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284
“그 천우라는 녀석에게는 뇌와도 있고 한 쌍의 방울도 있으며, 무수히 많은 금제를 만들어낼 수 있는 작은 깃발도 있다. 게다가 아무리 견고한 것도 다 부술 수 있는 비검도 있지. 또한 요범의 말에 따르면 황천승규결까지 익혔다더군.
허나 이런 것은 다 중요치 않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자의 손에 들린 또 하나의 물건이야. 그 물건은 작은 깃발처럼 보이지만 모든 것을 파멸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 물건이다.”
노파는 흠칫 놀랐다가 말했다.
“종주님께서도 줄곧 그자를 조사하고 계셨군요.”
중년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범에게 나의 법보를 주면서까지 다녀오게 한 것도 다 그를 조사하기 위함이었다. 주작산에서 주시하고 있는 자인데 내가 어찌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겠나. 주작의 이름은 나중에 반드시 홍접의 것이 될 거야. 그런 미래를 망치게 할 수는 없지.”
노파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허나 아직은 때가 아니야. 그자가 홍접과 일전을 벌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때가 되면 내가 직접 나서서 그자를 죽일 것이다. 더구나 거마족 친우로부터 들은 소식에 따르면 그자가 거마족의 성라반을 가지고 있는 듯하니 그가 허무의 공간으로 들어가기라도 하면 영변기 후기 수련자가 아닌 이상 추격할 수 없지. 그러니 그자를 죽이려면 단번에 성공해야만 한다.”
중년 남자의 느릿한 목소리에 노파는 다시 고개를 들며 말했다.
“그 말씀은…?”
“내가 직접 나선다면 그자는 분명 도망치려 할 테니 우선 공간의 균열을 만들지 못하도록 커다란 진을 배치할 것이다. 그리고 거마족에게 도움을 청할 거야. 그 정도라면 그자가 제아무리 날고 기는 재주가 있다 해도 방법이 없지! 나는 아직 나서지 않고 있을 뿐이다.”
중년 남자의 덤덤한 목소리에 노파는 공경의 눈빛을 보냈다.
그때, 곁에 있던 노인이 찻잔을 내려놓고 웃으며 말했다.
“겨우 화신기 수련자 하나 처리하는데 너무 요란스러운 것은 아닌지요?”
중년 남자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자가 가진 경지의 힘이 무엇인지 아느냐?”
노인이 고개를 들었다.
“홍접의 말에 따르면 그자의 경지는 윤회 아래 반복되는 생사를 깨달음으로써 얻은 것이라고 하더군. 그런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자는 화신기 수준이라고 해도 결코 얕잡아봐서는 안 돼.”
중년 남자가 말했다.
그 말에 노파는 한탄했다. 사실 그녀가 천우를 죽여야만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 것은 당시 점을 보아 홍접에게 재난이 닥칠 것을 예견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 재난이 천우로 인해 일어날까 걱정스러웠다.
★ ★ ★
봄이 가고 가을이 오기를 반복하며 눈 깜짝할 새 5년이 지났다.
은혜는 열 살이었다. 아이는 점점 아름답게 자라났지만 그 성격은 갈수록 제멋대로였다. 여인의 시체에게 죽을 먹이는 일에는 더 이상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이따금 여인의 시체를 떠올리긴 했지만 끼니를 챙기러 가는 일은 없었다.
깊은 산 안팎 곳곳에 그녀의 족적이 닿았다. 그녀는 아직 어렸지만 대담하고 용감했다. 산속의 호랑이와 같은 맹수들만이 그녀를 성가시게 할 뿐이었다. 물론 그녀의 능력으로 그 맹수들을 위협할 수는 없었다.
철암은 4년 전 이 산골짜기에 와 있었다. 화신기 진입을 목전에 둔 상태였으나 운천종이 그의 발목을 잡았고 이에 그는 다시 한 번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한제를 따르기로 결심했다.
철암의 보필 아래 은혜는 더욱 대담하게 매일 곳곳을 쏘다녔다.
한제는 지난 5년 동안 화신기 중기에 이르렀으나, 그 후로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도 더 이상은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병목 현상이었다. 만약 이 상태를 돌파하지 못한다면 평생 이 상태에서 멎어버리고 말 것이다.
지난 5년 동안 도전자는 더욱 줄어들었고 천우의 명성은 점점 더 커져 수련자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렸다.
어느덧 10년 뒤로 미루었던 홍접과의 결전일이 다가왔다.
산골짜기 밖에는 반년 전부터 명령을 받은 주작국 수련자들이 만들어놓은 전송진이 배치되어 있었다. 딱 한 번밖에 사용할 수 없으나 단번에 주작국으로 전송시켜줄 진이었다.
지난 열흘 동안 한제는 줄곧 결투에 나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주각국은 그동안 당시의 일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다. 한제로서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주작국에서 자신을 핵심 제자로 받아들이고 싶어 하는 듯했다. 마치 당시의 홍접처럼…
이 결투 또한 그 과정일 것이다. 세상사에 별 신경도 쓰지 않는 주작국의 늙은이들만이 아니라 온 주작성에서 다 알게 될 결투였다.
홍접의 명성은 상당했다. 그녀 때문에 4파 연맹국은 멸망했고 설역국은 5성 수련국으로 진급했다. 이런 일은 주작성 역사를 뒤져보아도 처음이었다. 자연히 홍접의 이름을 모르는 수련자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런 홍접을 꺾으면서 화려하게 등장한 천우의 명성은 그녀보다 크면 컸지 결코 작지 않았다.
그 두 사람이 맞붙는다는 것만으로 이미 주작성 모든 수련자들의 이목이 쏠렸다. 둘 중 이기는 사람은 분명 엄청난 결과를 얻을 수 있을 터였다.
한제라고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다. 그는 주작성의 늙은이들이 두 사람 중 누가 이길지 보고 싶어 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그가 영변기나 화신기 후기였다면 홍접의 한 팔을 뜯어낸 이상 죽음을 면키 어려웠을 것이다. 허나 그는 당시 화신기 초기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오히려 많은 인물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동안 주작국으로부터 별다른 제재를 받지 않은 것도 그 덕분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제의 눈이 기묘하게 번득였다.
10년 전의 약속
검은 줄무늬를 가진 호랑이의 등에 탄 은혜는 작은 버드나무 가지로 호랑이의 머리를 때리며 한제를 몰래 훔쳐봤다. 호랑이는 감히 위세를 부리지도 못하고 순순히 산골짜기 안을 오갔다.
“소백, 고개 들어!”
은혜가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호랑이는 낮게 그르렁대며 순순히 고개를 들었다.
“고개 숙여!”
호랑이가 얼른 고개를 숙였다.
“고개 들어!”
이렇게 열 번을 넘게 반복하는 와중에도 호랑이는 은혜의 말을 순순히 들었다. 일찍이 습관이 된 덕분이었다. 등에 탄 소녀를 즐겁게 해주기만 하면 이전에 검은 곰을 숲에 돌려보내줬던 것처럼 자신도 놓아줄 것이라고 호랑이는 생각했다.
이 호랑이는 보통 짐승이 아니라 여러 해 동안 수련을 한 호랑이였기에 옆에서 좌선을 하고 있는 노인의 몸에서 발산되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감히 반항을 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보탑 아래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한제는 억울한 표정으로 은혜 밑에 깔린호랑이를 보며 웃었다. 그 호랑이는 3백 년도 넘게 수련을 했지만 인간으로 치면 겨우 축기기 수준에 불과했다.
처음 그 호랑이를 본 은혜는 철암에게 붙잡아 달라고 했고 소백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천우 도우, 이 손옥산이 주작산의 명을 받고 도전장을 전하러 왔소! 이제 10년 전의 약속을 지킬 시간이오.”
산골짜기 밖에서 손옥산의 목소리가 느릿하게 흘러나왔다.
한제는 잠시 숨을 고른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철암!”
철암은 눈을 퍼뜩 뜨더니 일어나 공손하게 한제에게 다가왔다.
“주작국에 다녀와야겠어. 언제 돌아올지는 모르겠지만 9년은 넘지 않을 거야. 반드시 돌아올 테니 그동안 은혜를 좀 돌봐줘.”
은혜는 한제를 보지 않고 있었지만 그의 말을 다 듣고 있었다. 그녀는 작은 입술을 삐쭉 내밀며 소백의 머리를 꽉 움켜쥐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나쁜 아저씨! 나쁜 아저씨!”
말을 내뱉을 때마다 은혜의 손은 소백의 털을 꽉 움켜쥐었다. 열 살짜리 여자아이의 악력이야 세지 않았지만 왕(王)자 줄무늬가 있는 이마 부분의 약한 털을 잡아당겼으니 아플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소백은 감히 화를 내지도 못하고 그저 낮은 소리로 그르렁대며 분을 삭였다.
철암은 고개를 숙여 답한 뒤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은인님, 주작국에는 고수가 셀 수 없이 많을 겁니다. 어디를 가시든 반드시 조심하십시오.”
4년 전 다시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한제를 따르기로 결심한 뒤부터 종주님이었던 호칭은 은인님으로 바뀌어 있었다. 예전에는 목숨을 구해주었고 이제 화신기에 이르도록 도와주고 있으니 그에게는 실로 은인이었다.
한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탑은 완전히 활성화시킨 채 두고 가겠다. 1백 리 안으로는 너와 은혜를 제외한 누구도 들어올 수 없어. 내가 없는 동안 은혜를 잘 보살펴야 한다.”
“은인님, 안심하십시오. 반드시 모완⋯⋯ 여 아가씨를 안전하게 보호하겠습니다.”
철암이 얼른 답했다.
한제가 저물대를 두드리자 한 줄기 흰색 섬광이 튀어나오더니 펑 소리와 함께 뇌와가 나타났다.
뇌와를 본 은혜의 두 눈이 반짝였다. 그녀를 태우고 있던 소백은 갑자기 나타난 두꺼비의 강하고 요사스러운 기운에 깜짝 놀라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
“이리 와, 은혜야.”
한제는 쪼그려 앉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은혜는 작은 입술을 삐쭉거리며 딴청을 피웠다. 그러다가 이내 호랑이의 머리를 두드리며 한제에게 혀를 쏙 내밀더니 낭랑하게 외쳤다.
“나쁜 아저씨! 혼자만 놀러가고! 나는 안 데려가고!”
한제는 소리 없이 웃었다. 지난 몇 년 동안 은혜는 갈수록 말을 듣지 않았다. 당시의 모완과는 전혀 다른 성격이었다. 만약 은혜의 체내에서 모완의 원영이 또렷하게 느껴지지 않았다면 한제는 자신이 사람을 잘못 데려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난 몇 년간 은혜는 숲의 야수들 중 조금이라도 강해 보인다 싶은 녀석들을 한 번쯤은 괴롭혔다. 허나 좀 놀려줬을 뿐, 결코 다치게 하는 법은 없었다. 오히려 상처 입은 야수들을 보면 한제에게 가서 구해달라고 조르곤 했다. 그럴 때면 영락없는 모완의 모습이 엿보였다.
한제는 은혜를 볼 때면 내심 미안해지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또래 친구들이 아닌 저런 야수들과만 어울리게 한 것이 너무 이기적인 생각은 아니었을까 스스로 반문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잠시뿐이었다. 그는 본디 공정하고 객관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은혜를 다른 사람의 집에 두면 안심할 수가 없었다. 오직 자신의 손길이 닿는 이곳에 있어야만 그녀가 무사함을 확신할 수 있었다.
“우리 여, 착하지? 아저씨 잠깐 어디 좀 다녀올게. 금방 돌아와서 여한테 큰 호랑이를 한 마리 잡아줄게.”
한제가 웃으며 말했다.
“얼마나 큰 거? 소백보다도 큰 거?”
한제의 말 한 마디에 금세 기분이 풀어진 것을 보면 이러니저러니 해도 은혜는 아직 아이였다.
“당연히 소백보다도 큰 거지!”
한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은혜는 잠시 뭔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말했다.
“좋아, 그럼 얼른 다녀와.”
한제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얼른 다녀올게. 내가 없는 동안 철암 할아버지 말 잘 들어야 해. 알았지?”
은혜는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