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272
“완아⋯⋯. 나는 어느 해, 어느 달, 어느 날에 우리가 만났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네가 미소를 짓거나 슬퍼하며 나를 바라보던 눈빛도…”
여자아이의 아름다운 속눈썹이 살짝 떨리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 흰자와 검은자의 구분이 명확한 아이의 두 눈이 한제를 바라보았지만 아이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원영의 수면은 그녀의 나약한 몸에 옛날의 기억을 남겨두지 않았다. 다만 줄곧 마음속에 새겨두려 애쓴 덕에 그의 목소리를 그의 얼굴을 그의 웃는 표정을 잊었더라도 그를 떠올릴 때 느끼던 감정만큼은 영원히 남아 변하지 않았다.
한제를 향한 여자아이의 눈빛이 아득해졌다. 아이는 심지어 한 방울 눈물을 또르르 흘렸다.
한제는 너무도 마음이 아팠다.
그는 여자아이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시간은 흘러가고 세월은 떠날 수 있어도 그의 눈빛만큼은 영원히 존재했다.
“데리러 올게.”
한제는 작은 목소리로 말한 뒤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그가 떠나자마자 여자아이의 두 눈에 부연 물안개가 어렸다. 그리고 아이는 앳된 목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밥을 짓고 있던 부인은 얼른 방으로 들어와 아이를 안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랬다.
아이는 점차 울음을 그쳐갔다. 하지만 아이의 아득한 눈빛은 방 밖을 향하고 있었다.
★ ★ ★
철암은 동굴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 여자아이를 보호한 지난 1년 동안 그는 이미 이렇게 갇혀 있다시피 한 생활에 익숙해졌다. 여비는 반년 전 소리 전달 옥패를 통해 교대를 하자고 했으나 철암은 거절했다.
철암이 수련계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부터 지금까지의 삶을 통틀어 지난 1년 동안 체험했던 것들은 그에게 가장 신선한 경험이었다. 그는 매일 신식으로 마을을 살폈다. 마을 모든 이의 이름 하나까지도 철암은 모두 기억했다.
묘한 느낌이었다. 그는 심지어 최근 몇 개월 동안은 좌선도 잊고 일반인들의 세상을 들여다보는 데 푹 빠져 있었다.
한제는 동굴로 들어와 철암을 본 순간 흠칫 놀라고 말았다.
철암은 얼른 일어나 한제를 보았다.
“그래, 자네는 줄곧 이렇게 깨달음을 얻고 있으니 언젠가 반드시 화신기에 이를 수 있겠군. 다만 모완의 원영을 잘 살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돼.”
한제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철암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한제는 세월의 경지를 담은 나무 조각상 하나를 꺼내 한쪽에 내려놓았다.
“선물로 주지. 잘 느껴보도록.”
말을 마친 한제가 몸을 돌려 동굴을 떠난 뒤 철암은 꼭 뭔가를 느낀 것처럼 멍하니 그 나무 조각상을 바라보았다.
★ ★ ★
수마해의 쇄성란에 있는 고대 신의 몸속, 그 안의 피바다의 땅.
지금의 피바다는 당시와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탁삼이 앉아 있던 그 돌기둥을 제외하고는 모든 돌기둥이 사라진 상태였다.
피바다 안에 있는 사람은 모두 합쳐도 1백 명이 채 되지 않았다. 이들의 미간에는 모두 붉은색의 얇은 선 하나가 있었고 지금 모두 눈을 감은 채 좌선을 하는 중이었다. 그 안에는 고왕 등도 있었다.
이들의 몸에서는 기이한 느낌이 풍겼고 짙은 피비린내가 배어 있었다. 그들이 호흡함에 따라 피바다 안의 혈장이 천천히 그들의 몸에 섞여 들어갔다.
유일하게 남은 돌기둥 위에는 붉은 머리를 허리까지 기른 남자가 가부좌를 튼 채 좌선하고 있었다. 그의 주위 땅바닥에는 손톱으로 긁은 듯한 수많은 흔적이 있었다. 자세히 보면 그 흔적들은 누군가의 이름을 적은 것이었다.
“이한제!”
이 붉은 머리의 남자는 고대 신의 힘의 유산을 얻은 탁삼이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붉은 머리가 얼굴을 뒤덮었다. 그 사이로 드러난 두 눈에는 깊은 원한이 담겨 있었다.
“이한제, 고대 신의 몸은 기력이 쇠하고 있으니 나는 머지않아 이곳을 나갈 것이다. 그때까지 절대로 죽어서는 안 된다. 내가 기억의 유산을 차지할 때까지 살아남아라!”
선유지는 검은 안개로 뒤덮인 깊은 산이었다. 빽빽한 검은 안개가 끊임없이 이어진 산맥 상공에서 배회했다. 그곳은 너무나 고요해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 산맥 깊은 곳에는 거대한 구멍이 하나 있었다. 호 씨 노인과 일행들은 그 구멍 바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이들이 이곳에 온 지도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어떤 위험도 맞닥뜨리지 않았지만 왠지 모를 긴장감이 느껴졌다.
화신기 수련자로서 그는 자신의 그런 느낌에 이유가 있을 것이라 믿었다. 이 거대한 구멍 밖에서 그가 느끼는 놀라움은 갈수록 깊고 짙어져 갔다.
“이한제 도우까지 더하면 화신기 수련자가 셋이니 너무 깊이 들어가지만 않으면 위험하지는 않을 거야.”
호 씨 노인이 중얼거렸다.
몇 년 전 이곳에 와본 적이 있던 그는 당시 세 번째 층까지 들어갔고 그러는 동안 여러 차례 위험을 맞닥뜨리긴 했어도 결국 원하는 물건을 손에 넣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지금 거대한 구멍을 바라보는 호 씨 노인의 안색은 다소 어두웠다.
“자심, 그 윤회수가 세 번째 층에 있는 것이 확실한가?”
호 씨 노인의 질문에 곁에 있던 자심은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시 아버지를 따라 왔을 때 다소 시든 윤회수가 있었던 것을 분명히 기억합니다. 다만 저와 아버지의 경지가 부족하여 그대로 물러나야 했죠.”
호 씨 노인은 고민했다. 세 번째 층이라면 그리 위험한 곳은 아니었다. 게다가 윤회수가 시들어 있다면 야인들의 보호를 받고 있을 리도 없었다.
하지만 이런 사항들에 대해 그는 한제에게 상세히 말하지 않았다.
그때, 하늘을 가르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저 멀리 작은 언덕만큼 거대하고 흉악한 마수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위에는 하얀 옷을 입은 청년 한 명이 있었는데 바로 한제였다.
호 씨 노인은 반갑게 웃었다.
“도우, 어서 오게. 이번 여정은 반드시 성공할 것 같군.”
한제는 몸을 훌쩍 날려 흡혈 마수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고 미소 띤 얼굴로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오래들 기다렸겠군. 오는 길에 작은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조금 늦었네.”
한제가 오른손을 휘두르자 그의 손에 누군가의 머리가 나타났다. 한제는 그 머리를 바닥에 집어던졌다. 그 얼굴은 흙빛이었고 먼지로 가득 뒤덮여 있었으며, 두 눈은 분노로 번득였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는 등나무 넝쿨 같은 검은 낙인이 찍혀 있었다.
“야인!”
호 씨 노인이 흠칫 놀라 외쳤다.
“선유지에 들어선 뒤 줄곧 내 뒤를 따라오더군. 기습을 하려했던 모양이야.”
한제가 말했다.
호 씨 노인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서 오른손으로 그 머리의 미간을 꾹 눌렀다. 순간, 머리에 찍힌 등나무 넝쿨 모양의 검은 낙인이 느릿하게 요동치더니 그자의 미간에 응집되어 나뭇잎 반쪽 같은 기이한 식물로 변해갔다.
“순수한 야인이 아니라 수련자였군. 야인이 이 자의 몸에 촉매를 기생시켜 만들어낸 게야.”
호 씨 노인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한제가 그게 무슨 뜻인지 물으려던 차에 허루오가 먼저 물었다.
“어르신,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설마 이 잎으로 판단하는 겁니까?”
사실 자심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의아한 표정이었다.
야인(野人)
호 씨 노인은 엄숙한 표정으로 그 머리의 미간에 있는 잎을 가리키며 말했다.
“난 비록 진짜 야인을 본 적은 없지만 몇몇 고서에서 밝히기를 잎이 세 개 이상이라야 순수한 야인이고 그에 미치지 못하는 존재라면 촉매를 기생시켜 만들어진 가짜 야인이라더군. 하지만 이런 자들이라 해도 본래는 두 번째 층에는 가야지 볼 수 있는 존재라네.”
바닥에 나뒹구는 야인의 머리를 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호 씨 노인은 잠시 망설이는 듯했으나, 이내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부귀는 위험 속에서 얻어지는 것이라고 했네. 내려가지!”
한제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호 씨 노인이 먼저 구멍 안으로 풀쩍 뛰어내렸다. 그 후 한제가 뛰어내렸고 나머지 사람들이 뒤따랐다.
이 거대한 구멍은 매우 깊어 끝없이 아래로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한제는 셀 수도 없이 많은 등나무 같은 식물들이 구덩이 벽의 진흙 속에서 자라나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한참 후 도착한 바닥은 평원 같았지만 땅과 하늘은 온통 어둠뿐이었다. 허나 수련자들에게 어둠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한제는 바닥에 쪼그려 앉아 흙 한줌을 쥐어보았다. 이곳의 흙은 굉장히 딱딱해 마지 무쇠 같았다.
“첫 번째 층은 본래 위험한 곳이 아니었는데 바깥에도 야인이 출몰했을 정도라면 조심해야겠지.”
호 씨 노인의 목소리를 들으며 한제는 신식으로 사방을 훑었다. 매우 넓은 땅이라 신식으로 전경을 살필 수는 없었다.
호 씨 노인과 자심은 대화 끝에 첫 번째 층의 입구가 동쪽에 있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고 일행은 이동을 시작했다. 구사평과 허루오 등은 서로 한데 붙어 긴장한 채 사방을 경계했다. 반면 한제와 두 노인만이 평온한 모습이었다.
한참 동안 날아가던 중에 한제는 뒤쪽을 바라보았다. 한 줄기 검은 빛이 빠른 속도로 접근해왔다. 산발한 머리에 동물 가죽 옷을 두른 야인이었다. 팔과 다리에 몇 갈래의 검은 줄무늬 낙인이 찍혀 있는 그 야인은 붉은 두 눈을 번득이며 허루오에게 달려들었다.
깜짝 놀란 허루오는 한 줄기 빛을 토해냈다. 그 빛은 한 자루의 비검이 되어 야인을 향해 맹렬하게 날아갔다.
야인은 몸을 기이하게 뒤틀어 비검을 피한 후, 움켜쥔 오른손을 휘둘렀다. 허루오의 몸은 맹렬하게 뒤로 밀려났고 옷의 앞섶에 다섯 갈래로 찢겨진 흔적이 남았다. 그 사이로 은빛이 번쩍였는데 안에 덧대어 입은 갑옷에서 발하는 빛인 듯했다.
공격을 마친 야인은 곧장 뒤로 물러났다.
“어딜!”
호 씨 노인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제자리에서 오른손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야인은 괴성을 내질렀고 사지의 검은색 낙인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어 낙인에서 피어오른 검은색 연기가 빠르게 야인의 몸으로 스며들어갔다. 야인은 비명을 내지르며 오른손을 맹렬히 뻗었다. 검은 기운이 야인의 오른손에 응축되었다.
호 씨 노인은 살기어린 눈으로 오른손을 꽉 쥐었다. 순간 야인의 주먹은 쩌적 소리와 함께 피범벅이 된 살덩어리로 변해버렸다. 야인은 비참한 비명을 내지르며 얼른 뒤로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