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289
얼음 신은 극도로 약해져 있었고 여러 차례 부상을 입으면서 크기 역시 대폭 줄어 있었다. 여기에서 한 번 더 줄어든다면 곧장 붕괴할 것이다.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도망뿐이었다.
그녀의 삶에서 도망이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선계에서 잔뜩 허약해져 있었을 때 천우에게서 도망친 것이었다.
한 사람에게 두 번이나 도망을 쳐야 하다니, 공개적인 자리에서 뺨을 얻어맞은 듯한 치욕이었다. 동시에 천우에 대한 그녀의 한은 더욱 깊어졌다.
한제는 그녀의 뒤를 바짝 쫓았다. 그는 어두운 얼굴로 계속해서 순간이동을 통해 도망치고 있는 전방의 홍접에게 말했다.
“홍접, 네 고고함은 어디로 갔느냐? 주작성의 하늘이 내린 딸이 겨우 화신기 중기 수련자에게서 도망이라도 치려는 것이냐? 나를 죽이겠다던 말은 모두 거짓이었나? 아니면 도망이라도 쳐서 나를 지쳐 죽게 할 참인가?”
한제는 홍접을 도발하고 살살 약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자 어느 순간, 홍접이 우뚝 멈춰 섰다.
“천우! 내가 널 죽이지 못한다면 더 이상 홍접이 아니다. 분신술!”
홍접은 상대가 자신을 도발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순간, 이변이 발생했다.
그녀의 날카로운 외침 속에서 모든 꽃잎이 떨어진 장미가 거인 앞에 나타났다. 그 장미에는 두 개의 꽃술이 달려 있었다. 홍접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눈을 감고 원신을 둘로 나누었다. 그중 하나는 그녀의 미간을 통해 밖으로 나와 꽃술 안으로 들어갔다.
순간, 두 개의 꽃술이 한데 응집되더니 붉은 안개로 뒤덮인 아름다운 인영을 이루었다. 홍접과 똑같은 모습의 분신이었으나, 사지가 멀쩡했다.
홍접의 분신은 두 눈을 번쩍 떴다. 침착한 눈빛이었다. 거인의 이마에 자리한 홍접 본체와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홍접의 본체가 냉랭하고 무정하다면 이 분신은 슬픔도 기쁨도 느끼지 않는 듯 평온하고 우아했다.
“천우, 당분간 영변기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너만은 반드시 죽일 것이다.”
홍접의 본체가 한이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이 분신술은 그녀가 영변기에 이르기 위해 준비해 두었던 것으로 몰래 익히고 있던 술법이었다. 이를 통해 영변기에 이른다면 난도가 낮아져 성공할 가능성이 대폭 늘 것이었다. 그렇기에 결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분신을 내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 천우를 죽이기 위해 그녀는 그 어떤 대가라도 치를 생각이었다.
분신의 체내에는 어떤 영력도 없었다. 이 분신은 원신으로 만들어진 것이기는 했지만 그 안에는 홍접이 천도를 통해 깨달은 절정(絶情)의 경지가 두 배로 축적되어 있을 뿐이었다.
“절정의 경지!”
홍접의 본체와 분신이 동시에 외쳤다.
순간, 분신이 앞으로 달려들었다. 일곱 색깔의 빛이 그녀의 몸에서 번득였다.
“속세로 들어가 세간의 일을 끌어내고 지혜의 검을 휘둘러 일체의 감정을 끊어낸다. 그것이 바로 절정의 경지다.”
홍접의 분신이 작게 외쳤다.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감정의 인도.”
순간, 하늘의 색이 변하더니 기이한 힘이 하늘을 뒤덮었다. 일곱 빛깔의 빛 덩어리들이 홍접의 분신 주위로 모였다가 한제를 향해 날아들었다.
“혈육 간의 정!”
두 개의 빛 덩어리가 갈라지더니 남녀 한 쌍의 환상을 보여주었다. 사내는 머리가 희끗희끗했고 여인의 눈빛은 자애로웠다.
“연모의 정!”
빛 덩어리로부터 모완의 환상이 만들어졌다. 한제를 바라보는 모완의 눈에 끝없는 슬픔이 배어 있었다.
“원한의 정!”
등화원이 빛 덩어리를 찢고 비열한 웃음을 흘리며 나왔다. 그의 손에 들린 영혼의 깃발에서 이 씨 가문 영혼들이 고통스럽게 애걸하고 있었다.
“깨달음!”
증대우와 그의 3대 자손이 빛 덩어리에서 걸어 나와 멍하니 한제를 바라보았다. 대우는 입을 쩍 벌리고 뭔가를 말하려는 듯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는 않았다.
한제의 속도가 느려지다가 이내 그 자리에 멈추었다. 가부좌를 틀고 허공에 앉은 한제는 미간을 두드려 원신을 허공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윤회 아래 작용하는 생사의 천도!”
순간, 마치 거대한 손에 찢긴 듯 하늘에 커다란 공간의 균열이 나타났다. 그 안쪽으로는 흑백으로 그려진 듯한 산수화가 나타나 펼쳐졌다. 커다란 산과 들, 강과 하천이 그려진 그 그림은 움직이고 있었다.
생사와 윤회를 담은 그림 아래, 한제의 원신은 두 눈을 번득였다. 그는 눈앞에 있는 인영들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복잡한 기색 한 가닥이 그의 두 눈으로부터 발산되었다.
“지혜의 검!”
홍접의 분신이 다시 외쳤다.
일곱 빛깔로 이루어진 거대한 검의 허상이 홍접의 분신 앞쪽에 나타났다.
“베어라!”
칼이 한 번 스치고 지나가면서 한제의 부모가 죽어버렸다. 모완이 그 뒤를 따랐다. 대우 부자는 등화원의 손짓 한 번에 죽음을 맞았고 마지막으로 등화원은 비열한 웃음을 흘리며 그 거대한 검의 허상에 스쳐서 사라졌다.
“절정(絶情)!”
홍접의 분신은 약간 지친 듯한 얼굴로 오른손을 들어 한제를 가리켰다.
한제의 원신은 부르르 떨었다. 곧이어 그의 두 눈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는 오른손을 들어 하늘에 나타난 생사의 그림을 가리켰다.
“무정한 사람이라 해도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법! 세상 일 중 끊겠다고 끊어지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지혜의 검이 아무리 길어도 끝없는 윤회를 헤칠 수는 없다.”
한제가 외쳤다.
생사의 윤회를 담은 그림 안에서 검은색과 흰색 기운 두 갈래가 발산되어 한데 교차하더니 윤회의 회색 기운을 이루었다. 그리고 그 회색 기운은 거대한 손가락이 되어 홍접의 분신을 건드렸다.
쓴웃음을 짓던 홍접의 분신은 부르르 떨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가 영변기에 이르렀다면 생사의 윤회라 하더라도 절정(絶情)을 내포시킬 수 있었을 텐데… 윤회는 본디 무정한 것이니까 안타깝구나.”
홍접의 분신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은 천천히 흩어져 사라져버렸다.
드러나는 음모
홍접의 본체는 한 움큼의 선혈을 토해냈고 그녀의 원신도 부상을 입었다. 두 눈에 가득했던 원한이 사라지고 어느새 한 줄기 깨달음이 어려 있었다.
한제의 원신은 육신으로 돌아와 경련을 일으켰고 얼굴은 갈수록 창백해졌다. 경지의 힘을 통한 전투는 겉보기와 달리 매우 위험하고 거칠었다.
홍접이 절정(絶情)의 경지를 펼쳐 지혜의 검을 휘둘렀을 때, 한제의 원신은 부상을 입었다. 그가 화신기 중기에 이르렀고 생사의 경지에 대한 깨달음이 깊었기에 가까스로 원신이 파괴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생사의 경지를 펼친다 해도 가까스로 홍접을 제압할 수 있을 뿐이었다. 윤회의 천도는 본디 무정하다는 홍접의 말이 맞기 때문이었다.
이 무정과 절정은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인 것이라는 차이가 있었다. 한제가 경지의 전투에서 가까스로 이길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었다.
사실 수련자들에게 경지의 전투란 서로의 도(道)를 검증하는 것과 같았다.
“알았다.”
홍접이 기이한 빛을 번득이는 눈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시선을 한제에게로 돌렸다. 그녀의 눈은 당초 선계에서 한제를 마주쳤을 때의 냉랭한 절정의 눈빛으로 돌아와 있었다.
한제는 심장이 덜컥했다. 홍접은 과연 천부적인 자질이 대단한 여인이었다. 이 경지의 전투 중에서도 깨달음을 얻다니… 지금 눈앞의 여인을 죽이지 않으면 앞으로 자신은 영원히 안녕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한제는 생각했다.
한제는 몸을 훌쩍 날리며 저물대에서 금번을 꺼내 들었다. 금번을 흔들자 수많은 금제가 쉭 소리를 내며 나타나 그의 앞에 검은색의 긴 창 하나를 만들어냈다. 창에 금제가 섞여 들어갈 때마다 펑펑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빽빽해지더니 결국 하나로 이어져 강대한 기운을 내뿜었다.
모든 금제가 창에 응집됐다. 이 창은 99개 조의 금제를 걸어 만들어낸, 금번이 낼 수 있는 최대의 힘이었다.
긴 창은 부르르 진동했고 한제는 앞으로 달려 나가며 창을 던졌다. 이어 선검에서 뿜어진 검광이 뒤를 이었다.
쾅!
거인은 포효하며 발을 굴러 몸을 날리더니 주먹을 휘두르려 했다. 하지만 창이 한 발 빨리 거인의 미간에 있는 홍접을 향해 날아들었다. 거인은 포효하며 왼손으로 그것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이어진 검광에는 속수무책이었다.
펑!
거인은 비명을 내지르며 저도 모르게 움켜쥐었던 손을 펼쳤다. 금제의 창은 곧장 거인을 뚫고 들어갔다. 다만 거인의 손에 쥐어진 동안 방향이 바뀌어 미간의 홍접이 아니라 거인의 목을 찔렀다.
쾅!
거인의 두 눈에 깃든 빛이 흐릿해지더니 천천히 흩어졌다. 홍접은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오른손으로 이마를 두드렸다. 그녀의 몸이 거인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그녀의 몸은 지금 매우 약해진 상태였고 영혼으로 연결된 법보도 훼손됐으며, 분신을 만들어낸 원신도 큰 부상을 입은 데다가 거인도 망가졌다. 지금 그녀는 선계에서 한제에게 팔을 잃었을 때와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은연중에 한 가닥 깨달음을 얻은 그녀에게는 이미 더 싸울 마음이 없었다. 그녀는 이 깨달음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난다면 천우를 죽이는 것은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한편 무수히 많은 균열이 난 거인의 몸은 땅에 떨어진 순간 산산조각이 났다. 녹은 얼음은 대지로 스며들어 사라졌고 남은 것은 눈처럼 흰색의 채찍뿐이었다.
홍접이 오른손을 휘두르자 그 곤극 채찍은 곧장 그녀에게로 날아갔다.
하지만 그 채찍을 반드시 손에 넣겠다고 결심한 한제가 몸을 훌쩍 날리며 창을 내던졌다. 창은 한 줄기 검은 빛이 되어 곤극 채찍을 감쌌다.
홍접의 안색이 크게 변했고 한제는 재미있다는 듯 히죽 었으며 채찍을 자기 쪽으로 잡아당겼다. 동시에 선검을 휘둘렀다. 검광은 휙 소리를 내며 날아들어 홍접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막았다.
홍접은 어두운 얼굴로 손을 놓고 뒤로 물러나 검광을 피하고는 냉소했다.
“천우, 곤극 채찍에는 천옥종의 봉인이 되어 있다. 너는 사용할 수 없어!”
이 무렵 홍접의 미간에 있던 검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결투에서 분신이 소멸되어 당분간 영변기에 이르기는 힘들게 됐지만 몇 십 년만 폐관수련을 한다면 가능하리라고 홍접은 굳게 믿었다.
홍접은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순간, 네 개의 빛 덩어리가 그녀의 체내에서 빠져나와 각각 동서남북 네 개 방위에 섰다. 빛은 흩어져 사라지면서 네 개의 인영이 나타났다. 이들은 각각 금속, 나무, 물, 불의 령(靈)이었다. 흙의 령을 제외한 오령(五靈)이 모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것은 홍접의 궁극적인 법보였고 그녀의 근본이었으며, 천부적인 자질의 근간이었다.
그동안 신식으로 곤극 채찍을 살핀 한제는 크게 실망했다. 홍접의 말대로 강력하게 봉인이 되어 있어 그의 신식으로는 채찍을 살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내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채찍을 저물대에 집어넣은 뒤 시선을 돌려 네 개의 령을 주시했다.
이번 결투로 한제 역시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온몸의 상처는 말할 것도 없고 원신 또한 크게 상했다.
‘네 개의 령⋯⋯ 석주가 오늘 모든 속성을 가득 채우게 되겠구나!’
한제는 내심 쾌재를 불렀으나,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홍접은 결인한 왼손을 앞으로 뻗으며 낭랑하게 외쳤다.
“사령 살진(殺陣)!”
말을 마친 그녀는 곧장 뒤로 물러났다. 더 이상 싸울 마음을 잃은 그녀는 이 자리를 떠날 준비를 했다.
한제는 그녀를 뒤쫓으려 했지만 네 개의 령이 그를 막아섰다.
한제는 몸을 얼른 뒤로 물린 뒤 금번을 흔들었다. 그러자 금제의 창이 금속의 령을 향해 날아갔고 금속의 령 역시 피하지 않고 더욱 빠르게 달려들며 충돌했다.
한제는 선검을 휘둘렀다. 나무의 령이 선검을 피하느라 멈칫하는 사이 흙의 령과 물의 령이 긴 잔영을 그리며 한제에게로 접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