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26
꿈속에 들어온 순간, 한제는 곧장 모든 신식을 펼쳤다.
1각, 2각, 1시진⋯⋯.
하지만 석주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고 한제는 고민에 빠졌다.
“석주에는 신식을 남길 수 없는 걸까?”
바로 그때, 가까이에 있던 긴 막대형 발광체가 갑자기 빛을 발하더니 점점 어두워졌다. 한제는 그 광경에 흠칫 놀랐는데 바로 이어서 연쇄적인 반응이 일어났다. 발광체들은 하나하나 빛을 잃었고 마침내 꿈속 공간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에 잠겼다.
한제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상황을 오랫동안 관찰했지만 어떤 이상 상황도 발생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멍청한 놈. 겨우 꽉 찬 영동(靈動) 단계에 이르렀건만 하늘이 내린 구슬에 무슨 현상이 발생하기만을 기다리다니!”
갑자기 어디에선가 늙은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제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꿈속 공간에서만 20년을 훌쩍 넘게 보냈건만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선배도 몰라보다니, 멍청한 후배로군.”
한제는 헛숨을 들이켜고는 공손히 포권 자세를 취했다.
본디 똑똑한 사람인 한제는 상대가 갑작스럽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줄곧 석주 안에 있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 긴 시간 동안 자신은 저 노인의 감시 속에서 살아온 셈이었다.
“고작 응기 3단계인 조무래기 따위에게 본좌의 이름을 알려줄 생각은 없다. 네가 보내온 30년에 달하는 시간 역시 본좌와 석주의 도움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지. 영기가 충만한 이곳에서 수련할 수 있게 해줬는데 지금 네 꼴은 정말이지 실망스럽구나. 더구나 이제야 신식으로 석주를 관찰할 생각을 하다니!”
한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전에도 신식으로 석주를 관찰해본 적은 있었지만 지금처럼 오랜 시간을 들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더 이상은 네놈의 어리숙함을 보고 있을 수가 없다. 수련이란 본디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다. 그런 놈이 순해 빠져서야 되겠느냐? 나였다면 날 모욕한 자들을 싹 다 눈깔을 뽑고 죽여 버렸을 것이다. 특히 그 이산인가 뭔가 하는 놈은 혼을 지옥에 처박아놓고 그 집안사람들까지 멸했겠지. 그나마 그 장호인가 하는 아이가 마음에 들더군. 그 아이를 보거라. 자신을 괴롭히는 자를 도끼로 찍어 죽이지 않았느냐!”
한제는 씁쓸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선배님, 저는⋯⋯.”
“닥쳐라! 본좌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네놈은 더구나 문파에 봐줄 만한 계집들이 있는데도 즐기지 못하는 게냐? 나였다면 지금쯤…”
눈이 휘둥그레진 한제는 입을 떡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 녀석아, 내게 즐거움을 좀 달란 말이다! 네가 빨리 영변(嬰變) 단계에 접어들어야 본좌가 여기서 나갈 수 있단 말이다!”
넋이 나간 와중에도 한제는 궁금증을 참지 못했다.
“선배님, 아까부터 말씀하신 영동 단계니 영변 단계니 하는 건 도대체 뭡니까?”
“직접 생각이란 걸 좀 해봐라! 어휴, 됐다. 이딴 3성 수련국의 조무래기 따위가 생각해봐야 답을 얻을 리가 없지. 흥! 잘 들어라. 영동 단계는 4성 이상 수련국에서 기초 수련자를 가르는 방법이다. 너희가 말하는 응기 단계와 비슷하지만 그 범위가 훨씬 넓지.”
한제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집중했다.
“너희 3성 수련국은 경계를 응기, 축기, 결단, 원영 이렇게 네 개로 나누지 않느냐? 화신기로 말할 것 같으면 너희들의 입장에서는 전설 속 세상처럼 여겨질 것이고. 3성 수련국에서 화신에 이른 인물이 나타나면 너희들이 살고 있는 나라의 등급이 높아져 4성 수련국이 된다. 그럼 수련 연맹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자격과 국외 수련성을 쟁탈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동시에 수련 연맹을 지킬 사명을 지게 되지. 그리고 4성 수련국에서 영변 단계에 이른 인물이 나오면 5성 수련국으로 등급이 높아진다.”
한제는 다시 한 번 쓴웃음을 지었다.
“어어… 이 후배에게는 너무나 먼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헛소리 마라! 6성 수련국의 절대 고수인 본좌가 돕는다면 너 같은 새대가리라 해도 영변 단계 정도는 진입할 수 있다. 본좌는 지난 수십 년간 네가 좌선을 할 때마다 원영 정화를 통해 널 도왔다. 본좌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네놈은 절대 지금 수준에도 이르지 못했을 게야. 게다가 나의 원영 정화를 흡수했으니 본좌와 동급인 고수를 만나지 않는 이상, 누구에게도 그 실력을 들키지 않을 것이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말들이었다. 허나 노인의 말은 아직 끝이 아니었다.
“또한 천역(天逆)의 구슬 ‘천역주(天逆珠)’도 네 손에 있으니 두려워할 필요 없다. 사실 본좌는 이 신비의 보물을 빼앗으려다가 모든 힘을 다 써버리고 육신이 훼손되어, 혼백까지 흩어질 찰나에 가까스로 이 안으로 숨어들었지. 적당한 몸뚱이만 찾으면 바로 빼앗으려고 했더니, 이 망할 천역 구슬에 육체를 잃은 채 들어온 영혼이 다시 나갈 수는 없더군.”
또 한제로서는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솔직히 처음 네놈이 온 걸 봤을 때에는 네 몸을 빼앗을 생각이었다. 허나 천역 구슬이 마치 새장처럼 날 가두고 있어서 그럴 수가 없더구나. 그리고 한참을 연구한 끝에 이 천역 구슬은 주인을 인식해야 무슨 작용이든 할 수 있고 그런 후에야 나도 이곳에서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지.”
자신의 몸을 뺏으려 했다는 말에 한제는 등골이 오싹했다. 노인은 아까부터 섬뜩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천역 구슬은 금(金), 목(木), 수(水), 화(火), 토(土)의 다섯 가지 원소를 모아야 주인을 알아본다. 하지만 그 원소를 다 모은다 해도 최고 영변 단계에는 이르러야 날 나가게 할 수 있어. 그러니까 이 녀석아, 빨리 수련이나 해! 그리고 때가 되면 내게 적당한 몸을 찾아줘라. 그럼 이 사도환은 그 은혜를 잊지 않고 앞으로도 널 돕겠다.”
자신을 사도환이라 밝힌 노인의 말에는 점점 애원의 빛이 어렸다.
잠시 멍해 있던 한제가 막 대답을 하려던 때, 사도환이 다급히 외쳤다.
“누가 온다!”
순간 온몸이 찢어지는 듯한 느낌과 함께 한제는 몸을 바르르 떨며 현실 세상에서 눈을 번쩍 떴다.
신식으로 주위를 훑은 한제는 순간 두 남녀를 발견했다. 그 둘은 조심스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다가 10여 장 정도 떨어진 곳에 멈추더니 서로 입을 맞추고 밀어를 속삭이다가 옷을 전부 벗고 뒤엉켰다.
둘은 일찍이 합동 훈련에 참가했던 터라 한제도 그들을 알고 있었다. 호기심에 둘의 모습을, 특히 여자 사제의 모습을 한동안 몰래 살피던 한제는 조심스럽게 그곳에서 빠져나와 방으로 돌아왔다.
침상에 앉아 한제는 사도환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은혜를 갚겠다는 등의 말은 믿을 수 없었지만 수련계의 등급에 관한 이야기는 거짓이 아닐 듯했다. 굳이 그런 것까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을 테니 말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한제는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교류
사흘 뒤, 대산파와 현도종의 교류가 정식으로 시작되었다. 두 문파의 경쟁은 오랜 시간 이어져 온 전통이었기 때문에 번잡한 과시 따위는 없었다.
교류는 대산파가 자리한 산에서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 장송봉에서 열렸다.
대산파의 가장 중요한 장소 중 하나인 장송봉은 그 영기가 뒷산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짙은 곳으로 결단기에 이른 두 명의 여자 자제가 바깥세상과 단절한 채 수련을 하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장송봉 꼭대기에는 이 교류를 위해 준비해둔 돌계단이 있었고 그 사방에는 여덟 개의 거대한 백색 옥석이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백색 옥석에는 5백 년의 찬란한 역사가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충만한 기운이 여덟 개의 옥석으로부터 발산되었다. 이 기운이 강력한 살의로 변해 뼈와 혼을 뚫고 들어오는 듯했다.
“황용 도우, 이 옥석들은 볼 때마다 느낌이 다르니, 과연 조나라 수련계의 중요한 보물이라고 할 만하군요!”
구양 노인이 감탄하며 소매를 휘둘러 엄습해오는 옥석의 살기를 물리쳤다. 그 뒤에 서 있는 현도종의 제자들은 무척 놀란 기색이었다. 구양 노인이 아니었다면 옥석의 강렬한 살기조차 견뎌내지 못했을 것 같았다.
“우리 대산파의 선조께서 직접 만든 보물 아니겠소. 옥석 주변 1백 장 이내에 들어오기만 하면 우리 대산파의 제자들도 살기의 영향을 받는다오. 이 사실에 대해서는 구양 도우도 이미 알고 있을 것 아니오. 그러니 미안하지만 이해를 바라오!”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대꾸한 황용 진인은 두 손을 휘저어 법인(法印)을 취하며 조용히 구결을 중얼거렸다. 그러자 부드러운 빛이 여덟 개의 백색 옥석에서 흘러나와 온 장송봉의 안개를 뒤덮더니 두 개의 커다란 손이 안개를 휘저었고 흘러넘치는 듯했던 살기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규칙대로 이번 교류는 우리 현도종에서 먼저 시작하죠. 류풍, 네가 나가거라!”
류풍은 현도종 제자 중 영기의 뿌리를 가진 남자 제자였다. 그는 살짝 미소를 짓고 깊은 숨을 들이마시더니 땅을 박찼다. 번개처럼 빠르게 날아올랐다가 중앙에 있는 높은 무대에 착지한 그가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현도종 류풍, 대산파에 가르침을 청합니다!”
한제는 손대주의 뒤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차피 자신이 나갈 일은 없을 테니 마음이 편했다.
한제의 등에는 금빛으로 빛나는 금부 비검이 매여 있었다. 붉은색의 옷 덕에 그의 모습은 제법 위풍당당했다.
제자의 차림에 대해 손대주는 상당히 만족했다. 한제가 응기 3단계에 진입한 뒤로는 그를 이전처럼 싫어하지는 않았다. 비록 여전히 좋게 여기지는 않았으나, 어쨌든 이제 자신의 제자로 여기긴 했다. 물론 계속해서 응기 3단계에 머물러 있게 된다면 다시 예전처럼 미워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지난 사흘 동안 한제는 거의 밖에 나가지 않고 대부분의 시간을 꿈속 공간에서 사도환과 대화하면서 보냈다. 이야기에 따르면 사도환은 6성 수련국인 주작나라의 최강자로 그 힘이 어마어마했다. 또한 고집이 셌고 보물을 얻기 위해서라면 사람을 죽이는 것도 서슴지 않는 자였다.
류풍의 등장으로 현장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황용 진인은 류풍을 살피다가 낮게 읊조렸다.
“조룡, 가라!”
평소 과묵하기로 유명한 조룡은 합동 훈련 중에 응기 6단계에 이른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첫 번째 시합에서 응기 6단계에 이른 제자를 내보내는 것은 이전의 대산파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구양 노인은 그러나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류풍, 이건 첫 시합일 뿐이니, 실력은 반 정도만 발휘하거라!”
그 말에 대산파 사람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대산파 사숙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현도종을 향한 차가운 눈빛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손대주는 히히 웃으며 한제에게 조용히 말했다.
“제자야, 잘 보거라. 이번 교류는 꽤나 치열할 것 같구나. 현도종에서 저렇게 버릇없이 구는 것도 처음 있는 일이다.”
동문들의 분노 어린 표정을 본 한제는 류풍을 자세히 살폈다. 그의 몸은 여전히 안개와 같은 무언가로 덮여 있어, 신식을 통해서도 살필 수 없었다. 대체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가진 자인지도 예측이 어려웠다.
류풍은 오른쪽 무대에 서서 우아하게 웃었다.
“조 사형, 장로님의 분부가 떨어졌으니, 이번 시합에서는 반 정도의 실력만 쓰겠습니다.”
보통 크기의 몸집에 얼굴이 까만 편인 조룡은 신선보다는 장수에 가까운 외모였다.
그는 침착한 눈으로 류풍을 바라보더니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류 사형, 잘 부탁드리죠!”
말을 마친 그가 땅을 박차자 우윳빛의 연꽃 한 송이가 그의 발아래에서 떠올랐다. 이 연꽃은 빠르게 날아, 곧장 부풀더니 조룡의 주위를 배회했다. 꽃잎 하나하나에서 서늘한 검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 순간, 바람이 불지도 않는데 조룡의 옷이 흔들리며 휘파람 부는 듯한 소리를 냈다.
황용 진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조룡의 연꽃 검기 기술은 중급 정도의 위력을 갖추었지. 훌륭해.”
“하하, 사형. 조룡은 제가 제일 아끼는 제자 아닙니까. 타고난 자질도 나쁘지 않고 수련도 열심히 했지요. 저 기술은 녀석이 혼자 터득한 것으로 불과 5년 만에 저런 수준을 갖추었습니다!”
붉은 얼굴의 노인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연꽃 검기는 공격의 일종이다. 너희도 잘 보고 배워두도록. 흔한 기회가 아니다.”
허도 사숙이 미소를 지으며 다른 제자들에게 말했다.
이산은 눈을 가늘게 뜬 채 그의 말에 따르는 척했지만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했다.
‘흥! 5년이나 수련하고도 고작 저 정도라니, 우습군.’
“조 사형은 평소에 과묵한 분이라 저 정도인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손호경이 감탄했다.
그때 돌로 된 무대 위에 있던 조룡이 크게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