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241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한제는 손에 들고 있던 금제를 흐트러뜨렸다. 하늘을 채웠던 검은 안개도 차차 응집되어 금번으로 돌아와 저물대로 들어왔다. 다만 부상이 심해 힘이 없어 보이는 뇌와를 보며 한제는 홍접에 대한 살기를 더욱 키웠다.
홍접은 한제를 한참이나 노려보았다. 상대에게 자신과 겨룰 자격이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치호는 그제야 한시름 놓으며 속으로 쓰게 웃었다. 만약 일찍이 두 사람에게 악연이 있는 줄 알았다면 절대 그들을 함께 부르지는 않았을 터였다. 놀랍게도 천우는 화신기 초기에 불과한데도 화신기 후기인 홍접과 맞먹었다. 절대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었다. 이런 인물은 주작성에서도 크게 빛을 낼 것이 분명했다. 주작국에서 이 자를 알게 된다면 초빙할지도 모른다.
중첩된 조각
“좋아, 홍접 도우, 천우 도우. 나를 따라오게.”
말을 마친 치호는 몸을 훌쩍 날려 앞으로 날아갔다.
한제에게서 시선을 돌린 홍접은 붉은 구름이 되어 치호를 앞질러 갔다. 그 뒤를 고분고분 따를 마음은 전혀 없는 것 같았다.
한제는 그런 그녀를 속으로 비웃은 후 뒤를 따랐다.
‘결국 도심(道心)이 불안해졌구나. 1백 년 만에 화신기에 이른 것은 기적이라고 할 만하나 그에 따르는 단점 역시 너무나 많아. 심성도 한참 부족하군. 겨우 비행 하나에도 저렇게 멋대로 굴어서야…’
한제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지금 내 경지로는 금번으로 천벌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이상 승산이 없다. 허나 내가 화신기 중기에 이른다면 내 생사의 경지는 홍접에게도 분명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럼 천벌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내가 이길 가능성이 7할은 되겠지.’
한제의 생사의 경지는 윤회의 천도에서 발전한 것이었으나 현재 그의 수준으로는 그 힘을 완전히 발휘할 수 없었다. 어쨌든 한제는 이제 막 천도를 깨달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화신기 중기에 이르러 생사의 경지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킨다면 홍접이 가진 절정의 경지와 충분히 맞붙어볼 수 있을 것이다.
‘홍접이 법결에서 벗어난 단계에 이르렀는지는 모르겠지만 도심이 불안정한 것을 보니 아직 그 상태에 이르지는 못한 것 같군. 그에 비하면 내가 조금 더 빠른 모양이야!’
화신기에 이른 뒤 한제는 특별히 심오한 신통술 외에는 세상의 공법들이 쓸모없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손을 흔드는 것만으로 세상의 힘을 이끌어낼 수 있는 화신기 수련자들은 주로 자신이 깨달은 경지의 힘을 사용했으니 말이다.
생사의 경지는 그 변화가 복잡해 단순히 ‘변화’라는 표현도 부족했다. 더구나 한제는 갓 입문한 것에 불과했다.
언제쯤 하나의 법술에 생사의 경지를 모두 불어넣어 모든 변화를 그 위에 걸 수 있을까? 그때가 되어야만 생사의 경지를 완성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한제는 홍접과의 싸움을 자세히 복기해 나갔다.
세 사람은 머지않아 이 선계 조각의 다른 쪽 끝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꽤 커다란 산이 하나 있었다. 마치 용처럼 생긴 이 산의 머리 부분은 구름에 감싸여 흐릿하게 보였다.
“치호 도우, 그 옥패에 그려진 곳은 왜 여태까지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않았는지 아직도 말해주지 않을 생각인가?”
한제는 고개를 들어 산봉우리를 보면서 느릿하게 말했다.
치호는 껄껄 웃었다.
“내가 그렇게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선계의 조각은 소용돌이를 통해서는 올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일세.”
그 말에 한제만이 아니라 홍접도 흥미가 이는 듯이 자신을 바라보자 치호는 웃으며 말했다.
“옥패에 그려진 그 조각은 선계에서도 매우 드문 중첩된 조각이지!”
한제는 그 말을 듣자마자 알 수 있었다. 선계의 조각은 매우 많고 모두 불규칙적으로 갈라져 있지만 공교롭게도 몇몇 조각은 서로 겹쳐지기도 했다. 때문에 그 조각은 다른 사람들에게 발견되기가 굉장히 어려웠다.
이 경우 소용돌이를 통해 갈 수 있는 것은 그중 위쪽의 조각일 뿐이다. 한데 그 아래 다른 조각이 중첩돼 있음을 누가 알겠는가? 분명 그런 조각은 오랜 시간이 흘러도 발견될 가능성이 낮을 것이다.
“게다가 위쪽의 조각 역시 마음대로 진입할 수 있는 곳이 아니지. 그곳은 근본적으로 전송진을 구축하기 어렵기 때문에 누군가 무의식중에 그곳에 들어갔다 해도 머물 생각을 하지는 않을 걸세.”
그 말에 홍접이 냉소하며 물었다.
“그렇다면 당시 시오 시조께서는 어떻게 발견하신 거지?”
“미안하지만 그 일은 우리 거마족의 비밀과 관련된 것이라 밝히기 어렵네.”
치호가 딱 잘라 말하자 홍접도 더는 묻지 않았다.
한제는 그 용 모양의 산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치호가 먼저 몸을 훌쩍 날렸고 세 사람은 금세 산 정상에 이르러 용머리 위에 섰다.
신식으로 주변을 훑어보던 치호가 말했다.
“한 달 전에 내가 미리 와서 탐사를 해봤다네. 이 전송진은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으니, 그 조각에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 안내해줄 걸세.”
말을 마친 그가 발을 앞으로 내딛어 허공을 밟았다. 순간, 그의 발아래가 밝게 빛나더니 치호의 몸이 사라져버렸다.
홍접은 한제를 힐끔 바라보더니 말없이 진으로 진입했다. 그리고 이어 한제도 전송진 안으로 들어갔다.
★ ★ ★
선계의 수많은 조각 중 남쪽 끝자락에 자리한 어느 조각. 이곳은 매우 황폐했다. 서늘한 기운이 가득했고 지면 곳곳은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다.
한제는 허공의 진에서 나오자마자 미간을 찌푸렸으나 홍접은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그녀에게 이런 환경은 오히려 편안한 모양이었다.
“이곳은 첫 번째 조각으로 이어진 곳이네. 동쪽으로 30만 리 정도 가면 평생 녹지 않는 땅이 나오는데 그곳에서는 홍접 도우가 신통력으로 한파를 막아주게. 그 땅을 지나면 선계를 삼키는 허무가 나오는데 내가 가진 나침반은 방향을 고정할 수 있으니 길을 잃을 염려는 없네. 천우 도우, 자네는 혼백을 다룰 수 있는 것 같더군. 그게 허무 속에서 큰 도움이 될 거야. 그리고 그 허무의 공간을 지나면 첫 번째 조각에 이를 수 있어. 허나 그곳에는 전송진이 없어 직접 이동해야 하네.”
치호가 조금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한제는 치호가 자신에게 제안한 이유가 유혼 때문임을 알 수 있었다. 유혼의 도움이 필요한 곳이 있는 모양이었다.
홍접을 필두로 세 사람은 동쪽으로 이동했고 눈 깜짝할 사이에 점점 멀리까지 나아갔다. 하지만 몇 리를 날아온 한제는 의혹 어린 눈으로 방금 있었던 방향을 바라보았다.
30만 리는 세 사람에게도 적지 않은 시간을 들여야만 하는 거리였다.
허나 결국 세 사람은 30만 리 밖, 조각의 동쪽 끝 가장 자리에 이르렀다. 멀지 않은 곳에는 공간의 균열처럼 불규칙하게 찢겨진 흔적이 나 있었고 그 아래로 시커먼 허무가 들여다보였다.
대지에서 1천 척 정도 떨어진 곳에는 깊은 푸른색의 빙하(氷河)가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강이었다. 그저 한구석만이 대지와 이어져 있을 뿐이었다.
한제는 사방을 둘러보다가 불쑥 물었다.
“치호 도우, 그 첫 번째 조각에 무슨 특별한 점이 있나? 아니면 선계의 영기가 응집되는 지점이라도 존재하나?”
“그곳은 심하게 파괴되어 선계의 영기는 없을 걸세. 게다가 시오 시조께서도 따로 말씀하신 특별한 구석은 없어. 그저 꽤 위험하다고만 하셨지.”
한제는 뒤쪽의 먼 곳을 훑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홍접은 한제를 한 번 훑어보더니 말없이 몸을 훌쩍 날려 1천 척을 단박에 날아 빙하 위에 착지했다. 치호와 한제도 몸을 날려 빙하 가장자리에 섰다.
빙하에 착지한 순간, 짙은 한기가 발끝을 타고 온몸을 기어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한제는 영력을 한 번 순환시켜 한기를 몰아냈다.
“이곳에서는 홍접 도우의 신통력이 필요하네.”
홍접은 대꾸 없이 다시 앞으로 이동했다. 치호는 한제를 향해 자조하듯 웃었은 뒤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은 매우 빠르게 질주했다. 앞으로 갈수록 한기는 심해졌고 지면에 흐르는 빙하도 더욱 짙은 푸른색을 띠었다. 때때로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에 피부가 벗겨져나갈 듯했다.
얼마나 이동했을까? 갑자기 대지와 빙하의 연결 부위에서 한 중년 남자의 허상이 나타났다. 그의 손에는 조롱박 하나가 들려 있었다. 남자는 그 조롱박에 든 것을 한 모금 들이키더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정아, 내가 선옥을 손에 넣으면 곧장 떠나자. 저 셋은 나와 같이 주작성 출신이지만 만약 저들이 선옥을 가져가려 한다면 난 저들을 살려두지 않을 거야.”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 ★ ★
사흘 뒤, 한제는 저 멀리서 한 층의 푸른 안개를 발견했다. 마치 하늘과 땅을 삼켜대는 것처럼 그것은 일행이 있는 쪽을 향해 확산되었다.
“빙하의 한무(寒霧)일세. 저 안개 속에는 얼음의 기운이 함유되어 있지. 홍접 도우, 부탁하네.”
치호의 말에 홍접은 저물대를 두드렸다. 순간 얼음 조각 하나가 빠져나와 그녀의 앞에서 수십 척에 이르는 거대한 설선(雪仙)이 되었다.
이 설선 조각은 곧장 앞으로 내달려 눈 깜짝할 사이 다가온 푸른색의 안개에 닿았고 그 순간 안개는 양쪽으로 벌어졌다. 얼음 조각은 파죽지세로 푸른 안개를 파고 들어가며 통로를 만들었다.
“홍접 도우의 설선 조각은 정말이지 신기하군. 대단해!”
치호는 웃으며 말했으나 한제는 냉철한 눈으로 그 설선 조각을 살폈다. 그 안에서 한제는 1백 개가 넘는 눈으로 이루어진 경맥이 빠르게 돌고 있는 것을 알아챘다. 그 외에도 그 안에는 수많은 어스름한 경맥이 아직 활성화되지 않은 채 자리하고 있었다.
‘저건 설역국의 중요한 보물이겠군. 이전에 본 그 사람 머리에 뱀의 몸을 한 조각상과는 여러모로 달라.’
한제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얼음 조각상이 길을 내준 덕분에 세 사람은 속도를 전혀 줄이지 않고 나아갈 수 있었다. 허나 푸른 안개는 점점 짙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쩌적 소리와 함께 얼음 조각상에 한 줄기 균열이 생겼다.
홍접의 표정이 더욱 싸늘해졌다. 그녀는 두 손으로 결인을 그린 뒤 얼음 조각상을 눌렀다. 그러자 그 안에서 아직 활성화되지 않았던 어두운 경맥들이 즉각 밝아지며 이미 돌고 있던 경맥에 빠르게 가담했다. 조각상 안에서 돌고 있는 경맥이 늘어남에 따라 균열은 조금씩 사라져갔다. 얼음 조각상에서는 음산하고 차가운 기운이 발산되었다.
세 사람의 뒤쪽으로 한참 떨어진 곳에서 조롱박을 든 중년 남자는 술을 마시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 푸른 안개는 그를 향해 접근했다가 보이지 않는 저항력에 가로막힌 듯 그를 비껴갔다.
안개가 조금 짙다 싶으면 중년 남자는 입에 머금었던 술을 내뿜었는데 그럴 때마다 파지직 소리와 함께 안개는 사라져버렸다.
“정아, 이 안개의 서늘함도 네 몸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구나. 그래도 널 안고 있으면 난 마음이 편안해져.”
★ ★ ★
며칠 뒤, 안개는 조금씩 옅어지기 시작했다. 홍접은 지난 며칠 동안 얼음 조각상을 두 번 바꾸었다. 끝을 향해 다가갈수록 안개의 한기는 더욱 짙어졌고 종국에는 갑자기 보라색 안개 한 줄기가 나타나 조각상을 가루로 부숴버리기까지 했다. 홍접은 자신과 영혼으로 연결된 법보인 그 장미를 꺼낸 끝에 겨우 그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그녀는 영력에 상당한 손상을 입어 위중한 상태였다. 허나 낯빛이 창백해진 와중에도 그녀는 때때로 한제를 살피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