게 움직였다.
대산파 제자들은 숨 쉬는 것도 잊고 그 놀라운 광경을 바라보았다. 몇몇 여자 제자들은 다리가 풀리기도 했다.
“무얼 그리 놀라느냐? 아무리 커도 지네는 지네일 뿐, 검으로 찌르면 죽고 만다.”
장문인 곁에 선 붉은 얼굴의 노인이 퉁명스레 말했다. 목소리가 큰 것으로 보아 현도종 사람들에게 들으라고 하는 소리인 듯 했다.
“흥, 현도종은 매번 이렇게 허장성세를 부린다니까요. 우리 대산파에 산을 지키는 신수(神獸)가 없다고 업신여기는 게지요. 망할, 저 지네를 언젠가 죽여서 저들에게 본때를 보여주던가 해야지…”
또 다른 노인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지네를 바라보며 낮게 읊조렸다.
그때 장문인의 몸에서 자주색의 날카로운 빛이 튀어나와 하늘을 향해 뻗어가더니 순간 거대한 용으로 변했다. 그 자주색 용은 대산파 상공을 배회하며 지네를 향해 포효했다.
그러자 천수 지네가 자리에서 멈추더니 더는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그때 긴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황용 도우(道友), 들리는 말로는 도우의 자주색 검이 아주 대단하다고 하던데 과언이 아니었군요. 도우, 이번에도 우리 현도종이 이긴다면 대산파는 우리에게서 빼앗아 간 137개의 법보(法寶)와 200개의 비검을 선물로 주기로 한 약속을 잊지 마시오.”
장문인은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담담하게 말했다.
“구양 도우, 물론 약속은 모두 지킬 거요. 허나 그럴 일은 없을 테니, 현도종이야말로 약속대로 우리가 이긴다면 신수를 통제하는 방법을 알려줘야 할 거요.”
그러는 사이, 자주색 용이 천천히 흩어져 사라지더니 비검이 되어 다시 장문인 황용의 손에 돌아왔다.
천수 지네도 그제야 다시 움직이더니 천천히 내려왔다. 정식 제자들은 저도 모르게 뒤로 주춤 물러나며 지네가 내려앉을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지네가 땅에 엎드리자 그 등에서 수십 명의 사람들이 튀어나왔다. 세 명의 노인을 제외하고는 모두 나이가 많지 않은 이들이었다.
현도종의 제자들은 대산파에 자주색 옷을 입은 제자가 적다는 것을 의식해서인지 모두 자주색 옷을 입고 있었다. 한편 대산파의 제자들은 현도종 제자들이 남자건 여자건 모두 용모가 수려하다는 점에 놀라고 말았다. 남자 제자들은 늠름했고 여자 제자들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다.
특히 가장 앞에 선 남녀가 더욱 그랬다. 구양이 방금 일으킨 바람에 날린 남자의 옷소매와 긴 머리카락이 그의 외모를 더욱 부각시켰다. 대산파의 여제자들은 단박에 그의 외모에 흠뻑 빠져버렸다.
그 옆에 자주색 옷을 입고 있는 여자의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머리카락과 맑은 눈, 그리고 붉은 입술을 보며 한제 역시 떨리는 가슴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지네
이들이 모두 아름다운 현도종 제자들의 외모에 홀려있는 것을 본 선배가 분노한 듯 낮게 소리쳤다.
“현도종은 이제 이런 미혹술까지 부리는 겁니까? 정말로 천박하군요!”
그러자 현도종의 세 노인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허도 진인(眞人) 아니십니까? 자세히 보십시오. 이 두 제자는 어떤 미혹술도 부리지 않았습니다. 태생적인 영기의 뿌리를 가지고 있을 뿐이죠. 보아하니 대산파의 제자들 중에는 이런 영기의 뿌리를 가진 자는 없는 것 같군요. 그러니 미혹술이라고 오해할 만도 하지요.”
모든 대산파의 선배들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때 황용이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여기까지 오셨으니 일단 푹 쉬고 사흘 뒤부터 정식으로 교류하는 것이 어떻겠소?”
구양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좋습니다. 우리 현도종과 대산파는 아주 오랫동안 좋은 관계를 이어온 터라 교류야 구실에 불과한 것 아니겠습니까?”
대산파의 여러 선배들 중 한 노인이 나섰다. 그의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해 보기에는 풀이 죽은 것 같았지만 그는 가볍게 웃으며 구양에게 말했다.
“구양 도우, 20년간 보지 못했다고 이 오랜 친구를 기억하지 못하는 건 아니겠지요?”
그러자 구양은 통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방금에서야 알아봤네, 송 도우. 이번에는 어떻게든 자네가 이야기했던 그 훌륭한 술을 마셔야겠어. 저번에는 겁이 난 자네가 한 단지밖에 가져오지 않는 바람에 얼마 마시지도 못하지 않았나.”
송 사숙이 웃으며 대답했다.
“겁이 난 게 아니라, 구양 도우가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런 것이지. 몇 단지를 가져다 놓고 마셨어도 모자랐을 거야.”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현도종의 나머지 두 노인도 대산파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좀 전의 불편한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 같았다.
노인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통해 제자들은 견문을 넓힐 수 있었다. 무봉골의 제자 하나가 표묘종(飘渺宗) 장문인의 여제자를 꾀어 임신하게 만들어서 표묘종 장문인이 그를 처치하고 갓난아이를 데려왔다는 이야기, 천도문(天道門)의 어느 제자가 사부를 배신하고 합환종(合歡宗)에 들어가더니 그곳에서도 사부를 배신해 천도문의 장로가 그를 추격해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이야기 등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멍하니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던 한제가 문득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려 보니, 현도종 제자들 중 가장 앞에 서 있던 소녀가 그를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한제는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시선을 거두었다. 경계심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자신의 외모가 유달리 매력적인 것도 아닌데 처음 보는 여자가 그것도 사람을 홀릴 만큼 아름다운 여자가 자신에게 관심을 보일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한편 류미는 현도종의 정식 제자들 중 걸출한 인물로 태생적인 미혹술에 상당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방금 그 평범해 보이는 청년은 지금껏 현도종의 또래들에게 거부당한 적이 한 번도 없던 그녀에게 미혹되지 않고 정신을 차렸다. 이에 그녀는 적잖이 놀랐다.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몇 번이나 상대를 살폈지만 그는 겨우 응기 3단계에 머물러 있는 사람일 뿐 뛰어난 구석은 없었다.
선배들이 환담을 나누는 사이, 양쪽의 제자들도 분분히 서로를 살피며 앞으로 있을 교류를 준비했다. 그러나 현도종 제자들의 실력을 가늠하기란 힘들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안개로 둘러싸인 듯 진정한 수준을 감춘 상태였다.
한제 역시 이런 상황에 꽤 놀라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현도종의 제자들에게 흥미가 일었다. 상대는 분명 그들의 수준을 숨기는 술법을 쓴 것일 터였다. 그 술법은 그가 사용하던 은닉술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기술이었다.
대산파의 제자들 대부분은 용모가 뛰어난 현도종의 두 제자에게 시선이 팔려 있었다.
하지만 한제가 가만히 살펴보니 현도종 제자들은 그 둘이 아니라 가장 뒤쪽에 있는 한 중년 남자에게 보일 듯 말 듯한 경의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한제는 말없이 그 사내를 살피다가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 ★ ★
현도종의 제자들도 나름 대산파의 제자들에 대한 점수를 매기고 있었다. 특히 응기 6단계에 이르러 검은 옷을 입고 있는 몇몇 제자들에게 관심이 집중되었다.
범상치 않은 기운과 시원시원한 외모, 그리고 어린 나이에도 벌써 응기 5단계에 이른 이산도 현도종 제자들의 시선을 끌었다. 응기 3단계에 불과한 한제에게 조금이나마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은 류미뿐이었다.
그러는 사이 현도종의 세 노인은 기분이 좋아졌다. 대산파의 제자들이 이 정도라면 이번 교류에서 승리는 따 놓은 당상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 실력을 겨뤄온 지 오래였다. 상대의 교활함과 순간 발휘되는 필살기가 얼마나 치명적인지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제자들 중 응기 6단계에 이른 제자가 적지 않았지만 모두 낯선 이들이었다. 즉 저번 교류에서 봤던 제자들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점만으로도 경계를 하기에는 충분했다. 아마 저들이야말로 이번 교류의 관건이 되는 인물들이리라.
반면 현도종 제자들을 훑던 황용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 5백 년간 대산파가 이렇게까지 뒤진 적은 없었다. 심지어 현도종은 5백 년 전만 해도 그리 이름나지 않은 소형 문파에 불과했다. 때문에 이번만큼은 반드시 승리를 거두려 했으나 쉽지 않아 보였다.
“정말 자주색 옷을 입은 제자들을 교류에 출전시킬 생각이오? 저들은⋯⋯?”
그때 황용의 시선이 가장 끝에 서 있는 현도종의 한 제자에게 닿았다. 순간 황용의 얼굴이 미묘하게 변하더니 이내 마음을 굳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