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283
“천우, 고작 그 정도라면 넌 오늘 죽고 말 것이다.”
요범은 한제를 보며 냉소했다.
그가 오른손으로 저물대를 두드리자 구리로 된 종 하나가 나타났다. 종 위에는 각각 주작성에 존재하는 열두 개의 달을 대표하는 열두 개의 숫자가 적혀 있었다. 또한 그 숫자 아래에는 각 달의 하루하루를 의미하는 미세한 부호가 무수히 새겨져 있었다.
요범이 왼손으로 종을 두드리자 종은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하더니 8월을 뜻하는 숫자가 이어서 그 아래의 부호가 번득였다.
“오늘은 8월 9일이다. 천우, 네 제삿날이지!”
요범은 말을 마친 뒤 손에 들고 있던 종을 위로 내던졌다. 그러자 거대한 마수의 허상이 종 위에 나타났다. 마수 안에서 두 갈래의 금색 빛이 번득이고 있었다.
한제의 표정은 전혀 변화가 없었다. 그는 오른손으로 결인을 그린 뒤 허공에 대고 방울을 가리켰다. 순간, 회전하던 두 개의 방울은 한데 부딪쳤다가 그대로 붕괴해버렸다. 이어 무수히 많은 파편들이 솟아올라 한제의 곁을 맴돌며 빠르게 회전했다. 한제가 작게 외쳤다.
“갑각!”
순간, 파편들이 한데 뭉쳐 한제의 몸을 감싸며 푸른빛을 번득이는 갑주가 되었다. 그 위에는 두 개의 방울 도안이 그려져 있었다.
노인의 허상을 마주한 한제는 전혀 피하지 않았다. 허상의 기운은 그대로 한제에게, 정확히는 한제가 두른 갑주에 떨어졌다.
순간, 갑주 위에 물결과 같은 수많은 파문이 일었다. 한 번의 진동과 함께 허상의 기운은 한층 약해졌다. 그리고 두 번째 진동과 함께 기운은 완전히 사라졌다.
음파 갑주의 효과에 만족한 한제는 빙그레 웃더니 요범을 바라보았다. 그 구리 종으로 만들어진 마수는 이미 움켜쥔 상태였다.
한제는 가볍게 오른손으로 저물대를 두드려 선검을 꺼내 한 번 휘둘렀다. 그러자 마수는 무너져 내렸고 구리 종에는 한 줄기 균열이 일었다. 그 뒤에 있던 요범의 가슴팍도 피로 물들어 있었다. 창백한 얼굴로 비척비척 물러난 그는 오른손으로 가슴팍을 눌렀다. 하지만 그의 두 눈에는 만족감이 어려 있었다. 그가 광기어린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죽어라!”
그 순간, 구리 종의 깨진 부분에서 포효가 들려왔다. 이어서 더욱 많은 균열이 생겨났고 비쩍 마른 팔 하나가 그 안에서 쑥 빠져나면서 구리 종은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남아 있던 검은 기운이 허공에 뜬 채 마치 화염처럼 번득였다.
한제는 오른손으로 결인을 한 채 앞으로 휘둘렀다. 그러자 괴이한 바람이 불어와 그 화염과 같은 검은 기운을 밀어냈다.
검은 기운은 뒤로 3척 정도 물러났고 그 안에 있던 비쩍 마른 팔 하나가 허공에 드러났다. 검은 기운은 그 팔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한제는 다시 한 번 선검을 휘둘렀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그 비쩍 마른 팔을 뒤덮은 검은 기운이 요동치며 가로막았다. 하지만 검광은 검은 기운을 뚫고 나가 잘린 팔을 내리쳤다. 그러자 그 팔에 긴 상처가 생겨나면서 포효가 흘러나왔다. 뒤이어 상처로부터 대량의 검은 기운이 쏟아져 나오더니 기이하게 요동치면서 하나의 인영으로 변해갔다.
인영은 흐릿하여 생김새가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다. 두 눈이 있어야 할 위치에는 두 덩어리의 어스름한 빛만 번쩍였다.
한제는 정신을 집중했다. 요범은 화신기 중기 수준에 불과했지만 놀라운 법보를 가지고 있어 상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검은 기운으로 만들어진 인영은 입을 쩍 벌리고 포효하더니 한제에게 달려들었다. 너무도 빨라서 가까이 접근하기도 전에 음산한 기운이 훅 끼쳐왔다.
산골짜기 밖의 초원을 뒤덮었던 얼음 결정은 불어닥친 바람에 짙은 남색의 분말이 되어 버렸다. 심지어 산골짜기 절벽은 음산한 기운의 충격에 푸른색의 얇은 얼음으로 뒤덮였다. 얼음과 눈으로 인한 한기보다 몇 배는 더 강한 한기였다.
그 기운은 곧장 미친 듯이 솟아올라 눈 깜짝할 사이에 주위를 뒤덮고 한제의 체내로 파고들어 피까지도 얼어붙어 버렸다.
그 순간, 한제는 익숙한 느낌에 흠칫했다. 이것은 황천승규결을 수련했을 당시 느꼈던 음산하고 서늘한 기운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상대가 발산한 음산한 기운은 자신이 수련했을 때 느꼈던 것보다 훨씬 강해, 당시 사도환이 직접 펼쳐보였던 것에 비견할 만했다.
한제는 몸을 뒤로 물리면서 결인한 오른손을 앞으로 뻗었다. 순간, 아주 오랫동안 사용한 적 없던 황천승규결로 제련해낸 얼음 화염이 체내에서 진동하더니 손가락 끝에서 피어올랐다. 짙은 푸른색의 화염이 발산하는 것은 열기가 아니라 한기였다.
얼음 화염이 나타난 순간, 한제의 체내로 침투했던 한기는 흩어져 사라졌고 주위를 뒤덮은 음산하고 서늘한 기운 역시 한 줄기 검은 기운이 되어 얼음 화염에 의해 흡수되었다.
검은 기운으로 이루어진 인영은 움찔하더니 두 눈의 어스름한 빛을 번득이며 얼음 화염을 주시했다. 그의 입에서 거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황천의 얼음 화염⋯⋯ 당시 내 제자의 제자가 남긴 황천도(黃泉道)로도 그토록 순수한 얼음 화염을 제련해낼 수는 없을 터. 너, 대체 어떻게 황천승규결을 통달한 거지?”
한제는 얼른 몇 발짝 뒤로 몸을 물리다가 산골짜기에 자리한 보탑 범위 안에 들고 나서야 걸음을 멈추었다.
“넌 누구냐?”
그 검은 기운 속의 목소리에 한제는 마음이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여태 단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을 정도로 강한 떨림에 한제는 머리가 저릿했다. 그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바로 사도환의 목소리였다.
“하긴, 그게 무슨 상관이겠느냐? 네놈은 오늘 이 사도환의 손에 죽을 텐데…”
그 검은 기운 속의 인영은 빠른 속도로 보탑의 범위 안으로까지 진입해 들어와 한제의 머리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한제는 심적인 충격을 누르며 외쳤다.
“퇴각!”
그러자 주일이 남겨 놓은 술법 한 줄기가 보탑으로부터 빠져나왔다. 순간, 그 검은 기운 속의 인영은 거대한 힘에 부딪친 듯 한제로부터 3촌가량 떨어진 곳에서 저지당하고 말았다. 그러자 그는 짜증 섞인 포효를 내지르며 바깥쪽으로 물러났다.
그 과정에서 그의 몸을 두른 검은색 기운은 흩어져 한쪽 팔만 남게 되었다. 그 팔은 요범을 틀어쥔 채 번쩍 하고 산골짜기에서 사라져버렸다.
홍접
한제는 저 멀리 달아나는 상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사도환⋯⋯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럴 수가⋯⋯.”
그는 한참 후에야 혼란스러운 마음을 추스르며 깃털부채를 거두어들이고는 멍한 표정으로 산골짜기 안으로 돌아왔다.
보탑 아래에 앉은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사도환과 함께했던 시간들이 하나하나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도환⋯⋯ 분명 자신을 사도환이라고 했어.”
은혜는 보탑 안에서 고개를 쏙 내밀고 한제를 바라보더니 총총 걸어 나와 한제의 맞은편에 앉았다. 한제는 멍한 것 같기도 기억을 더듬는 것 같기도 했다. 은혜는 한제의 이런 표정을 처음 봤기에 조금 신기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앉아 있던 은혜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살금살금 주방 쪽으로 걸어갔고 주방에서 나왔을 때 그녀의 손에는 죽이 담긴 커다란 그릇 하나가 들려 있었다.
“흥, 아저씨는 신선 언니한테 죽을 주지 말라고 했으니 몰래 가봐야지!”
은혜는 한제를 빙 둘러 보탑 안으로 들어가 기분 좋은 듯 중얼거렸다.
“사도환⋯⋯.”
한제는 오른손으로 미간을 두드렸다. 순간, 그의 몸이 일곱 빛깔 광채로 변하더니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석주 공간 안에는 여전히 기이한 발광체들이 떠다녔다.
한제는 성큼성큼 앞으로 발을 내딛었다.
사도환의 거대한 원영 옆에 부모님의 혼백이 부드럽게 빛나고 있었다. 한제는 천천히 안정을 되찾아갔다.
그는 일단 부모님의 혼백 앞에 절을 한 뒤 묵묵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그제야 사도환의 원영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도환의 원영은 가부좌를 튼 채 두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몸은 이전만큼 어둡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썩 좋아 보이지도 않았다. 이제 약간 회복한 정도였다.
“사도환의 원영은 이곳에 있어. 그럼 방금 그자는 왜 자신을 사도환이라고 한 걸까? 더구나 황천승규결까지 사용했다면…”
한참 고민에 잠겨 있던 한제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사도환은 일전에 자신이 주작성 사람이 아닌 수련자들과 석주를 훔쳤다고 했어. 그 후에 육신이 파괴되면서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원영만 석주 안으로 들어왔다고 했지.”
한제의 눈이 조금씩 밝아졌다. 그는 방금 보았던 그 잘린 팔을 떠올렸다. 검은 기운은 그 잘린 팔에서 발산되었으니 자신을 사도환이라 일컬은 인영 역시 그 잘린 팔로부터 만들어진 존재일 것이다.
“만약 당시 사도환의 육신을 다른 자가 제련했고 그를 통해 신식이 생겼다면?”
확신할 수는 없었다.
한참 뒤, 길게 한숨을 내쉰 한제는 사도환의 원영을 바라보며 쓰게 웃었다.
“선배님, 그게 정말 선배님의 팔이라면 이제야 이전에 해주셨던 말씀이 믿겨지네요. 선배님이 주작성 최고의 고수였다는 그 말씀 말입니다.”
한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여태까지 줄곧 그는 사도환의 말을 완전히 믿지는 않았다. 오히려 수련을 할수록 불신이 짙어져갔다. 주작성의 최고 고수는 언제나 ‘주작’이라는 호칭의 소유자였다.
사도환이 당시의 주작이 아니었다면 스스로를 주작성 최고의 고수라 칭할 수는 없다. 게다가 지금 사도환은 석주 공간에서 아주 오랜 시간 머물고 있었다. 당시에 그가 정말 최고의 고수였다면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은 더욱 무시무시한 존재가 되고도 남았을 터였다.
한참 고민하던 한제는 다시 한숨을 내쉰 뒤 석주 공간 밖으로 나갔다.
★ ★ ★
설역국.
눈과 얼음으로 만들어진 신전들 중 얼음으로만 만들어진 궁전 안에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중년 남자 하나가 의자에 앉아 있었고 그의 앞에는 암적색 다기(茶器) 한 벌이 놓여 있었다.
그 아래에는 백발이 성성한 두 남녀가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중년 남자는 한쪽에 놓인 죽통을 들어 그 안의 찻잎들을 조금씩 덜어내더니 오른손으로 곁에 있는 얼음 한 조각을 집어 찻주전자에 넣었다.
그의 손가락질에 얼음이 녹아내리더니 금세 끓어올랐다. 씁쓸한 향이 찻주전자에서 피어올라 넓은 공간을 가득 채웠다.
중년 남자는 찻주전자를 들고 그 안에 있는 물을 완전히 따라버린 뒤 얼음 한 조각을 넣어 한 번 더 끓였다.
이번에는 기이한 향이 순식간에 피어올라 대전 안을 가득 채웠던 씁쓸한 향을 밀어냈다. 곧 온 대전 안에 그 짙은 향이 풍겨, 심지어 대전 밖에서도 그 향을 맡을 수 있었다.
“천궐우사(天闕羽絲)의 향과 맛은 소문이 자자하지. 싫증이 나는 일도 없고. 허나 안타깝게도 이 차는 너무도 희귀해 주작국에서 우연히 선물로 받은 게 전부다. 너희는 운이 좋구나. 이리 와서 맛을 좀 보거라.”
중년 남자는 찻주전자를 들어 세 잔의 차를 따라냈다. 그러자 주전자가 동이 나고 말았다.
아래에 서 있던 두 사람은 얼른 앞으로 나와 각자 한 잔씩 들고 맛과 향을 음미했다. 하지만 정신이 다른 데 있는 듯, 노파는 단번에 차를 다 마셔버리더니 중년 남자를 응시하며 말했다.
“종주님, 차도 다 마셨으니 이제 그 천우라는 자를 잡아 죽이시지요.”
중년 남자는 노파가 귀한 차를 단숨에 삼켜버리는 모습을 보며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그자는 소인일 뿐이다. 만약 주작산에서 내린 지시가 아니었다면 벌써 누군가가 그자의 목숨을 앗아갔을 거야.”
“허나 그자는 홍접의 한쪽 팔을 뜯어냈습니다. 홍접은 우리 설역국의 희망입니다, 종주님. 종주님께서 영변기에 이를 수 있었던 것도 홍접이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잊으신 겁니까?”
노파가 분노를 죽여가며 말하는 동안 곁에 있는 노인은 조용히 차를 음미했다.
중년 남자는 냉랭한 눈으로 노파를 주시하며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잊지 않았다. 네가 일깨워 줄 필요는 없다.”
노파는 다시 부복하며 말했다.
“부디 종주님께서 나서 주십시오!”
중년 남자는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