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285
“그럼 커다란 호랑이 잡아주는 거 잊지 마!”
한제는 빙그레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철암을 보았다. 철암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은혜와 관련된 일이라면 아무리 조심해도 부족했다. 그래서 뇌와를 남겨두기로 한 것이다. 뇌와가 있으면 만에 하나 철암이 변심을 하더라도 막아줄 수 있을 터였다.
사실 한제의 이런 걱정은 쓸데없는 것이었다. 철암은 다른 것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가 바라는 것은 오직 화신기에 이르는 것뿐이었고 그에게는 오로지 한제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해줄 은인이었다.
또한 은혜가 어렸을 때부터 봐온 그는 어느새 아이를 친딸이나 손녀처럼 여기고 있었으니 한제의 분부가 없더라도 전심을 다해 지킬 참이었다. 더구나 당시의 모완이 그에게 얼마나 많은 단약을 만들어 주었던가?
한제는 신식을 통해 뇌와에게 은혜를 지키도록 지시를 내렸다. 뇌와는 배를 불룩하게 부풀렸다. 알겠다는 대답인 듯했다. 그리고는 그대로 바닥에 엎드려 햇빛을 쬐면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한제는 뇌와에게 상당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때로는 인간보다 마수가 더욱 믿음직한 법이었다.
사실 한제에게는 마지막 보호장치인 자신의 본체도 있었다. 본체는 보탑 아래 깊숙한 곳에 있으니 크게 마음이 놓였다. 다만 반드시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다른 사람에게 본체의 존재를 알릴 마음은 없었다. 본체야말로 그의 진정한 필살기였기 때문이다.
모든 임무를 맡긴 한제는 산골짜기 밖으로 향했다.
자신의 앞날에 무엇이 있을지 그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지난 5백 년 동안의 수련으로 굳건한 그의 마음은 아무리 놀라운 일에도 쉬이 흔들리지 않았다. 그저 수련의 길을 계속 걸을 뿐, 그 사실은 단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변하지 않을 터였다.
은혜는 고개를 들어 멀어져 가는 한제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돌연 소백의 털을 꽉 쥐었다. 은혜의 마음을 알아챈 소백은 곧장 앞으로 내달려 한제를 뒤쫓았다.
한제가 뒤를 돌아보았다. 소백의 등에서 뛰어내린 은혜는 한제에게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아저씨, 앉아봐.”
웃으며 쪼그려 앉은 한제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큰 호랑이 잊지 말라고?”
은혜는 고개를 젓고는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 그리고 진지하게 말했다.
“아저씨, 얼른 돌아와야 해. 보고 싶을 거야.”
한제는 멍한 얼굴로 은혜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돌아올게.”
그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자리에서 일어나 산골짜기 밖으로 향했다.
은혜는 한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저씨가 갔다. 나랑 놀지 않고⋯⋯ 소백, 앞으로는 네가 매일 나랑 놀아줘야 해. 알았지?”
소백은 고생길이 열렸다 싶은 마음에 몸을 부르르 떨면서도 낮게 그르렁거리며 맥없이 대답했다.
은혜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땅에 떨어졌다.
그녀는 지난 7년간 한제와 떨어진 일이 거의 없었다. 함께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잠시라도 떨어지기 싫은 마음이 커졌다.
우연히도 은혜는 당시 모완이 눈물을 흘렸던 바로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렸다. 당시 그녀가 흘렸던 눈물은 슬픔과 쓸쓸함을 담고 있었겠지만 지금 은혜의 눈물은 그리움과 아쉬움을 담고 있었다.
“소백, 돌아가자!”
은혜는 눈물을 훔쳐낸 뒤 호랑이에게 말했다. 소백은 그녀를 달래듯 가르릉거렸다.
한제와 홍접의 결전일 한 달 전, 거마족에 엄청난 사건이 발생했다. 거마족 내의 한 수련자가 치호가 가져온 선옥을 흡수한 뒤 화신기를 돌파하여 주작성에서 처음으로 영변기에 이른 거마족 수련자가 된 것이다.
역사에 큰 획을 그은 후 거마족은 5성 수련국으로 승급하게 되었다.
주작국에서는 세상사에 별 관심도 없는 문정기 수련자 하나를 보내 직접 거마족의 영변기 수련자를 방문하게 했다.
사실 몇 년 전부터 거마족에 영변기 수련자가 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증거는 없었다. 그래도 상당히 믿을 만한 소문이었다. 어쨌든 거마족 소족장 치호가 선계에 다녀온 뒤 대량의 선옥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변기 수준에 이른 노인이 거마족을 5성 수련국으로 올려달라고 신청했을 때에야 그 소문은 사실로 밝혀졌다.
거마족은 주작성의 수련자가 아니라 아주 오래 전 다른 별에서 이주해온 이들로 그들의 강대함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당시의 치호도 화신기 중기 수준에 불과했지만 화신기 후기 수련자와 맞붙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주작국이 5성 수련국으로의 승급에 보통 영변기 후기 수련자를 보내는 것과 달리 문정기 수련자를 보낸 것도 그 때문이었다.
거마족의 승급은 마치 한 방울 먹물이 맑은 물에 떨어진 것처럼 처음에는 별다른 변화를 일으키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변화는 확산되어 갔다.
이 모든 것은 사실 지금의 한제와는 어떤 관련도 없었다.
한제는 산골짜기 밖으로 나가 손옥산 등과 함께 전송진에 들어섰다. 그리고 순식간에 한제의 시야에서 산골짜기의 전경이 사라졌다.
주작국은 ‘주작 대륙’이라 불리는, 주작성의 가장 큰 육지에 있다.
주작 대륙에는 총 네 개의 수련국이 있는데 주작국을 제외하면 모두 5성 수련국이다. 이들은 주작성을 통틀어 가장 강한 3개의 5성 수련국들로 청룡국(靑龍國), 천환국(千幻國), 비로국(毘盧國)이다.
이 세 나라의 정중앙에 자리한, 주작 대륙의 3분의 1 정도를 차지하는 곳이 바로 주작국이다. 심지어 일반인조차 주작국 사람은 다른 수련국의 일반인들보다 등급이 높았다.
주작국에는 총 세 개의 종파가 있는데 이 세 개의 종파는 각각 천옥종(天玉宗), 지백문(地魄門), 그리고 인도선(人道仙)이 그들이다.
이 세 종파에는 각각 한 명의 문정기 수련자가 있고 주작산의 유일한 문정기 후기 수련자 ‘주작’과 함께 주작성에서 가장 큰 힘을 이루고 있었다.
주작국의 제단 위에 굵직한 빛기둥 하나가 위엄을 내뿜으며 하늘에서부터 내려왔다. 그 위엄은 사방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천옥종 안의 뒷산, 연못에 뜬 연잎 위에서 홍접이 가부좌를 튼 채 좌선을 하고 있다가 돌연 두 눈을 번쩍 떴다. 그녀의 눈은 빛기둥이 내려온 방향을 향했다.
그녀는 서늘한 눈을 빛내며 중얼거렸다.
“왔군.”
제단 위에서 한제의 모습이 천천히 나타났다. 그의 뒤에서 손옥산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임무를 마친 그는 드디어 주작산으로 가서 자신의 임무에 대해 보고할 수 있게 되었다.
주작국
제단 위에는 한제와 손옥산 외에도 한 여인이 서 있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보라색의 긴 치마 끝자락에는 한 송이 백합에 내려앉은 보라색 나비 한 마리가 수놓아져 있었다. 남색 면사를 몸에 걸친 그녀의 두 눈은 그윽했고 코는 높았으며, 얇은 입술은 옅은 붉은색이었다.
“셋째 사저를 뵈옵니다.”
손옥산은 여인을 보자마자 공손하게 말했다.
여인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한제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그쪽이 천우 도우인가?”
여인의 아름다운 용모에도 미동하지 않던 한제가 포권을 하며 말했다.
“그렇소.”
“나는 인도선의 제자 백설이라 하네.”
살짝 웃는 여인의 피부는 눈처럼 희었으며, 3척에 이르는 길고 검은 머리카락 중 두 가닥은 가슴팍 앞으로 나머지는 뒤쪽으로 넘겨 쪽을 지고 있었다. 상당히 고상하고 우아한 여인이었다.
“사부님께서 여기에서 기다렸다가 자네를 맞이하여 데려오라고 하셨지.”
한제는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여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인도선?”
백설은 고개를 살짝 끄덕인 뒤 입을 열었다.
“천우 도우와 홍접 사이의 결투일은 주작산에서 보름 뒤로 정했지. 때가 되면 각 수련국 수련자들이 주작국으로 와 전투를 관람하려 할 거야. 그 전까지 도우의 거처는 우리 인도선이 맡기로 했고.”
한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설은 빙긋 웃으며 제단 아래로 몸을 날렸다. 한 줄기 하얀 빛이 먼 곳에서 날아와 가뿐하게 백설의 발을 받쳐 들었고 백설은 그것을 밟고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 빛은 눈처럼 흰 학이었다.
한제도 발을 살짝 굴러 그 학에 올라탔다. 그러자 학은 날갯짓을 해 먼 곳으로 날아갔다.
손옥산은 부럽다는 듯이 그 학을 바라보더니 주작산으로 향했다.
백설은 학에 오르고 나서도 이따금씩 한제를 바라보았다. 지난 몇 년 동안 엄청난 위세를 떨쳤던 천우를 직접 본 그녀는 약간 실망한 상태였다. 천부적인 자질을 가졌을 거라 예상했지만 눈앞의 사내는 극도로 평범했다.
“천우 도우, 홍접과의 전투에서 이길 가능성은 어느 정도라고 보나?”
“가능성이 없지.”
한제는 백설의 물음에 주작국을 살피던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에 백설은 흠칫 놀랐다가 이내 웃었다.
“그렇게 겸손하게 굴 것 없네.”
한제는 백설의 말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해서 아래를 살피며 지형을 천천히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그가 가진 지도 옥패에는 주작 대륙을 대략적으로만 그려놓았을 뿐 상세한 정보는 담겨 있지 않았다.
한제는 주작국이 자신을 핵심 제자로 받아들이려 할 것이라 추측하면서도 경계심을 유지했다.
“백설 도우, 이 주작국에는 어떤 종파가 있나?”
한제의 질문에 백설은 조목조목 설명을 해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편안하여 듣기 좋았다. 그녀의 설명에 한제는 주작국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되었다.
“홍접은 천옥종의 제자야.”
말을 마친 백설은 다시 천우를 살폈다. 그녀는 일전에 사부로부터 주작산에서 천우를 자신들의 종파로 넣으려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었다.
한제는 덤덤한 눈빛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학은 그리 빠르지 않았지만 굉장히 안정적으로 날았다. 덕분에 한제는 이동하는 동안 아래 내려다 보이는 산과 개울들을 머릿속에 새길 수 있었다.
주작국에는 영력이 충만했다. 그 점에서는 어느 수련국도 비교가 되지 않았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본 영맥만 해도 열 개가 넘었다.
그러던 중, 저 멀리 구름을 뚫을 듯 높이 솟은 산이 나타났다. 구름과 안개로 덮인 모습이 퍽 신비로웠다.
두 사람을 태운 학은 그 산을 빙 둘러갔다. 한제는 조용히 생각에 빠졌다.
“저기가 바로 천옥종의 산이네. 진으로 보호되어 있지.”
백설이 조용히 일렀다.
그때, 갑자기 붉은색 인영이 나타나 그 선산 위에서 내려오더니 흰 구름을 타고 다가왔다.
한제는 말없이 그 인영을 주시했다. 학이 먼 곳으로 날아가면서 그 붉은 인영은 점차 시야에서 사라져갔다.
홍접은 천옥종 밖에 서서 멀어져 가는 한제를 바라보았다. 표정은 한 층 더 냉랭해졌고 서늘한 눈빛은 더욱 번득였다. 가벼운 바람이 불자 그녀의 오른팔 빈 소매가 펄럭거렸다.
“그자가 왔어!”
홍접은 몸을 돌려 천옥종으로 향했다.
한제는 학 위에 서서 말없이 백설을 훑어보았다. 그녀가 이 길을 택한 데에는 어쩌면 다른 의도가 있는지도 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학은 긴 용 같은 산맥으로 진입했다. 피어오르는 구름과 연기를 뚫고 들어간 학은 더욱 깊은 곳으로 날아갔다.
저 멀리 거대한 분지가 나타났다. 그 안쪽으로는 옥으로 만든 아름다운 건물이 무수히 많았다. 학이 그곳으로 들어서자 백설은 학의 등에서 뛰어내렸다. 한제가 그녀를 뒤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