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280
다른 사람
줄곧 앞으로 향하던 그는 천 개 이상의 공간의 균열을 낸 뒤에야 선유지로 들어가는 거대한 구덩이 밖에 이르렀다. 고개를 숙여 그 구덩이 안을 들여다보던 그는 다시 몸을 돌렸다. 그러더니 다른 방향에 좀 전과 같은 방식으로 열 걸음마다 공간의 균열을 냈다.
시간이 천천히 흘러갔으나 그는 짜증내는 기색조차 없이 같은 일을 반복했다.
선유지 북측의 지면은 마르고 썩은 낙엽들로 뒤덮여 있었다. 사내가 그 위를 걸을 때마다 사아악 소리가 났다.
열 걸음을 걸어간 뒤 주먹을 쥐어 내리치려던 그는 멈칫하더니 먼 곳을 내다보았다. 잠시 후, 그는 한기 어린 눈빛을 번득이더니 몸을 훌쩍 날려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선유지 북측 외곽에서 남자 한 명과 여자 한 명이 빠르게 날고 있었다. 여자는 얼굴을 하얀 면사로 덮은 채였고 남자는 푸른 옷을 두른 노인이었다.
푸른 옷의 노인이 흠칫하더니 한손으로 여자를 제지했다. 그들은 곧장 뒤쪽으로 물러났는데 그 순간 그들이 있던 자리에 갑자기 쾅 하고 균열의 무늬가 나타났다.
그 균열 정중앙, 붉은 머리에 한없이 냉랭한 얼굴의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바로 한제의 본체였다.
본체는 냉랭한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며 오른손 주먹을 쥐어 휘둘렀다.
푸른 옷의 노인은 재빨리 저물대를 두드렸다. 순간 돌덩이 같은 법보가 나오더니 곧장 부풀어 올라 거대한 산봉우리가 되어 노인의 앞을 막아섰다.
본체는 표정의 변화 없이 주먹을 들어 그대로 그 산봉우리를 내리쳤다.
쾅!
산봉우리에서 미친 듯이 금빛이 사방으로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그 금빛은 이내 무너지며 가루가 되어 쏟아져 내렸다.
푸른 옷의 노인은 잔뜩 그늘진 얼굴로 자심을 잡아당기며 뒤로 물러났다.
본체가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발이 닿는 곳에는 균열이 나타났다. 맹렬히 몸을 날린 그가 다시 주먹을 날렸다.
푸른 옷의 노인은 흰색 빛을 토해냈다. 이 빛은 한 자루 비검으로 변했다. 비검에서는 서늘한 빛이 번득였고 한 줄기 보라색 빛을 품고 있었다. 보라색 심을 가진 구리로 만든, 보기 드문 비검이었다.
비검은 빛을 번득이며 본체의 주먹으로 날아들었다. 본체는 역시나 표정의 변화 없이 비검과 그대로 부딪쳤다.
쩌적!
비검은 곧바로 부서지기 시작해 무수히 많은 조각으로 갈라지더니 소멸되었다. 동시에 화신기 수련자의 경지의 힘이 그 비검으로부터 흘러나와 본체의 주먹을 타고 그의 체내로 들어갔다.
본체는 눈을 번득였다. 고대 신으로서 그에게 경지는 없었지만 살기(煞氣)는 있었다. 그의 머리카락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피처럼 붉은 빛이 체내에서 몇 번 번득였다. 푸른 옷의 노인이 내뿜는 경지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본체는 다시 주먹을 휘둘렀다. 푸른 옷의 노인은 겁에 질린 상태에서도 자심을 잡아 끌며 다시 뒤로 물러났다.
본체는 끊임없이 그들을 뒤쫓았다.
“도우, 우리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인데 어찌 이러는가!”
푸른 옷의 노인이 다급히 물러나며 외쳤다. 여태 살면서 본 사람들 중 선유족의 전주사를 제외하면 이렇게 강한 공격력을 가진 수련자는 처음이었다.
법보도 부숴버리고 발걸음만으로 공간의 균열을 내는 상대를 보며 노인의 심장은 바짝 쪼그라들었다.
본체는 노인의 말을 듣지도 못한 듯, 오히려 더욱 강렬한 기세로 주먹을 휘둘렀다. 푸른 옷의 노인과 자심은 마치 강한 신통력에 갇힌 듯한 느낌을 받았다.
“죽어라!”
본체의 냉랭한 목소리에 푸른 옷의 노인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겁에 질린 자심의 눈을 본 노인은 이를 악물고 외쳤다.
“아가씨, 법도(法刀)를 쓰시죠!”
노인의 말에 정신을 차린 자심이 저물대를 두드리자 하얀 빛이 나타났다. 노인은 그 빛을 쥐었고 빛은 곧 한 자루 칼이 되었다.
노인은 자심을 등 뒤로 끌어놓고는 혀끝을 깨물어 한 움큼의 선혈을 토해 칼에 뿌렸다.
이때, 본체의 주먹이 이미 다가와 있었다. 그 주먹의 목표는 노인의 머리였다. 노인은 다급히 단도를 내던졌다. 그러자 그것은 노인의 앞을 가로막았다.
펑!
무언가 폭발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칼에 균열이 일었다. 심지어 끄트머리는 붕괴하여 약간 부서지기까지 했다.
푸른 옷의 노인은 이를 악물었다.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물러나며 그는 자심을 이끌고 힘의 속박에서 벗어났다.
“선배님, 그만두세요! 왜 저희를 죽이려는 거죠?”
자심은 떨리는 목소리로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본체는 주먹을 거두고 냉랭한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순간, 사방이 고요해졌다. 잔잔히 부는 바람에 옷깃이 펄럭이는 소리만이 귓가에 내려앉았다.
노인의 이마는 땀으로 흥건했다. 그는 긴장한 얼굴로 눈앞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자의 화를 돋았던 기억은 없었다.
“너희 두 사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이냐?”
본체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심은 흠칫 놀라 자세히 생각해볼 틈도 없이 얼른 말했다.
“저희 주나라 사람입니다. 이곳을 건너 초나라로 가려고 합니다.”
“한 마디라도 헛소리를 했다가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본체는 서늘한 눈빛을 번득였다. 눈빛만으로도 두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어 본체는 제자리에서 오른발을 앞으로 살짝 찼다. 우르릉 소리가 들려왔다.
피하려 했으나 이미 늦었음을 깨달은 푸른 옷의 노인은 크게 고함을 지르며 칼을 조종해 몸 앞으로 가져왔다.
쾅!
단숨에 칼은 완전히 부서져 버렸고 노인은 한 줄기 유성처럼 잔영을 남기며 아래로 빠르게 떨어져 내렸다.
“선배님과 우리 사이에 무슨 원한이 있기에 이리 혹독하게 구십니까!”
자심의 원망 섞인 목소리에 본체는 냉랭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희 두 사람, 어디에서 오는 것이냐?”
자심은 몸을 흠칫 떨며 고개를 숙여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를 푸른 옷의 노인을 바라보았다. 절망감이 차올라 더 이상은 거짓말을 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녀는 다소 자포자기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유지에서 나오는 길입니다.”
“들어갈 때에는 일곱이더니 어찌 지금은 너희 둘뿐이냐?”
본체는 자심을 훑어보며 덤덤하게 물었다.
자심은 다시 몸을 떨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사내를 바라보았다.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었지만 끝끝내 누구인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제게 다른 문제가 있어서⋯⋯.”
자심이 씁쓸히 말했다.
“따라와라!”
본체는 그녀를 힐긋 보더니 몸을 돌려 선유지 숲으로 날아갔고 자심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 뒤를 쫓았다.
본체는 푸른 옷의 노인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의 발길질 한 번이면 화신기 초기에 불과한 저 노인은 보호용 법보가 없는 이상 죽었을 것이 분명했다.
한데 바로 그때, 본체가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서더니,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숙여 푸른 옷의 노인이 떨어진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는 전신이 망가져 온전치 않은 인영이 천천히 일어서고 있었다. 그 몸에는 검은 기운이 맴돌고 있었는데 그 검은 기운 속에서 다섯 개의 이파리를 가진 식물이 이따금씩 번득였다.
푸른 옷의 노인은 피를 토하면서도 절망적인 표정으로 발버둥 쳤다. 하지만 그 눈빛만큼은 맑았다.
본체는 다소 어두운 표정으로 자심을 바라보았다. 여인의 면사 아래로 드러난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랬던 거로군.”
본체는 곧바로 전후 상황을 이해했다. 두 사람이 어떻게 죽지 않고 선유지에서 나올 수 있었는지도 이해가 됐다.
본체는 오른손을 들어 푸른 옷의 노인을 가리켰다. 완전히 죽여 버리기 위해서였다.
그때, 자심이 갑자기 푸른 옷의 노인 앞을 가로막더니 바닥에 꿇어앉았다.
“선배님, 저희와 함께한 일행 중 선배님의 지인이 있었던 모양인데 이는 제 잘못입니다. 죽이시려거든 저를 죽이시고 저자만큼은⋯⋯.”
그때, 푸른 옷의 노인이 발버둥 치며 일어서더니 본체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를 죽이십시오. 이런 모습으로는 살고 싶지 않습니다. 다른 자의 꼭두각시로 사느니 선배님 손에 죽는 것이 낫지요. 아가씨께서는 반대하셨습니다만 제게는 해방과도 같은 일입니다. 부디 아가씨는 살려주십시오.”
본체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오른손을 움켜쥐어 두 사람을 잡아챈 뒤 날아갔다. 그러는 동안 노인의 몸에 난 상처는 천천히 호전되어 갔고 검은 기운은 점차 흩어져갔다. 다만 그의 미간에서는 이따금 식물의 허상이 번득였다.
자심은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
그들은 곧 선유지 숲의 정중앙에 있는 거대한 구덩이에 이르렀다.
그곳에 도착하자 본체는 주먹으로 구덩이 안쪽을 때렸고 그러자 시커먼 공간의 균열이 나타났다. 본체는 손가락을 튕겨 두 방울의 선혈을 푸른 옷의 노인과 자심의 미간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다시 손을 휘두르자 두 사람은 그 공간의 균열 안으로 밀려들어갔다.
“그 안에서 한제를 찾아낸다면 두 사람의 목숨을 살려주겠다.”
그 목소리를 끝으로 공간의 균열이 사라졌다.
본체는 그 깊은 구덩이 밖에서 조용히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밖에서 견인해야 할 사람이 필요했기에 그는 선유지로 들어갈 수가 없는 상황이었는데 직접 들어가지 않는 이상 한제를 찾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자심과 노인을 발견했을 때 그들을 죽이지 않고 체내에 낙인을 찍은 채 탐색 작업을 맡긴 것이다.
★ ★ ★
성라반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던 한제는 순간 두 눈을 번쩍 뜨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랬던 거군!”
한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성라반을 조종했다. 동시에 신식을 펼쳐 허무의 공간 속으로 들어온 두 사람을 찾았다.
시간이 천천히 흐르던 어느 날, 한제는 순간 움찔했다. 그러더니 빠르게 질주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 앞에서 비행하고 있는 두 사람을 발견했다.
푸른 옷의 노인과 자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