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279
만약 상대가 정말로 추격을 포기한 것이라면 그리고 그 상대가 화신기 수준이었다면 한제는 반격을 가했을 것이다. 하지만 저 꼽추 노인의 수준은 영변기 수련자에 상당했기에 한제는 더욱 신중해졌다.
잠시 고민하던 한제는 성라반을 움직여 옆쪽으로 돌아갔다.
퇴로를 끊다
출구 쪽으로 향하던 꼽추 노인은 한제의 거동을 눈치채고는 잠시 망설이다가 더는 그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며칠 후, 노인의 표정은 더욱 구겨졌다. 한제는 시종일관 그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쫓아오고 있었다. 며칠 동안 참았던 노인은 맹렬히 뒤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외쳤다.
“사리를 모르고 덤벼드는구나!”
그의 몸이 유성처럼 잔영을 그리며 한제 쪽으로 돌진했다. 그러나 한제는 하하 웃으며 성라반을 움직여 허무 속으로 사라졌다.
노인은 며칠 동안 한제를 추격했으나, 문양의 힘이 갈수록 약해지고 있음에도 상대를 따라잡지 못하자 다시 포기했다. 그는 다시 출구 쪽으로 향했다.
한제는 다시 노인과 거리를 유지한 채 뒤를 쫓으며 귀찮게 굴었다. 노인은 이제 한제를 완전히 무시하고는 갈 길을 갔다.
이제 한제는 상대가 모략이나 잔꾀를 부리는 게 아니라 정말로 추격을 포기한 것임을 확신했다. 그러자 그의 두 눈에 서늘한 빛이 어렸다.
한제는 저물대에서 선검을 꺼내 쥐었다. 그리고 몸을 훌쩍 날려 노인과의 거리가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선검을 연달아 세 번 휘둘렀다. 그러고는 다시 달아났다.
세 갈래의 검은색 검광이 쉭 소리를 내며 다가오자 꼽추 노인은 어두운 안색으로 손을 휘둘렀다. 세 번의 폭발음과 함께 검광은 사라졌다.
노인은 제자리에 멈춰 서서 한제를 바라보며 외쳤다.
“이번에는 놔줄 테니 썩 꺼져라. 계속 따라온다면 정말로 네 목숨을 거둘 것이다.”
말을 마친 노인은 몸을 훌쩍 날려 더는 한제를 신경 쓰지 않고 빠르게 출구 쪽으로 향했다. 허나 한제는 물러나기는커녕 가끔씩 검광을 쏘아 보내며 이전보다도 더 노인을 귀찮게 했다.
한 달이 지나자 꼽추 노인의 짜증은 극에 달했다. 한제를 잡아 갈기갈기 찢어버리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었다.
한제는 노인이 쫓아갈 때마다 기를 쓰고 달아났고 노인이 추격을 멈추면 또 기를 쓰고 쫓아와 귀찮게 굴었다. 비록 그 검광에 위해를 입지는 않았지만 끊임없이 반복되는 상황에 노인은 기분이 상했다.
“그만둬라!”
드디어 인내심이 극에 달한 노인은 뒤를 바라보며 허무에 대고 포효했다. 그의 전신에서 문양이 미친 듯이 번득였고 강렬한 위압감이 발산되었다.
한제는 멀리서 놀리듯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선배님이 몇 달이나 쫓아오시기에 저와 한번 놀아보자는 건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까?”
꼽추 노인의 두 눈에서 음산한 빛이 번득였다. 그는 먼 곳의 허무를 노려보면서 몸을 훌쩍 날렸다. 그 자리에서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허나 노인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자 성라반은 나이법을 사용할 때 나타나는 하얀 빛을 남긴 채 다시 멀어져 있었다.
한데 그 순간 노인의 표정이 급변했다. 나이법을 사용한 한제가 향한 곳이 출구 쪽이었던 것이다.
“선배님, 저는 이 출구를 소멸시켜버릴 겁니다. 선배님과 저는 앞으로 이 허무 속에서 유랑하게 되겠지요. 즐겁지 않습니까?”
얄밉게 웃으며 말하는 한제의 목소리에 꼽추 노인은 고함을 지르며 몸을 날렸다.
한제에게 남은 단약은 분명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는 최고급 영석들이 상당히 많았기에 상대의 추격에서 얼마든지 벗어날 자신이 있었다. 그는 다시 선검을 휘둘러 몇 갈래의 검광을 쏘아내면서 상대를 혼란스럽게 했다.
이 전투는 소모전이면서 심리전이기도 했다.
지난 몇 개월 동안 노인은 한제에게 아무리 써도 줄지 않는 단약이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어처구니없는 생각이었지만 그가 추격을 포기하자 도리어 도발을 해오는 모습에 의혹은 더 짙어졌다. 그리고 이제 그는 한제의 저물대에 아직도 많은 단약이 남았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성라반을 깨뜨리면 따라잡을 수 있을 듯했지만 저 나침반은 매우 빨랐다. 게다가 한제는 거리가 조금만 가까워지면 나이법을 사용해 멀어졌으니, 애초에 공격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셈이었다.
이때, 한제가 방향을 바꾸면서 다시 추격이 시작됐다. 다만 이번에 고통받는 것은 한제가 아니라 꼽추 노인이었다.
★ ★ ★
몇 개월 후, 한제의 단약은 진즉 동이 나 이제 최고급 영석에 의지해야 했다.
꼽추 노인은 더욱 조급해져 갔다. 그는 몇 차례, 그것도 자주 공격을 진행했으나, 성라반 때문에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공격은 단 한 번 한제에게 향했고 노인은 이로써 상대에게 부상은 입힐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저 나침반이라도 영향을 받지 않을까 했다.
하지만 성라반은 지난 8개월 동안 한제의 통제를 받으면서 더욱 자유롭고 더욱 빨라진 상태였다.
한제는 네 개의 최고급 영석을 홈에 넣어 성라반을 조종하면서 남은 정신력으로는 각종 법보를 이용해 노인을 공격했다. 금번이 만들어낸 금제의 창, 세월의 나무 조각, 검은 도장, 그리고 몇 개의 상고 시대 법보들이 춤을 추듯 요동쳤다. 효과는 크지 않았지만 수련자가 된 후 처음으로 모든 법보를 이용해 공격을 퍼붓는 동안 숙련도가 크게 높아졌다.
특히 선검을 휘두를수록 익숙해져, 어느 순간부터는 그 안에 스며든 허이국의 혼백마저 느껴졌다. 그때부터는 직접 손에 쥐지 않아도 비검처럼 30척 이내에서는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었다. 비록 선검의 위력이 증가한 것은 아니지만 대신 더욱 민첩해졌다.
반면 꼽추 노인은 이미 분노가 극에 달한 상태였다. 그의 안색은 갈수록 어두워졌다. 손가락으로 찌르기만 해도 죽여 버릴 수 있는 애송이 하나에게 이토록 희롱당하다니, 이제 한제를 찢어죽여야만 분이 풀릴 것 같았다. 더 이상 그를 꼭두각시로 만들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한제는 저물대에서 세 개의 검집까지 꺼내 휘둘렀다. 한제 자신의 수준은 상승하지 않았지만 법보에 대한 이해도는 이전과 천양지차로 달라져 있었다. 이제 같은 법보로도 이전보다 훨씬 강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런 상황이 하루하루 이어지던 어느 날, 한제는 저 멀리서 출구를 보았다. 그곳에서는 거대한 문양이 끊임없이 번득이고 있었고 그때마다 균열은 맞물리지 못하고 그대로 벌어졌다.
한제는 그 벌어진 균열을 통해 밖을 내다볼 수 있었다. 그곳에서는 수많은 야인들이 몇 겹의 층을 이루어 둘러싼 채 형형한 눈을 번득이고 있었다.
“안 돼!”
꼽추 노인이 외쳤다. 8개월 동안 계속해 추격을 해온 데다가 단약도 복용하지 못한 그는 문양의 힘이 약해진 상태였다. 한데 출구를 유지하고 있는 문양이 곧 붕괴할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꼽추 노인은 고함을 지르며 나이법으로 치고나갔지만 그는 한제의 칼에 문양이 무너지며 공간의 균열이 맞물리는 광경을 볼 수밖에 없었다.
노인은 몸을 바르르 떨며 사라지고 있는 무형의 출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런 노인의 귀에 한제의 차가운 목소리가 비수처럼 꽂혔다.
“내가 떠날 수 없다면 너 역시 그렇다. 계속해서 쫓아와봐라!”
한제는 곧바로 성라반 위로 돌아와 빠르게 날아갔다. 그의 웃음소리가 천둥처럼 울려댔다.
“미친놈! 정말로 미친놈이로구나! 반드시 죽여 버릴 것이다.”
꼽추 노인은 핏발 선 눈으로 한제를 노려보며 다시 뒤쫓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문양들은 어두워져 더 이상 빛을 발하지 않았다.
한참이나 한제를 쫓던 그는 주먹을 바르쥐고 고개를 들며 포효하더니 그대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의 미간에 일곱 개의 이파리가 나타더니 미간에서 빠져나왔다. 이파리는 천천히 거대해져 노인의 몸을 감쌌다. 그러더니 노인의 몸이 그 안에서 사라졌고 이 허무의 공간 속에 거대한 식물 하나만 고독하게 남았다.
“족령(族靈)을 통해 통로를 열기를 바라노라!”
식물 안의 노인이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성라반 위에 선 한제는 거대한 식물로 변한 노인을 잠시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그대로 달아났다.
그는 자신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을 충분히 보호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도망쳐야 했다.
꼽추 노인은 퇴로가 끊겼으니 분노가 극에 달했을 것이다. 그는 비록 지금 허약한 상태였으나, 영변기 수련자에 상당하는 칠엽 술주사라면 아무리 허약한 상태라 해도 자신이 당해낼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한제가 떠나간 지 한참 후에 꼽추 노인은 거대한 식물 속에서 붉은 빛을 내뿜으며 두 눈을 번쩍 떴다. 한제가 빠른 속도로 멀어져가는 것을 감지한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거동이 참으로 신중하구나. 성급하게 달려들었다면 이번에는 숨통을 끊어놨을 텐데…”
한참 동안 침묵하던 그는 족령을 이용해 외부와 소통했다.
허무의 공간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출구가 없다는 점이었다. 공간의 균열을 낼 수는 있지만 만약 외부에서 도와주지 않는다면 빠져나갈 수 없다.
노인은 점차 초조해졌다. 이제 그는 한제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접었다. 지금은 최대한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에만 신경 썼다.
그 무렵 한제는 등 뒤에서 느껴지던 위기감이 사라졌음에도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며칠이나 더 날아간 후에야 그 자리에 멈추었다.
칠흑처럼 어두운 사방을 둘러보는 그의 눈빛은 침착해 초조함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성라반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오른손으로 미간을 두드려 석주를 불러냈다. 이어서 체내의 영력을 움직이자 곧장 그의 몸에 검은 줄무늬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이전보다 줄어들어 그저 목 위로 조금 드러날 뿐이었다.
지난 8개월 동안 한제는 틈틈이 석주를 꺼내 체내의 문양 식물을 흡수하게 했다. 이제 체내에 남은 문양 식물은 절반이 채 되지 않았다.
한제의 표정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검은 줄무늬들이 그의 목에서 천천히 요동치다가 결국 모두 미간으로 모여들었다. 그러자 석주가 곧장 푸른빛을 발하면서 그 식물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한참 후, 한제는 두 눈을 번쩍 뜨고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중얼거렸다.
“드디어 모든 문양 식물을 몰아냈다. 선유족의 저주는 정말이지 기이하구나. 혹여 앞으로 마주치게 된다면 조심해야겠어.”
그는 석주를 쥐고 자세히 살폈다. 석주에 새겨진 이파리는 아홉 개였고 마지막 이파리 하나도 반쯤 피어 있었다.
한제는 기쁨을 숨기지 않고 활짝 웃으며 석주를 미간에 댔다. 구슬은 곧장 사라졌다.
“나무 속성도 곧 가득 차겠군. 하지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이곳을 떠날 방법을 찾는 거지!”
한제는 고민에 빠졌다.
꼽추 노인의 퇴로를 끊기 전부터 그는 계획이 선 상태였다. 출구의 균열을 유지하고 있던 꼽추 노인의 문양을 부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허무의 공간에서는 외부의 견인이 없는 한 빠져나갈 수가 없는데 밖에는 그의 본체가 있지 않은가.
성라반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채 한제는 묵묵히 본체를 감지해냈다.
★ ★ ★
선유지 밖 산골짜기의 지하 수천 리 진흙 속에서 보라색 빛이 번뜩였다.
그 빛 속에 냉랭한 남자 하나가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머리는 붉은색이었고 상반신은 나체였다. 약간 거친 고동색 피부 위에는 세밀한 균열이 나있었다. 그의 미간에는 두 개의 반점이 음양 형태를 이룬 채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돌연, 남자가 두 눈을 번쩍 떴다. 그 눈으로부터 살기(煞氣)가 뿜어져 나왔다. 그는 가부좌를 튼 자세 그대로 몸을 훌쩍 날려 번개처럼 빠르게 솟아올라 눈 깜짝할 사이에 지면으로 떠올랐다.
밖으로 나온 그가 오른손으로 허리춤을 때리자 검은색 옷이 나타나 몸을 덮었다. 지금의 그는 일반 수련자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는 선유지 숲으로 성큼성큼 들어섰다. 그곳의 거대한 나무 아래에서 오른손으로 주먹을 쥔 그는 맹렬히 허무의 공간을 때렸다. 순간, 쩌적 소리와 함께 사방에 균열이 가득한 공간의 균열이 끊임없이 회전하며 나타났다.
한참 기다리던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열 걸음마다 주먹으로 허무의 공간을 때려 공간의 균열을 냈다. 그의 속도는 점점 더 빨라졌고 조금씩 선유지의 산촌 내부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