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269
잠시 고민하던 청년은 앞으로 몇 발짝 내딛었다. 하지만 놀랄 만한 위압감에 다시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호 씨 노인의 표정도 살짝 굳었다. 그는 그 산골짜기 안에서 높은 탑 하나와 그 아래에 앉아 있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허나 마치 시체처럼 그 사람에게서는 생명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하얀 옷의 청년은 다시 몇 번이고 시도해보았지만 10리 안으로 딱 한 번 진입했을 뿐 결국 산골짜기 밖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그는 그늘진 얼굴로 포권을 하며 소리 높여 외쳤다.
“나는 주작국의 손옥산이오. 천우 도우를 만나러 왔소!”
“천우!”
호 씨 노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의 눈은 그 보탑 아래에 있는 시체로 향했다. 그가 놀라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천우는 근 몇 년간 수마해에서 가장 주목받는 신성(新星)으로 그에 관한 소문은 차고 넘쳤다. 그가 주작국에서 비밀리에 길러낸 고수라는 소문도 주작이라는 이름을 승계할 계승자라는 소문도 있었다. 홍접의 한 팔이 뜯겨 나갔는데도 주작국에서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은 분명 이상했다.
그런가하면 그는 어느 은거 수련자의 제자로 홍접을 뛰어넘는 천부적인 자질의 소유자라는 소문도 있었고 어느 비밀 세력의 일원인데 그 세력 안에는 그보다 수준이 훨씬 높은 수련자가 많아 주작국에서도 감히 그를 어쩌지 못하는 것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심지어 천우의 수련 기간은 60년이 채 안 되기 때문에 주작국 입장에서 홍접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존재라는, 매우 과장된 소문도 있었다.
하얀 면사의 여인도 면사 안에서 두 눈이 밝아졌다. 천우라는 자가 자신을 도와준다면 거사에 성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유명한 천우가 이곳에 있을 줄이야!”
구사평이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
“주작국의 사자가 초나라에 온 이유가 있었군!”
허루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 천우라는 자 초나라와는 무슨 관계일까⋯⋯.”
연기각 소녀는 생각에 잠겨 중얼거렸다. 그러자 호 씨 노인이 가라앉은 얼굴로 분부했다.
“운천종으로 사람들을 보내는 것은 취소한다.”
허루오는 흠칫 놀라더니 얼른 그러겠다고 답했다.
그 무렵, 하얀 옷의 청년은 기다려도 산골짜기 안에서 답이 돌아오지 않자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이번에 온 것은 도우와 홍접 사이의 일을 벌하기 위함이 아니오. 홍접을 대신해 도전장을 전하러 왔을 뿐이니 모습을 드러내시오.”
그의 말에 절벽 위에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바뀌었다. 호 씨 노인은 산골짜기 안쪽을 살폈다.
허나 한참이 지나도 여전히 답은 없었다. 주작국의 제자인 손옥산은 내심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어느 나라에서도 심지어 5성 수련국에서도 이런 대접을 받은 적이 없었다.
“도우, 공연히 나중에 후회할 일은 하지 마시오. 우리 주작국에서 보내온 서신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은 주작성 안에 아무도 없소!”
손옥산은 분노를 억누르며 힘주어 말했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거대한 힘이 산골짜기 안에서 뿜어졌다. 뒤이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 하나가 갑자기 나타나 청년을 꽉 틀어쥐었다. 이따금 그 손바닥에서 키긱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손옥산의 얼굴이 붉어졌고 이마에는 땀이 맺혔으며 눈에는 놀란 빛이 어렸다.
“나는 주작국의 사자다. 천우, 이렇게 충동적으로 굴지 마라. 나는 그저 도전장을 전해주러 왔을 뿐이야!”
“날짜!”
담담한 목소리 하나가 골짜기 안에서 느릿하게 흘러나왔다.
손옥산이 얼른 말했다.
“3개월 뒤, 주작국의 서산(西山) 천단(天壇) 위다.”
“넌 어떻게 내가 이곳에 있는 걸 알았지?”
천우, 즉 한제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는 살기가 배어 있었다.
손옥산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얼른 입을 열었다.
“그건 나도 모른다. 주작산에서 알려줬을 뿐이다.”
산골짜기 안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절벽 위에 선 백발노인의 얼굴이 미묘하게 변했다. 이내 뭔가가 생각난 듯 화들짝 놀란 그가 고개를 돌려 보니 구사평의 얼굴 역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야인(野人) 잔당
“3개월 후라… 거부한다.”
한참 후에야 한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손옥산의 몸을 틀어쥔 무형의 손도 흩어져 사라졌다. 그의 등은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천우가 홍접 사저의 팔을 뜯어낸 것은 기습이나 비열한 수단을 펼친 덕이라고 생각했던 손옥산은 처음으로 그 힘을 경험하고는 몸서리를 쳤다.
한제의 대답에 잠시 망설이던 손옥산은 공손하게 포권을 하며 말했다.
“도우, 이것은 주작산의 명이야. 주작산이 명을 내린 것은 지난 1백 년 동안 딱 세 번 뿐이었네. 첫 번째는 홍접을 주작국의 핵심 제자로 들이라는 것, 두 번째는 자네의 흔적을 찾지 못하도록 하라는 것이었지. 그리고 이번에 도우의 위치를 알려줌과 동시에 홍접과의 결전을 명했네. 만약 도우가 승리한다면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것이야.”
“홍접에게 전해. 우리 싸움은 10년 후가 될 거라고…”
손옥산은 한참이나 멍하니 있다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포권을 취한 뒤 도전장을 들고 자리를 떠났다. 그는 왔을 때처럼 긴 잔영을 그리며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옛 친구들이여, 들어오게.”
한제의 목소리가 울린 순간, 1백 리에 펼쳐져 있던 결계가 사라졌다.
호 씨 노인은 하하 웃으며 몸을 훌쩍 날려 산골짜기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뒤로 하얀 면사를 두른 여인과 그녀의 늙은 종이 따랐다. 잠시 머뭇거리던 구사평도 허루오와 소녀마저 움직이자 마지못해 산골짜기로 들어섰다.
그들은 곧 보탑과 그 아래의 마른 시체 한 구를 볼 수 있었다. 허나 그 시체는 살짝 미동하더니 요란한 소리를 냈고 한참 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일어선 한제는 그들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가 오른손을 휘두르자 빽빽한 흰 안개가 그의 몸을 감쌌다. 안개가 사라졌을 때에는 하얀 옷을 입은 한제가 그들의 눈앞에 나타나 있었다. 지난 1년 동안 몸에 쌓였던 먼지와 때는 이미 싹 사라진 상태였다.
한제가 오른손으로 땅을 가리키자 순간 돌 탁자 하나와 몇 개의 돌 의자가 솟아 나왔다.
“앉으시게.”
탁자에 앉은 한제가 손을 휘두르자 다기들이 나타났다.
호 씨 노인은 한제의 맞은편에 앉았다. 노인의 뒤를 따르던 소녀도 얼른 앞으로 다가오더니 나서서 다기를 들어 차를 따라냈다.
“거기 도우도 앉지.”
한제는 하얀 면사를 두른 여인 곁에 선 푸른 옷의 노인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한제를 한참이나 바라본 후에야 그는 상대가 일면식이 있는 사람임을 기억해냈다. 복잡한 심경으로 한제를 바라보던 그도 탁자에 앉았다. 이어 나머지 사람들도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호 씨 노인은 한제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한제라고 불러야 할지 천우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군.”
한제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더니 웃으며 말했다.
“이름은 호칭에 지나지 않지. 집착할 필요 있겠나.”
하얀 면사의 여인은 복잡한 심경이 어린 눈으로 한제를 바라봤다. 그 유명한 천우가 눈앞의 이 사람일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10년이 지났는데 낭자의 자태는 이전과 같군. 연기각의 늙은 도우와 동행한 것을 보면 선유지로 가려했던 것인가?”
한제가 웃으며 물었다.
“당시 소녀가 선배님의 신분을 몰라 뵈었습니다.”
여인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에게는 이름이, 나무에게는 그림자가 있다. 과연 천우라는 이름이 주작성에서 갖는 명성은 굉장해, 호 씨 노인도 감명 받았을 정도이니 그녀는 오죽했겠는가.
한제는 찻잔을 내려놓더니 구사평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도우, 모든 것을 포기하고 혈혈단신으로 임해야만 천도를 깨달을 가능성이 있다네.”
그 말에 구사평은 쓰게 웃으며 한탄하듯 말했다.
“화신기에 이르기는⋯⋯ 몹시 어렵군.”
호 씨 노인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더니 순간 놀란 얼굴로 물었다.
“도우, 이 차는⋯⋯?”
“주작성의 차가 아닐세. 여러 해 전 선계에 갔다가 얻게 되었지.”
호 씨 노인은 한제를 바라보며 주저하듯 말을 꺼냈다.
“도우, 선계에서 선기(仙氣)는 얻으셨는가?”
“우연히 얻었지.”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가는 충분히 지불할 테니 선기를 조금이라도 줄 수 있겠나? 부탁하네.”
한제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급하게 굴지 말게. 도우가 영변기에 이를 때쯤 다시 말해도 늦지 않을 테니. 도우는 이번에 선유지에 가서 뭘 할 생각이었나?”
호 씨 노인은 한제가 상당히 약삭빠른 자임을 알고 있었기에 은근슬쩍 화제를 바꾸자 하하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영변기에 이를 때쯤 염치불구하고 꼭 도우를 찾아와야겠군. 선유지에 대해서는 여기 자심 도우가 설명해줄 걸세.”
하얀 면사를 두른 여인이 한제를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선유지 깊은 곳에는 윤회수(輪回樹)가 한 그루 있습니다. 제게는 그곳으로 갈 수 있는 지도가 있지요.”
한제는 덤덤한 묘정으로 묵묵히 차를 마셨다. 연기각 소녀는 얼른 한제의 찻잔을 새로 채워준 뒤 그의 곁에 앉아 아름다운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구사평과 허루오는 윤회수라는 말에 눈빛을 번득였다. 허나 한제만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호 씨 노인에게 처음 윤회수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와 같은 반응이었다. 이에 자심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화신기 수련자들은 실력뿐만 아니라 자제력 역시 원영기 수련자를 월등히 능가하는 것인지, 한제의 의중을 짐작조차 하기 어려웠다.
호 씨 노인 역시 한제의 표정에 조금의 변화도 없는 것을 보며 내심 천우에 관련된 소문을 다시금 상기했다.
“윤회수 아래에서 좌선을 하면 윤회에 대한 깨달음을 하나 더 얻을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특히 화신기 수련자의 경지에 큰 도움이 된다는군요.”
이번만큼은 한제도 혹할 것이라 여겼으나, 자심은 이번에도 표정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 한제를 보며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한제는 호 씨 노인을 바라보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엉터리. 화신기의 경지는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야만 해. 그 윤회수라는 것이 원영기 후기 절정에 이른 수련자나 막 화신기에 이른 수련자에게는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으나 화신기 중기의 수련자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 텐데? 그런데도 자네가 이리 걸음한 데에는 분명 다른 이유가 있겠지?”
호 씨 노인은 하하 웃으며 숨기지 않고 털어놓았다.
“과연 통찰력이 대단하군. 감탄했네. 그래, 분명 그렇다네.”
자심이 미간을 찌푸리며 바라보자 호 씨 노인이 웃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