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242
한제는 여기까지 오는 동안 무척 놀라고 있었다. 만약 자기 혼자였다면 절대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 분명했다. 특히 그 보라색 안개는 여파만으로도 자신의 반신(半身)이 얼어붙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일반적인 화신기 후기 수련자도 이곳에서는 한 발짝 내딛기도 힘들 것 같았다. 홍접처럼 얼음이나 눈과 관련된 기술을 익힌 사람만 무사할 수 있을 것이다. 역시 치호가 홍접에게 제안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고 푸른 안개는 마침내 완전히 흩어져 사라졌다.
세 사람이 빙하 끄트머리에 이르자 홍접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내 할 일은 다 끝났다. 이제 더는 손을 쓰지 않겠어.”
치호는 하하 웃으며 정중하게 포권을 한 뒤 말했다.
“홍접, 이제 우리에게 맡기고 지난 며칠간 영력 소모가 심했으니 푹 쉬게.”
말을 마친 치호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한제를 바라보며 그와 홍접 사이를 막아섰다. 그 모습에 한제는 빙그레 웃었다. 만약 치호가 아니었다면 한제는 홍접이 약해진 틈을 타 손을 쓰려 했을 것이다. 치호의 행동은 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실 한제는 홍접이 그렇게까지 약해졌으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홍접은 어쩌면 일부러 그런 모습을 보여 자신이 덤벼들게 만들려는 건지도 몰랐다. 정말 그토록 큰 영력을 소모했다면 단약이라도 복용하는 게 일반적일 테니 말이다.
성라반(星羅盤)
치호가 저물대를 두드리자 한 줄기의 푸른빛이 나왔다. 그 빛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부풀어 오르더니 거대한 나침반이 되어 전방 1백 척 밖에 있는 검은색 허무의 공간을 가리켰다.
“거마족의 보물, 성라반(星羅盤)?”
홍접은 예쁜 눈으로 나침반을 주시하며 흥미로운 듯 물었다.
한제는 나침반을 바라보았다. 그 위에는 굉장히 복잡한 도안들이 새겨져 있어 무척 비밀스러워 보였다. 심지어 그것을 힐긋 보자마자 그것에 의해 온몸의 신식이 흡수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에 한제는 신식을 얼른 거두었다.
고대 신 서사의 기억 속에도 이 성라반에 관한 정보가 있었다. 심지어 그 제작 방법도 있었으나, 제작에 필요한 대부분의 재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진짜 성라반이라면 나의 경지로는 구동시킬 수 없을 걸세. 이것은 모조품일 뿐이야. 진정한 성라반에 비하면 효능은 훨씬 떨어지지.”
치호가 웃으며 말했다.
홍접은 고개를 끄덕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홍접, 이 나침반 서쪽에 자체 방어막이 있네. 그곳에 앉아 기력을 회복하게. 보장하건대, 이 허무의 공간에서 그 누구도 자네를 해하지 못할 걸세.”
치호는 말을 마친 뒤 한제를 향해 씩 웃어보였다.
홍접은 나침반의 서쪽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순간 그녀의 사방에 푸른 빛의 장막이 하나 나타났다.
“천우, 동쪽은 자네의 통제가 필요하네. 이 허무의 공간에는 괴이한 생물들이 많으니 자네의 그 영혼들로 주변을 지켜주게. 또한 허무의 공간에서는 절대로 아무것이나 덥석 건드리거나 신식으로 살피지 말게. 그랬다가는 정말 큰일 날 걸세. 시오 시조께서 몇 번이고 당부하신 말씀이네!”
치호는 말을 마친 뒤 앞으로 한 걸음 나서 성라반의 정중앙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한제 또한 동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 나침반은 다섯 명이서 구동하는 것이 가장 적합해 보이는데?”
한제는 남쪽과 북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다네. 만약 여기에 두 명이 더 있다면 이번 여정은 훨씬 수월해지겠지만 그리되면 그곳에서 얻는 수확 역시 다섯으로 나누어야 하지.”
웃으며 말을 마친 치호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더니 두 손을 움직여 나침반을 꾹 누르며 크게 외쳤다.
“천우, 허무의 공간 속에서 만약 이 나침반이 붕괴한다면 우리는 살아남을 수 없네. 매우 중요한 일이니 힘을 아끼지 말아주게. 난 방향을 조절해야 해 다른 것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으니 자네만 믿겠네!”
한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금번을 꺼내 쥐었다. 순간 그의 온몸이 검은 안개로 뒤덮였다. 만약 치호나 홍접이 기습을 한다 해도 이 금번이 잠시의 시간을 벌어줄 것이다. 최소한의 방비는 언제든 해둬야 하는 법이었다.
이 모습에 치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라 해도 그리했을 것이다.
치호는 두 눈을 감고 영력을 한 움큼 토해냈다. 순간 나침반이 한 번 진동한 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수만 척을 이동했다. 순간이동이 아니라 빠르게 이동한 것이었다.
한데 그 순간, 어떤 기이한 힘이 나침반을 뒤덮었다. 그 기이한 힘이 작용하자 한제는 자신의 신식이 그 안으로 빨려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홍접과 치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건 이 나침반의 힘이네. 허무의 공간 속에서 움직이는 동안 우리 세 사람은 입을 통해 대화할 수는 없네. 이곳에서는 오직 신식을 통해서만 교류할 수 있어.”
치호는 신식을 통해 그의 생각을 전했다.
“천우, 이 성도(星圖)를 기억한 뒤 그 혼을 퍼뜨리게. 만약 이상 상황을 발견한다면 곧장 내게 알려주고.”
수많은 선과 점으로 이루어진 지도 한 폭이 기이한 힘 속에서 나타나자 한제는 곧장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성도를 본 한제는 오른손으로 미간을 두드렸다. 순간, 그가 가진 유혼의 3분의 1 정도가 그의 미간으로부터 쏟아져 나와 사방을 배회하다가 먼 곳으로 날아갔다.
‘이 성라반은 정말이지 기이하군. 우주를 돌아다닐 때 필수겠어. 기회가 된다면 꼭 하나 찾아야겠군. 재료만 구할 수 있다면 내가 직접 만든 성라반이 가장 좋기는 할 텐데…’
한제는 성라반에 대해 상당한 흥미를 느꼈다.
이 나침반의 속도는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해 눈 깜짝할 사이에 이미 자취를 감춘 채 허무의 공간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한편 성라반의 사방을 배회하던 수 천 마리의 유혼들은 허무의 공간에 들어온 뒤 물 만난 고기처럼 즐거워하며 퍼져나갔다.
한제는 신식을 펼치지 않은 상태였지만 유혼들과는 감응할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제의 안색이 바뀌었다.
“전방 10리 밖에 뭔가 있어!”
한제가 신식을 통해 치호에게 말했다.
전방 10리 쯤 떨어진 곳에서 어느 거대한 생물 하나가 느릿하게 흔들거리고 있었다. 수많은 굵은 촉수들은 그 문어 같은 몸의 흔들림에 따라 움직였다. 근처의 유혼 하나가 촉수에 닿자마자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한제는 숨을 들이마시며 방금 그가 목격한 장면을 신식을 통해 전달했다.
치호는 나침반의 방향을 조정해 옆쪽으로 빙 돌아갔다. 그러는 와중 기이한 생물이 뻗은 촉수 하나가 나침반 가장 자리를 휙 스쳐갔다.
쾅.
나침반은 거세게 진동하더니 격렬한 흔들림과 함께 북쪽으로 날아갔다.
한제는 엄습해오는 강력한 힘을 느꼈다. 오장육부가 수만 근의 힘에 충격을 받아 뒤틀리는 것 같았다. 피가 울컥 솟아올랐지만 한제는 가까스로 토해내지 않고 그대로 삼켰다.
나침반은 아직도 회전하면서 눈 깜짝할 사이에 먼 곳으로 날아갔다.
치호의 얼굴은 붉어져 있었고 입가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두 눈까지 시뻘게진 그는 큰 소리로 기합을 넣었다. 한참 뒤에야 나침반은 천천히 안정을 되찾았고 치호는 온 몸이 텅 빈 것처럼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저물대에서 단약을 꺼내 삼켰다.
홍접 또한 매우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치호가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신식을 통해 말했다.
“천우 도우가 미리 발견해줘서 다행이네. 그러지 않았다면 이번에 우리 세 사람 모두 목숨을 잃었을 거야.”
“그건 뭐였지?”
홍접이 물었다.
“나도 모르겠네. 허나 선계의 허무 속에서 사는 생물이라면 그 힘은 절대 우리가 어쩔 수 없을 거야. 촉수 하나에 그것도 그저 살짝 스쳤을 뿐인데 우리는 죽을 뻔하다니, 무섭군!”
치호는 아직도 가슴이 떨이는 듯 말했다.
“그 생물의 이름은 허(虚)일세.”
한제가 말했다.
“천우 도우는 그 생물을 아는가?”
치호가 놀라며 물었다.
“허는 비교적 작은 편에 속하네. 대지의 생기를 삼키고 음기를 토하지. 상고시대의 수련자들도 여럿이서 포위를 해야만 승산이 있는 상대였어.”
한제가 말했다.
고대 신 서사의 기억에 따르면 그 생물의 몸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다. 하나는 촉수로 이는 굉장히 진기한 연기(煉器) 재료였다. 두 번째는 뇌였다. 그것을 삼키면 수명을 증가시킬 수 있었다. 세 번째는 허의 내단인데 그것으로 술을 빚어 마시면 1만 근의 힘을 얻을 수 있다.
“천우 도우의 넓은 견문에 탄복할 따름이네.”
치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말이 거짓인지 누가 알겠어? 멋대로 지어낸 이름인지도 모르지.”
홍접은 콧방귀를 뀌며 냉정하게 말했다. 그 말에 한제는 덤덤하게 말했다.
“무식한 말을 지껄이는군!”
그의 말에 홍접이 눈을 번득였다.
치호가 두통을 느끼며 막 둘 사이에 끼어들려 하던 그때, 한제가 입을 열었다.
“저 생물은 평소에는 촉수를 거두고 있다가 오직 사냥할 때에만 펼치지. 치호, 최대한 빨리 북쪽으로 가세. 저 녀석이 사냥할 때에는 넓게 기운을 퍼뜨리는데 그 기운이 붉은색이 되면 우리로서는 막을 수가 없네.”
여기에서 더 북쪽으로 간다면 완전히 방향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래서 치호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홍접처럼 입 밖으로 내지만 않았을 뿐, 그 역시 한제의 말을 완전히 믿지는 못하고 있었다.
한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발을 굴러 나침반을 빠져나갔다. 금번으로 온몸을 감싼 그는 곧장 북쪽으로 내달렸다.
“천우!”
치호가 놀라 소리쳤다.
“너도 따라 가든지. 난 저자의 말을 믿을 수 없으니까.”
홍접이 냉랭하게 말했다.
치호는 이를 악문 채 위험을 무릅쓰고 신식을 펼쳤다. 줄곧 남쪽으로 신식을 뻗던 그의 표정이 곧 딱딱하게 굳었다. 멀리서 나타난 붉은 기운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었다.
깜짝 놀란 치호는 나침반을 통제해 북쪽으로 달아났다. 마찬가지로 신식을 펼치던 홍접 역시 흠칫 놀랐다.
한제는 나침반을 떠난 뒤 빠른 속도로 북쪽으로 내달렸다. 그 붉은 기운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지 못했지만 서사의 기억에 따르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정도였다. 그래서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침반을 떠나 혼자라도 도망친 것이다.
그 무렵, 치호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최대한 빨리 나침반을 움직였다. 하지만 그 붉은 기운은 끔찍하게도 단 몇 초 만에 그를 따라잡았다.
쩌적!
나침반의 일부가 그 붉은 기운에 닿은 순간 사라져 버렸다. 마치 산 채로 무언가에 삼켜진 듯한 모양새였다.
나침반이 급격하게 흔들렸고 치호는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 홍접의 얼굴 역시 붉어지기 시작했다.
“홍접, 도와주게! 난 나침반을 조종해야 해서 저항할 수 없네!”
치호가 소리쳤다. 이마에 구슬땀이 맺힌 그는 속으로 후회했다. 천우의 경고를 무시하는 게 아니었는데… 이 나침반의 속도로 이 난리를 어떻게 헤쳐 나간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