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292
속으로 다급히 외치며 도망치던 한제는 잠시 후 우뚝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앞에 세 사람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검은 옷을 입고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가운데 있는 사람이 앞으로 한 발짝 내딛자 순간 사방에서 거대한 위압감이 밀어닥쳤다.
‘또 영변기!’
한제는 경악했다.
이미 바짝 따라온 이원봉은 1천 척 정도 떨어진 곳에 멈추더니 웃으며 말했다.
“천우, 도망치지 말게. 어차피 불가능하다는 걸 알지 않나?”
말을 마친 그가 오른손을 들어 한제를 가리켰다. 순간, 회오리바람이 그의 앞에서 나타나서는 휘휘 소리를 내며 한제를 향해 달려들었다.
한제는 빠르게 몸을 뒤로 물리고 오른손을 뻗으며 선검을 휘둘렀다. 검광이 휙 소리를 내며 미친 듯이 번득였다. 회오리바람은 한 번 진동을 일으키더니 흩어졌고 회오리바람을 그대로 관통한 검광은 이원봉에게로 향했다.
이원봉은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손을 앞으로 뻗어 움켜쥐었다. 순간 그 검광은 그의 손에 들어갔고 그대로 붕괴해버렸다.
“음?”
이원봉은 약간 놀란 기색이었다. 검광을 쥔 오른손이 약간 저릿했기 때문이었다.
몸 상태가 최상이었을 때에도 안 통했을 공격을 지금처럼 약해진 상태에서 해봐야 결과는 뻔했다. 이에 한제는 이를 악물고 몸을 돌려 다시 달아났다.
검은 옷의 영변기 수련자가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몸을 훌쩍 날렸다. 마치 번개처럼 순간적으로 한제를 뒤따라온 그는 한제의 뒤를 가볍게 쳤다.
한제는 신음을 흘렸다. 가까스로 체내의 영력을 모두 뒤쪽에 응집시키며 손에 쥔 선검으로 앞을 막아섰지만 그의 몸은 거대한 충격에 수천 척 밖으로 밀려나 곤두박질 쳤다. 그는 내장 조각이 섞인 피를 울컥 토해냈다.
부상을 미처 회복하기도 전에 또다시 큰 부상을 입은 탓에 한제의 얼굴은 흙빛이 되어 있었다.
검은 옷의 노인이 손을 휘두르자 선검이 한제의 손에서 빠져나가 노인의 손에 들어갔다. 그 선검을 자세히 살핀 노인은 흥미로운 듯 말했다.
“아주 좋은 검이구나! 분명 안에 검혼(劍魂)도 깃들어 있겠지? 아주 좋아.”
이원봉은 빙그레 웃었다.
“그 검은 자네에게 주지. 허나 천벌을 일으킬 수 있는 깃발은 내 것이야.”
검은 옷의 노인은 하하 웃으며 말했다.
“좋다. 그리고 그 성라반은 본래 우리의 것이었으니 내가 가져가겠다.”
이원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
한제는 발버둥을 치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한제는 어두운 얼굴로 검은 옷의 노인을 노려봤다.
“거마족!”
검은 옷의 노인은 복면을 벗어버렸다. 그의 머리는 잿빛이었고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했지만 두 눈만큼은 밝은 달처럼 빛났다.
한제를 바라본 그가 웃으며 말했다.
“네 말대로 나는 거마족 사람이다. 당시 네놈이 선계에서 가져간 성라반은 오늘 내가 가져가겠다.”
한제는 떨리는 손으로 저물대에서 단약을 꺼냈다. 그리고 두 명의 영변기 수련자 앞에서 그것을 삼킨 뒤 침착하게 말했다.
“고작 내 목숨을 거두겠다고 두 영변기 수련자가 손을 잡은 것인가? 영광이로군. 절대 잊지 않겠다.”
이원봉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야지. 죽더라도 웃으며 가라. 네 법보는 내가 잘 쓰겠다.”
말을 마친 그가 다시 오른손을 들었다. 그러자 팔뚝 굵기의 영기가 한제에게 날아들었다.
영력을 다소 회복한 한제는 오른손을 휘둘러 금번을 꺼내 휘둘렀다. 그러자 금제들이 휙 소리를 내며 빠져나와 층층의 검은 안개를 형성해 달려드는 영기를 막았다. 하나하나 흩어져 사라지던 검은 안개들은 결국 가까스로 영기를 막아냈다.
“좋은 깃발이구나! 가져가서 자세히 살펴봐야겠다.”
이원봉은 한제의 손에 들린 금번을 바라보며 웃었다.
한제의 안색은 더욱 창백해졌다. 절망감이 무럭무럭 솟아올랐다. 거리가 멀어 본체를 불러들일 수도 없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본체마저 당한다면 그는 말 그대로 완전히 죽는 것이기 때문에 불러들이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에게 남은 유일한 방법은 시간을 최대한 벌면서 손태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남은 영력은 방금 금번을 사용하는 데 다 써버린 상태였다.
이원봉은 다시 공격을 하려 했다. 그때, 거마족의 영변기 수련자 곁에 서 있던 검은 옷의 수련자가 갑자기 앞으로 나서며 공손하게 말했다.
“선조님, 제가 직접 저자를 죽일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때의 복수를 하고 싶습니다.”
이원봉은 손을 거두고 거마족의 영변기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노인은 그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을 잠시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은 곧장 몸을 돌린 뒤 복면을 벗었다. 그는 치호였다.
치호는 몸을 훌쩍 날려 긴 잔영을 그리며 한제를 향해 날아들었다.
“치호!”
한제는 손에 든 금번을 움켜쥐었다. 복잡한 심경이 그대로 드러난 듯 그의 표정은 어두웠다.
“천우, 죽어라!”
치호가 낮게 외쳤다. 앞으로 뻗은 채 휘두른 그의 오른손에서 영력이 솟아나왔다. 하지만 그 영력과 치호의 눈빛을 본 한제는 순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치호의 손에 맺힌 영력은 자신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치호의 손이 가까워진 순간, 한제의 몸에 영력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바로 앞까지 다가온 치호는 오른발로 한제의 가슴팍을 찼다. 한제는 멀리 나가 떨어졌다. 허나 그 발길질에도 공격력이 깃들어 있지 않았고 오히려 또 한 차례 영력이 주입됐다.
“도우, 동남쪽에 길이 있네!”
한제의 귓가에 치호가 신식으로 전해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나 이런 눈속임으로는 영변기 수련자를 속일 수 없었는지, 뒤에서 이원봉이 코웃음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거마족 선조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며 외쳤다.
“치호, 지금 뭐하는 짓인가!”
치호는 몸을 훌쩍 날려 선조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맑은 눈빛을 번득이며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조님, 그 성라반은 제가 천우에게 준 것이지 저자가 훔친 게 아닙니다. 이 치호는 당당한 사내입니다. 천우는 선계에서 제 목숨을 여러 차례 구해주었고 저를 친우로 여겨주었습니다. 한데 제가 어찌 그런 은혜를 원수로 갚을 수 있겠습니까!”
거마족 노인은 분노가 극에 달해 웃음을 터뜨리더니 몸을 훌쩍 날려 치호를 비켜갔다.
치호는 크게 기합을 넣었다. 미간에 자리한 도끼 모양의 반점이 번득였다. 이를 악문 그가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거마족의 선조를 향해 달려들면서 외쳤다.
“그 성라반은 제게 아무런 쓸모도 없으니 천우에게 줘버려도 상관없습니다. 저자의 검을 손에 넣으신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노인은 고개를 맹렬히 돌려 치호를 노려보더니 손을 휙 휘둘렀다. 치호는 사방에서 불어온 기이한 힘에 갇혀 그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네가 거마족의 소족장만 아니었다면 배신자인 네놈을 먼저 죽였을 것이다. 돌아간 뒤에는 벌로 1백 년간 가둬두겠다.”
말을 마친 노인은 몸을 훌쩍 날려 한제를 뒤쫓았다.
치호는 주먹을 바르쥔 채 한제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았다. 동남쪽이었다.
“천우, 미안하네. 하지만 나는⋯⋯ 나는… 최선을 다했네.”
치호의 얼굴이 슬픔으로 물들었다. 그는 이 정도로 한제가 목숨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후회를 남기기 싫었다. 그렇기에 선조에게 밉보일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런 행동을 한 것이다.
“천우, 나는 벗에게 불의(不義)한 짓을 저지를 수는 없었네.”
한편, 한제는 치호의 도움으로 영력을 약간 회복한 상태였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그러는 동안 치호의 도움을 마음 깊이 새겼다.
약간의 시간을 벌었을 때 미간을 두드린 한제는 한탄했다. 상대가 무슨 진을 배치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공간의 균열과 순간이동만이 아니라 석주 공간으로 들어가는 것 또한 불가능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 진은 한제에게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어서 거마족 노인도 순간이동을 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선검을 빼앗겼다. 오늘 살아서 이곳을 나가게 된다면 언제고 반드시 되찾아 오리라!’
한제가 복수를 다짐하고 있을 때 이원봉이 번개처럼 하늘을 가르며 날아들었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따라잡더니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으냐? 저승으로 보내주마!”
그가 엄지손가락으로 아래를 누르자 거대한 힘이 그 손가락으로부터 솟아올라 한제의 몸에 닿기도 전에 극단의 경지를 훅 뿜어냈다. 그 경지는 향기를 가지고 있었다. 차의 향에서 기인한 향기로 한제는 저도 모르게 그 향기를 느끼는 데 심신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이에 저항하기 위해 생사의 경지가 솟아올랐으나, 영변기 수련자의 경지에 대적할 수는 없었다. 이내 한제는 또다시 한 움큼 피를 토해냈고 원신 또한 다시 부상을 입었다. 이어 한제의 몸은 땅으로 떨어졌다.
그의 얼굴에 찻잎 같은 낙인이 하나둘 나타났다. 그 낙인들은 불규칙적으로 번득였고 그 낙인이 번득일 때마다 한제의 몸은 조금씩 약해졌으며 원신도 점점 흩어졌다.
이때, 거마족 노인이 쫓아와 지면 위의 한제를 내려다보았다.
“이미 많은 시간을 허비했어. 나는 저자를 죽인 뒤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어서 처리하지.”
이원봉은 눈을 번득이며 빙그레 웃었다.
“자네가 직접 처리하지 않으려는 것은 주작산의 후환이 두려워서인가? 좋아, 내가 일으킨 일이니 내가 직접 처리하지.”
말을 마친 그는 오른손을 앞으로 뻗어 한제의 목숨을 끝내려 했다. 한데 바로 그때, 갑자기 벼락 소리가 들려오더니 하늘을 가르며 거대한 균열 하나가 벌어졌고 그 균열로부터 어두운 보랏빛 관 하나가 내려왔다.
“봉마건곤진(封魔乾坤陣)이라… 이 진의 눈이 있는 곳을 몰랐다면 들어오기는 참으로 힘들었겠어.”
냉랭한 웃음소리가 관 안에서 흘러나왔다. 이어서 어느새 붉은 옷을 입은 노인 하나가 나타나 그 관 위에 서서 번득이는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욕을 지껄였다.
“천우, 네놈 때문에 짜증이 나 미칠 지경이다. 어찌 이런 말썽을 일으키느냐? 그리고 네놈들은 영변기 수련자 둘이서 화신기 놈 하나 죽이지 못하다니, 부끄럽지도 않느냐?”
“시음종!”
이원봉은 한제를 공격하려던 손을 거두고 번득이는 눈으로 노인을 노려보았다.
이유
붉은 옷의 노인은 시음종의 대장로 손태였다.
손태는 가라앉은 얼굴로 이원봉을 힐끔 쳐다보다가 거마족 노인에게로 시선을 돌린 뒤 속으로 욕을 중얼거렸다. 거마족 노인은 영변기 초기였지만 그는 거마족이 영변기에 이르기면 천부적인 신통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영변기 중기 수준인 자신으로서도 쉽게 대적할 상대는 아니었다.
“내가 저 녀석을 데리고 가야겠다.”
손태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도우⋯⋯.”
이원봉이 뭔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