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275
그는 왼손으로 저물대를 두드렸다. 그 안에서 나온 흡혈 마수는 구사평을 등에 태웠으나 그다지 달갑지 않은 눈빛이었다. 구사평을 자신의 등에 오를 자격이 없는 존재로 여기는 모양이었다.
구사평은 그제야 한시름 놓았다. 흡혈 마수의 속도는 화신기 수련자가 낼 수 있는 속도보다 약간 느렸지만 지구력이 뛰어났다. 그는 곧장 저물대를 풀어 그 안에서 방울 하나를 꺼낸 뒤 말했다.
“한제, 이것은 내가 몇 년 전에 한 마수의 뱃속에서 찾아낸 것이네. 분명 상고 시대의 법보일 걸세. 내 능력에 한계가 있어 자세히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맹세컨대 결코 흔한 물건은 아닐 게야. 이걸 줄 테니 부디 내게 윤회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을 기회를 주게.”
말을 마친 그는 방울을 내던졌다. 한제는 그 방울을 손에 쥐고 힐긋 바라보았다. 한 층의 금제 제한이 걸려 있었는데 그 금제를 깨지 않는 이상 실마리를 발견할 수는 없었다. 한제는 그것을 자세히 살피지 않고 저물대에 집어넣었다.
그때, 갑자기 멀리서 두 줄기의 검은 빛이 접근해오더니 거대한 두 개의 얼굴로 변해 그중 하나는 호 씨 노인을 다른 하나는 한제를 뒤쫓았다.
한제가 오른손을 휘두르자 선검이 나타났다. 그것을 허공에 대고 휘두르자 한 줄기 검광이 튀어나가 마치 번개처럼 그 얼굴에 내리 꽂혔다. 그 거대한 얼굴은 펑 소리와 함께 대량의 검은 안개를 피어 올렸다. 그 검은 안개는 서로 교차되면서 거대한 문양을 이루었다. 한바탕 충돌 후에 검광은 흩어졌고 문양은 갈라졌다.
안개 속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머리가 새하얗고 눈빛이 음산한 그의 오른쪽 눈에는 긴 상처가 나 있었고 그 상처에서 흐른 피는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혀를 내밀어 입술에 흘러내린 피를 살짝 핥더니 몸을 훌쩍 날려 앞으로 돌진했다.
“죽이지 못했다니, 아무래도 육엽 술주사는 화신기 후기 수련자에 상당하는 모양이군.”
한제는 낮게 혀를 찼다.
호 씨 노인 역시 굳은 표정으로 그 자리에 멈춰 거대한 얼굴 형태로 접근 중인 노파와 싸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허루오를 보호해야 하는 데다가 수준이 화신기 중기에 불과해 계속해서 뒤로 물러났다. 몇 번이나 위험한 순간이 지나갔다.
“도수(饕獸)!”
노인의 외침에 현무 같이 생긴 마수가 나타나 함께 노파에 대적했다.
노파는 도수가 나타난 순간 기이한 눈빛을 번득이며 호 씨 노인을 공격하지 않고 도수에게 달려들었다. 한제를 추격해온 백발노인 역시 탐욕이 어린 눈으로 한제는 내버려 두고 도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들 입장에서는 마수의 선혈을 취해 문양을 강화하는 것이 더 이익이었다. 허나 그들 눈에 흡혈 마수는 별 가치가 없는 존재였는지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한제는 호 씨 노인을 지나쳐가며 외쳤다.
“도우, 주저하지 말게. 이곳의 야인은 한둘이 아닐 거야. 시간을 끌면 더 끔찍한 상황이 펼쳐질 걸세!”
도수를 향해 달려드는 두 야인을 바라보던 호 씨 노인은 안타까웠으나 억지로 마음을 접은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저 멀리서 접근해오는 세 갈래의 검은 빛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서쪽이야! 그쪽에 윤회수가 있네!”
호 씨 노인은 한제의 뒤를 바짝 쫓으며 말했다.
세 번째 층은 이전의 두 개 층보다 훨씬 좁아, 몇 시진 뒤에 일행은 서쪽 끝에 이르렀다. 신식으로 사방을 살피던 호 씨 노인의 눈빛이 번득였다.
“저기!”
한제는 신식을 펼쳐 호 씨 노인이 가리킨 곳을 살폈다. 그곳에는 이미 시들어 말라버린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크지 않은 그 나무는 겨우 팔뚝만 한 굵기에 나뭇잎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그저 땅 위에 외롭게 서 있을 뿐이었다. 보기에는 보통의 나무와 다를 것이 없었다.
“내가 당시 이곳에 왔을 때에도 여기를 스쳐간 적이 있네. 허나 그때는 저 나무를 본 적이 없어. 만약 자심이 탁본을 떠온 그 옥패가 아니었다면 난 이곳에 윤회수가 있을 것이라고는 믿지 못했을 거야.”
구사평도 곧장 그 뒤를 쫓아갔다. 하지만 나무 근처에 이르기도 전에 흡혈 마수는 몸을 흔들어 그를 떼어놓고 한제에게로 돌아갔다.
그러나 구사평은 전혀 개의치 않고 순간이동으로 나무 아래에 이르렀다. 그는 감격한 눈으로 그 아래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호 씨 노인이 미간을 찌푸린 채 그를 힐긋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구사평은 심장이 덜컥했다.
“그냥 두게. 이번 여정은 그야말로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여정이었어. 여기까지 온 것도 인연인데 내버려두게.”
한제가 덤덤한 목소리로 호 씨 노인을 제지했다. 구사평은 감격한 표정으로 한제를 바라보더니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 호흡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화신기에 이를 수 있을지 없을지는 오늘에 달려 있음을 알았다.
호 씨 노인은 말없이 허루오와 운맹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얼른 나무 아래로 다가가 윤회수를 사이에 두고 마주본 채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허루오와 운맹이 윤회수를 다루는 데에는 세 시진이 걸리네. 그동안 우리는 저 둘을 지켜야 해.”
호 씨 노인의 말에 한제가 물었다.
“윤회과는 몇 개나 열리지?”
호 씨 노인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했다.
“최소한 두 개는 열릴 걸세. 두 개만 열린다면 자네와 내가 하나씩 갖고 세 개가 열린다면 하나는 우리 연기각 아이들에게 수명을 희생한 대가로 주고 싶으니 이해 바라네.”
“좋아. 하지만 이 윤회수의 가지는 내게 주게.”
한제는 윤회수를 가리키며 말했다.
“하하, 그러게!”
호 씨 노인이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는 속으로 냉소했다. 이 윤회수는 이미 말라버려 열매를 맺은 후라 해도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데 한제가 갑자기 윤회수의 가지를 움켜쥐었고 당황한 호 씨 노인은 순간 안색이 외쳤다.
“도우, 지금 뭐하는 건가?”
한제는 호 씨 노인을 바라보며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지는 내가 가져간다고 하지 않았나. 지금 하나 가져가려는데 뭐가 문제인가?”
호 씨 노인이 뭔가 말하려 했지만 한제는 이미 가지를 하나 꺾어 저물대에 넣은 뒤 한쪽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 모습에 호 씨 노인은 화가 치밀었으나 상대의 명성과 그 무서운 보검을 떠올리며 참았다.
“난 그저 윤회과의 수가 줄 가능성이 있어 말리려던 것뿐이네.”
한제는 호 씨 노인을 힐긋 보더니 말없이 결인을 그려 잔영의 원을 만들어냈다. 잔영의 원들은 그의 손짓 한 번에 사방으로 내려앉았고 한제의 양손이 빨라짐에 따라 점점 더 많은 금제들이 나타났다.
호 씨 노인은 저물대에서 16개의 작은 깃발을 꺼내 휘두르더니 사방으로 퍼뜨렸다. 그 작은 깃발들은 떨어지자마자 보라색 빛을 번득였다.
한제는 끊임없이 금제를 만들어냈다. 결국 총 99개의 금제를 만든 그는 그것을 사방에 퍼뜨린 뒤 금번을 꺼내 앞으로 한 번 휘둘렀다. 순간 금번은 검은 막이 되어 사방을 감쌌다.
“묘하군!”
호 씨 노인이 저물대를 두드리자 짙은 피비린내를 풍기는 다섯 자루의 검은색 낫이 나타났고 그 위에 가득한 영혼들이 내뱉는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호 씨 노인이 오른손을 휘두르자 이 다섯 자루의 낫은 곧장 고리 형태를 갖춘 뒤 검은 막 안으로 스며들었다.
반 시진
적막한 가운데 시간이 조금씩 흘러갔다. 허루오와 운맹의 몸에서는 유백색 기운이 발산되었고 그 기운은 그들의 정수리를 통해 윤회수로 흘러들었다.
두 사람의 얼굴은 붉어졌다 창백해지기를 반복했으며, 시간이 흐름에 따라 고통스런 빛을 띠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두 사람의 정수리에서 흘러나오는 유백색 빛은 점점 더 진해졌다.
하지만 윤회수의 모습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 나무로 흘러들어간 유백색 기운의 흔적도 남지 않았다. 신식으로 살펴보아도 그 유백색 기운이 어디로 흘러들어 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허루오의 이마에는 주름이 늘었고 머리는 회색으로 물들어갔다.
운맹 역시 점점 중년 부인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아름다움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고 오히려 성숙한 느낌이 더해졌다.
★ ★ ★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고 둘의 얼굴은 더욱 늙어갔으며 그들의 피부는 어두워져 더는 빛나지 않았다. 마치 그들의 수명이 유백색 기운으로 변해 그들로부터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윤회수의 꼭대기에서 세 개의 노란색 점이 천천히 드러나더니 점점 더 밝아졌다. 마치 무궁무진한 신비의 힘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호 씨 노인은 외쳤다.
“윤회과 세 개!”
바로 그때, 갑자기 눈을 자극하는 노란 빛이 윤회수로부터 번쩍였고 한 줄기 노란 빛기둥이 윤회수 위에서 튀어나와 구름을 뚫고 솟아오르더니 세 번째 층 상공의 검은 흙에 하나하나의 고리형 파문을 일으키며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파문은 점점 더 커져 약 1천 척에 이르렀다. 세 번째 층 어디에서나 이 기이한 형상을 또렷하게 볼 수 있을 정도였다.
파문은 일정 정도까지 확산되었다가 빛으로 흘러내려 나뭇잎 하나로 변했다. 나뭇잎 뿌리 부분에서 수많은 나뭇가지가 뻗어 나왔고 가지들과 노란색 빛기둥은 하나로 연결되어 울창한 고목이 되었다. 빛기둥은 나무그루, 파동은 나뭇가지, 빛은 나뭇잎이 되어 눈 깜짝할 사이에 거대한 나무를 이루었다. 이 좁은 세 번째 층에서 거대한 윤회수가 모든 사람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것은 진짜 나무가 아니라 허상이었다. 하지만 이 허상의 출현은 세 번째 층에 있는 모든 선유족 야인들을 놀라게 했다. 그들은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윤회수의 허상이 있는 쪽을 바라보다가 그곳으로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한제는 고개를 들어 그 울창한 고목을 바라보았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이 선명한 거목은 모든 야인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곧 엄청난 전투가 벌어질 것이다. 지금 달아난다면 윤회과를 손에 넣지 못할 것이고 윤회과가 열리기를 기다린다면 큰 전투를 피할 수 없을 터였다.
한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그때, 멀리서 여덟 갈래의 검은 빛이 질주하듯 접근해오더니 여덟 명의 노인으로 변했다. 이 노인들은 모습을 드러낸 뒤 자신의 몸에 새겨진 문양의 힘을 통해 윤회수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돌진했다.
가장 바깥쪽에 둘러져 있던 한제의 금제가 곧장 위력을 발휘했다. 금제로 이루어진 검은 막은 마치 단단하고 강인한 거북이 등껍질처럼 사방 3백 척 범위를 완벽하게 뒤덮었다.
법보에서 피어오르는 빛들이 번쩍거렸다. 여덟 노인은 문양의 힘으로 일제히 금제를 공격했다.
펑, 펑!
끊임없는 공격에 금제들은 하나하나 소멸되면서 빠르게 줄어들었다.
호 씨 노인은 두 손으로 결인을 해 여러 갈래의 빛을 쏘았다. 사방에 꽂힌 16개의 작은 깃발이 펄럭이며 열여섯 마리의 악귀가 그 작은 깃발에서 튀어나왔다. 이 악귀들은 사방을 한 바퀴 돌더니 순간 검은 회오리바람을 이루어 흘러넘치는 듯한 힘을 바깥쪽으로 분출했다. 그 위력에 금제를 공격하고 있던 여덟 명이 노인들은 곧장 수십 척 밖으로 밀려났다.
호 씨 노인은 두 눈을 감고 빠르게 결인을 그려댔다.
한제는 오른손으로 앞을 두드렸다. 순간 남아 있던 잔영의 원들이 곧장 하나로 응축되어 거대한 손바닥을 이루더니 앞쪽을 맹렬히 움켜쥐었다.
노인들 중 한 사람이 그 거대한 손바닥에 붙들렸다. 한제는 작게 외쳤다.
“폭발!”
펑 소리와 함께 손바닥이 폭발했고 그 안에 쥐어져 있던 노인은 피범벅이 되어 터져나갔다.
한제는 오른손을 다시 두드렸고 흩어졌던 손바닥이 다시 나타나 다른 노인을 붙잡았다. 그 노인들은 사엽(四葉) 야인들로 원영기 수준에 상당했다.
그때, 멀리서 한 줄기 검은 빛이 날아들었다. 그 검은 빛 속에는 문양 낙인으로 뒤덮인 거대한 얼굴이 있었다.
“도우, 날 대신해서 보호를 계속해주게. 내가 나서 싸우겠네!”
호 씨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층층이 싸인 금제의 보호막 밖으로 걸어 나가더니 야인들과 싸우기 시작했다.
반 시진 뒤, 호 씨 노인이 보호막 안으로 들어왔다. 얼굴은 잔뜩 구겨져 있었고 몸에도 두 군데 상처가 나 있었다. 그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말했다.
“죽였네. 하지만 두 명이 또 왔어. 내가 어쩔 수 없는 이들이야.”
한제는 말없이 보호막 밖으로 나섰다. 금제 밖에서는 두 명의 야인이 쇠사슬 같은 문양을 손에 쥔 채 미친 듯이 휘젓고 있었다. 그들은 16개의 깃발로 이루어진 회오리바람을 공격하고 있었는데 한 번 공격할 때마다 회오리바람 속에서 카강 하는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중 한 노인의 손에 쥔 사슬이 마치 긴 뱀처럼 한제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 순간, 하늘을 찢는 듯한 소리가 났고 심지어 한제는 포효하는 검은 교룡의 혼을 언뜻 볼 수 있었다.
한제는 덤덤한 표정으로 오른손을 들어 허공을 움켜쥐었다. 순간 사방의 검은 막에서 검은색의 창 한 자루가 번개처럼 튀어나왔다. 한제는 문양의 사슬을 향해 그 창을 집어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