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286
지면을 딛고 선 백설은 뒤를 돌아보며 조용히 말했다.
“천우 도우, 이곳은 우리 인도선이 아니라 스승님의 댁인 선부(仙府)일세. 스승님은 지금 수련 중이시니 북쪽 세 개의 방 중 아무거나 쓰게. 스승님께서는 수련이 끝나는 대로 자네를 보러 가실 거야.”
말을 마친 그녀는 한제에게 포권을 취한 뒤 몸을 돌려 여러 건물 사이로 사라졌다.
한제는 주작국 안에서는 마음대로 신식을 펼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백설의 말에 따라 북쪽으로 향했다. 종을 몇 명 마주쳤으나 그들의 표정은 모두 딱딱했고 한제를 본 척도 않고 지나쳐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북쪽에 이른 한제는 세 개의 호화스러운 방 중 하나를 골라 들어갔다. 방에는 필요한 것이 다 갖춰져 있었다.
한제는 침상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생각을 정리했다.
주작국에 들어왔을 때부터 그는 줄곧 위기감을 느꼈다. 굉장히 약한 느낌이었으나 계속해서 느껴졌다. 이 주작국 안에서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적지 않다.
게다가 자신을 대하는 주작국의 태도도 수상쩍었다. 심지어 백설이 직접 맞으러 나오기까지 한 것을 보면 그녀의 스승이 자신을 만나고자 하는 모양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한제는 답이 나오지 않자 눈을 감고 좌선한 채 호흡했다.
해질 무렵, 바깥은 어둑했고 등불을 밝히지 않은 방 역시 점점 어두워졌다. 그 어둠 속에서 한제는 순간 고독을 느끼며 눈을 떴다.
낯선 방, 낯선 종파, 낯선 주작국. 자신의 존재감은 전혀 찾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작게 한숨을 내쉬던 한제가 촛불을 밝히려던 순간, 그의 신식이 무언가를 감지했다. 한제는 방문을 바라보았다.
똑, 똑, 똑.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시오!”
한제의 목소리에 기척 없이 방문이 열리더니 푸른 옷의 사환 하나가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과일이 담긴 쟁반이 들려 있었다. 사환은 쟁반만 내려놓더니 몸을 돌려 나가려 했다.
“잠깐!”
한제의 부름에 사환은 걸음을 우뚝 멈추더니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열서너 살 정도로 보이는 사환은 얼굴이 희고 깨끗했으며 용모가 수려했다.
한제가 뭔가를 묻기도 전에 사환은 입을 벌리고 입 안쪽을 가리켰다. 사환의 입 안에 들어 있는 혀는 반 토막뿐이었다.
한제는 흠칫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으나 사환은 밝게 웃어 보인 후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이내 방문이 닫혔다.
어째서인지는 한제는 선부(仙府)에 대해 줄곧 음산한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쟁반 위의 과일을 바라보던 한제는 눈을 감고 좌선을 계속했다. 그의 오른손은 줄곧 저물대 위에 놓여 있었다. 언제든 위급한 상황이 되면 곧바로 대항하기 위해서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사흘이 지났다. 그동안 한제는 그 사환 외의 다른 사람은 만나지 못했다.
둘째 날 이른 아침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았는데 그때 마주친 종들도 모두 혀가 반 토막이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 구역에 강력한 금제가 걸려 있었는데 한제로서도 단시간에 풀어낼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기이한 곳이었다.
한제는 고민 끝에 주변 탐사를 그만두고 줄곧 방 안에서 좌선에 집중했다. 최고의 상태로 홍접과의 전투에 나서기 위해서였다.
그날도 어김없이 좌선을 하던 한제는 순간 두 눈을 번쩍 떴다. 한 중년 남자가 방 안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차를 따르던 그는 주전자를 한쪽에 내려놓고 한제를 바라보았다.
단정한 얼굴에 수염은 없었지만 수염이 있을 법한 부분은 푸르스름했다. 밝은 두 눈에서 연기와 구름이 흐릿하게 풍기는 것 같았다. 그는 말없이 앉아 있었지만 그의 위엄만큼은 충분히 느껴졌다.
하지만 한제는 침착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수월하게 자신의 방 안으로 들어와 앉을 때까지 알아채지 못했음에도 전혀 놀랍지 않았다.
주작국에 자신보다 수준 높은 자는 차고 넘쳤다. 더구나 자신도 이제 막 수련의 길에 오른 풋내기가 아닌 만큼 별것도 아닌 일에 쉬이 놀라지 않았다.
중년 남자는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오른손 검지로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여전히 말은 없었다.
한제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 안은 무서울 정도의 적막으로 가득했다. 보이지 않는 압력이 탁자를 두드리는 중년 사내의 검지로부터 천천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선계에 들어갔던 당시처럼 화신기 초기 수준이었다면 견디기 힘들었을 압력이었으나, 지금 한제는 너무도 침착하고 평온했다.
한참 뒤, 중년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방을 나갔다. 둘은 단 한 마디의 이야기도 나누지 않았다.
한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로 다가갔다. 탁자 위에 쏟아진 찻물이 흩어져 몇 개의 글자를 이루고 있었다.
지면 죽는다.
한제는 손으로 탁자를 문질러 물기를 닦아낸 후 번득이는 눈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방금 그 중년 남자는 영변기 수준이었다. 아마 백설의 스승일 터였다.
그가 남긴 글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홍접과의 결투에서 패한다면 자신은 죽을 것이다.
한제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감고 좌선했다.
★ ★ ★
결전의 날이 밝았다.
주작국의 거대한 제단은 매우 붐볐다. 각 수련국에서 온 사자들이 결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결투는 일찍이 10년 전부터 많은 수련자들로부터 관심을 받고 있었다.
결투를 치를 두 사람 모두 화신기 수준이었지만 둘의 신분은 상당히 달랐다.
홍접은 설역국의 하늘의 딸이었고 주작국 내에서도 주목받는 천재로 문정기에 이를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으로 점쳐지기도 했다.
한편, 천우는 그 시초가 불분명했고 처음에는 별다른 명망도 없었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선정(仙鼎)을 얻어 선계에 진입했고 그곳에서 홍접의 팔을 잘라냄으로써 상당한 명망을 얻게 되었다. 그것도 화신기 초기에 불과했던 때에 화신기 후기의 홍접과 붙어 그녀의 팔을 잘라냈으니 놀라운 일이었다.
개개인으로도 주목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이런 악연으로 얽혔고 드디어 결투를 벌이게 됐으니 이목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홍접은 제단 위 오른쪽에 얌전히 서 있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옅은 푸른색 궁복의 치맛자락과 소매에는 어두운 보라색의 작은 꽃무늬가 수놓아져 있었다.
폭포 같은 검은색 머리칼을 묶은 물 색깔 댕기 외에는 장신구조차 없었다. 그녀의 얼굴은 맑고 탈속적이었으나 매우 아름다웠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나풀거리는 빈 소매만이 그림 같은 그녀에게 유일한 흠이었다.
제단 바깥의 공중에는 흰색 고리들이 떠 있었고 그 위에는 여러 개의 대나무 의자가 배치되어 있었다.
그 의자에 앉은 사람 중에는 남자도 있었고 여자도 있었으며, 늙은 사람도 있었고 어린 사람도 있었다. 이들은 모두 다른 수련국의 사자들이었다.
홍접과의 전투
1백 명에 가까운 이들이 모여 있었지만 어떤 시끄러운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이들은 바깥의 빛 고리에 앉아 있었는데 가장 안쪽의 빛 고리에는 의자가 단 네 개뿐이었다. 그리고 그 네 개의 의자에는 각각 사람이 앉아 있었다. 이들은 모두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이었다.
그때, 멀리서 학 한 마리가 느릿하게 날아왔다. 그 학 위에는 하얀 옷을 입은 청년 한 명이 서 있었다.
늠름함 자태에 머리카락은 보라색 끈으로 묶어 올린 사내의 생김새는 평범했지만 말로 형언하기 힘든 기질이 느껴졌다.
그의 곁에는 보라색 옷을 입은 여인이 서 있었는데 그 아름다움은 홍접에게도 결코 뒤지지 않았다.
학은 춤을 추듯 날아 제단 위에 이르러 길게 울었고 그 위에 있던 하얀 옷의 청년, 한제는 훌쩍 뛰어내려 제단에 착지했다.
홍접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빈 소매를 내려다보았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의 눈은 깊은 한이 어린 서늘한 빛으로 번득였다.
한제는 그녀에게 처음으로 패배를 안겨준 사람이자 한 팔을 뜯어낸 사람이었다. 만약 정정당당한 싸움이었다면 이토록 한이 깊지는 않았을 것이다. 허나 당시 한제는 자신이 가장 약해진 틈을 타 공격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도심(道心)을 흐트러뜨리려고도 했다. 그 후로 지금까지 수준이 전혀 성장하지 못한 것도 모두 그 때문이었다. 오직 상대를 죽여야만 자신의 도심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
반면 한제는 덤덤한 눈빛으로 제단에 서서 홍접을 바라보았다.
안쪽 빛 고리에 있던 네 노인 중 한 명이 냉랭한 눈빛으로 한제와 홍접을 힐긋 살피더니 말했다.
“나는 주작산의 장로 공손파다. 이 결투를 중재할 자이기도 하지.”
그는 오른손으로 결인을 그린 뒤 허공을 두드렸다. 순간, 한제와 홍접 사이에 빛의 문 하나가 나타났다.
“들어가라. 그 안쪽이 너희의 전장이다.”
노인은 그 말을 끝으로 눈을 감더니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홍접은 몸을 훌쩍 날려 빛의 문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모습이 사라졌다.
한제 역시 침착하게 그 빛의 문을 자세히 살핀 뒤 안으로 들어섰다.
두 사람이 모두 문 안으로 들어가자 빛의 문은 곧장 거대해져 온 제단을 뒤덮었다.
한제는 빛의 문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 문이 일종의 전송진임을 알아챘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황량한 산속이었다.
사방은 고요했고 하늘은 어두워 빛이라고는 없었다. 마음을 초조하게 하는 기운만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거대하고 오래된 나무들이 사방에 어지럽게 자라나 있었고 1백 척 밖에는 물통 만한 굵기의 뱀이 있었다. 붉은 줄무늬의 거대한 뱀은 나뭇가지로부터 머리를 드리운 채 혀를 날름거리며 냉랭한 눈으로 한제를 주시했다.
“천우!”
하늘 위에서 여린 외침이 들려왔다.
한제는 하늘로 떠올랐다. 그때, 한 줄기 붉은 빛이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그 빛이 채 다가오기도 전에 서늘한 기운이 확산되는 것이 느껴졌다. 그 한기는 엄지손가락만 한 낱알들로 변해 빠른 속도로 접근해왔고 한제로부터 1백 척 정도 떨어진 곳에서 응결되더니 거대한 얼음 조각을 이루었다.
높이만 해도 수백 척에 이르는 거인 형상의 얼음 조각은 무표정한 얼굴로 한제에게 거대한 주먹을 날렸다.
한제는 얼른 뒤로 물러났다. 그때, 거인의 정수리에서 붉은 빛이 번득이더니 홍접이 나타났다. 서늘한 눈으로 한제를 노려본 그녀가 입을 벌리자 한 줄기 선연한 빛이 토해져 얼음 장미로 변했다.
그녀는 한제와 오래 싸울 마음이 없었다. 속전속결로 끝낼 작정이었다.
거인이 주먹을 날리던 그때, 홍접은 왼손으로 장미 꽃잎 하나를 떼어내 앞으로 내던졌다. 순간, 그 꽃잎은 거대한 풍랑을 만난 배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한제는 침착하게 오른손을 흔들어 금번을 꺼내 휘둘렀다. 금번으로부터 튀어나온 금제들이 각각 한 마리 용이 되어 서로 교차하며 거대한 주먹을 이루었더니 거인의 주먹에 맞섰다.
펑!
하늘을 뒤흔들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고 아래쪽의 오래된 나무들이 그 충격에 갈라졌다. 나무 위에 있던 뱀도 휘청거리며 떨어져 지면에서 꿈틀거렸다. 녀석의 몸 곳곳에는 핏자국이 가득했다.
거대한 충격에 얼음 조각으로 만들어진 거인도 주먹에 균열이 난 채 뒤로 주춤 물러났다.
한제가 만들어낸 금제의 주먹 역시 무너져 내렸고 좀 전의 충격이 금번으로 전해지면서 금번에도 균열이 일었다.
“이건 우리 설역국에서 5백 년의 시간을 들여 만든 법보, 얼음신이다. 천우, 너는 오늘 반드시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