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294
관에서 떠오른 아이가 두 눈을 번쩍 뜨더니 요사스러운 빛을 번득이며 한 걸음 내딛어 거마족 노인 앞에 이르렀다. 순간이동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거마족 노인은 아이의 손바닥이 자신의 가슴을 누르는 것을 느꼈다. 순간, 파멸적인 힘이 그의 체내로 밀고 들어왔다. 대량의 피를 뿜어낸 그의 원신이 몸 밖으로 밀려나서는 저물대를 감싼 채 달아났다. 아래로 떨어진 그의 육신은 그 아이의 발에 채여 가슴팍에 깊은 구멍이 난 채였다.
하지만 소용돌이 속의 손태는 이미 그 안에 깊숙이 빠진 상태로 비명을 내지르면서 천천히 사라져버렸다. 소용돌이가 사라지면서 손태 역시 자취를 감춰 버렸다. 현재 그 노인의 수준으로는 거마족의 천부적인 신통력을 발휘해봐야 특별한 공격력을 갖지 못하나, 대상이 된 사람만큼은 주작성 밖으로 끄집어내 다른 세계로 보내버릴 수 있었다.
허공에 남은 것은 그 아이 뿐이었다. 잠시 멈칫하던 아이는 달아나고 있는 거마족 노인의 원신을 추격했다. 거마족 노인은 한제를 잡아챌 틈도 없이 분노에 찬 고함을 내지르며 질주했고 아이는 빠른 속도로 그를 뒤쫓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두 사람의 모습 역시 하늘 끄트머리로 사라져버렸다.
한시름 내려놓은 한제는 발버둥 치듯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비틀거리며 숲 밖으로 걸어 나갔다. 걸어가면서 그는 그의 수준이 갈수록 약해지는 것과 영력이 갈수록 줄어드는 것을 명확히 느낄 수 있었다.
이원봉의 경지와 손태의 봉인은 거의 완벽하게 하나로 결합되어 한제를 단단히 옥죄었다. 그의 얼굴에 생긴 찻잎 모양의 흔적은 점점 짙어져 마치 얼굴에서 자라난 듯한 상흔을 남겼다. 그 상흔은 상당히 들쭉날쭉하여 기이한 도안을 이루었다. 손태의 봉인으로 남은 도안이었다.
한제는 쓰게 웃으며 발악하듯 한참 동안 걸어 나갔다. 거대한 산이 온몸을 짓누르고 있는 듯 한 걸음 떼기도 힘들었다. 육신이 입은 부상도 심각해 내장에서 욱신욱신한 통증이 느껴질 정도였고 원신은 꺼져버릴 듯 허약해진 상태였다.
숲 밖으로 나오자 내리쬐는 햇빛이 느껴졌다. 그 무렵, 그의 체내에는 조금의 영력도 남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려던 한제는 온몸에 힘이 쑥 빠졌고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한제와 홍접의 결전 이후, 천우라는 이름은 더욱 명성을 떨쳤다. 그가 사용한 법보들을 본 각 수련국 사자들은 이를 기억해두고 있다가 각자의 수련국으로 돌아간 뒤 떠들어 대었다. 금번, 보검, 사신차 할 것 없이 한 순간에 주작성에 있는 대부분의 수련자들에게 화제가 됐다. 천우라는 이름은 이미 주작성에서 영변기 이하 수련자 중 최강자로 여겨졌다.
동시에 주작산에서는 홍접을 1백 년 이상 폐관수련하게 하여 영변기에 이를 수 있게 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그 지시에 의문이나 의심을 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쨌든 홍접은 전투 중 깨달음을 얻었으므로 폐관수련은 필수였기 때문이었다.
한데 이런 일련의 일들이 느릿하게 흘러간 뒤 천우가 실종됐다.
누구도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아는 것이라고는 천우가 주작산의 명령을 받으러 가던 중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이었다.
이 일은 순식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주작의 칭호를 가진 노인은 짧은 폐관수련을 마치고 나와 주작 대륙 북쪽 끝을 살펴보았다.
사흘 전, 선력이 부딪힐 때 발생하는 파동이 전해져온 곳이었다. 이를 통해 그곳에서 두 영변기 수련자가 선력을 동원해 전투를 벌였음을 알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거마족이 천부적인 신통술을 사용했다는 사실 역시 느낀 바 있었다.
아무리 주작이라 해도 신은 아니었기에 모든 일을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주작국의 넓고 촘촘하게 얽혀 있는 영맥을 통해 조사한 끝에 그는 천우와 관련된 이번 사건의 발단은 설역국이고 거마족이 동참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다만 또 다른 영변기 수련자의 정체는 알아낼 수가 없었다. 어찌됐든 설역국의 이번 행태는 그의 뜻을 거스른 것이었으므로 차후 반드시 큰 대가를 치를 것이다.
한편, 신식을 펼쳐 살핀 그는 한제의 흔적을 약간이나마 찾아낼 수 있었지만 정확하게 찾아낼 수는 없었다. 이 점 역시 그에게는 의아한 부분이었다.
그는 한제가 분명 심한 부상을 입어 원신이 붕괴했으리라고 추측했다. 그가 상대의 소재를 찾을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일 터였다.
하지만 한제는 그의 눈에 류미의 향로일 뿐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중요했으나, 또 어떻게 보자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류미, 주작 대륙의 북쪽으로 가라. 이한제는 그곳에 있다.”
노인은 류미에게 그 말을 전한 뒤 다시 폐관수련에 들어갔다. 그리고 류미는 주작산에서 내려와 유성과 같이 긴 잔영을 남기며 주작 대륙의 북쪽으로 향했다.
그때, 주작산의 어느 절벽 위에서 온몸에 붉은 면사를 두른 여인이 멍하니 먼 곳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두 눈은 텅 비어 생기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그녀의 발밑에는 선연하게 핀 붉은색의 작은 꽃들이 산바람에 살짝 흔들렸다. 마치 언제라도 떨어져버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꽃은 불어오는 바람에도 강인하게 견뎌냈다.
건풍이 그 여인의 뒤에 나타나더니 오른손을 튕겼다. 여인의 발밑에 피어 있던 붉은 꽃들은 곧장 재로 변해 흩어졌다.
“절정, 네가 한 줄기 원신을 숨겨놓고 있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나 건풍의 손에 두 번째 자비심이 나타나는 일은 없을 것이야!”
건풍이 손으로 여인의 뺨을 톡톡 두드리며 사악하게 웃었다.
★ ★ ★
한 달 뒤, 주작 대륙 북부에 자리한 어느 산촌.
거친 천으로 만든 옷을 입은 청년 하나가 마을 입구의 커다란 돌 위에 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끔찍한 상흔이 있어 상당히 기이하고 추해 보였으며, 어두운 두 눈에 생기라고는 없었다. 초점 없는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는 그의 두 눈에는 그저 아득함만이 깃들어 있을 뿐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끊임없이 들락거렸지만 모두 끔찍한 것을 본 듯한 표정으로 청년을 빙 둘러가곤 했다. 허나 청년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앉아 먼 곳을 보고 있었다.
자잘한 꽃무늬 상의와 흰색 바탕에 붉고 큰 꽃이 수놓인 치마를 입은 소녀가 걸어왔다. 그녀 뒤에는 송아지만 한 시골 개 한 마리가 따르고 있었다.
열너덧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의 얼굴은 맑고 깨끗했으며 눈이 컸다.
“벙어리야, 우리 아버지가 밥 먹이게 데려오래!”
소녀는 청년으로부터 30척 정도 떨어진 곳에 서서 소리쳤다.
청년은 고개를 돌려 소녀를 바라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오래 앉아 있었던 탓인지 두 다리가 저려 일어나자마자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는데 그 모습에 소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벙어리야, 얼른. 배고프단 말이야!”
소녀는 몸을 돌려 마을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녀를 뒤따르던 개도 얼른 그녀를 쫄래쫄래 쫓아가더니 이내 길 안내라도 하듯 달음박질했다.
청년은 묵묵히 그들의 뒤를 따랐다. 그의 눈은 더욱 공허해졌다.
마을 안, 울타리로 구분된 정원 안에서 한 중년 남자가 작은 상 옆에 앉아 있었다. 질박한 남색 옷은 오래 입은 탓인지 색이 바랬다. 정원에 심어진 여러 약초의 향이 불어오는 바람에 퍼져 나갔다.
소녀는 깡충깡충 뛰어 정원 안으로 들어가더니 사내 곁에 앉아서 귀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벙어리 불러왔어.”
남자는 미간을 팩 찌푸리더니 아이를 향해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벙어리라니, 너는 위아래도 없느냐? 아저씨라고 불러야지!”
소녀는 혀를 쏙 내밀더니 아무 말도 않고는 집으로 들어가 음식을 가지고 나오는 어머니를 도왔다.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나 청년을 바라보면서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개의치 마시게. 아이가 버릇이 없어. 자 몸은 좀 어떤지 볼까?”
청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사내 곁에 앉아서는 오른팔을 내밀었다. 그 팔은 지나칠 정도로 바짝 말라 있었다. 마치 가죽에 싸인 뼈 같은 모습이었다.
중년 사내는 청년의 팔에 손을 얹고 진지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잠시 후, 그는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잘 회복되고 있군. 약을 몇 차례 더 지어줄 테니 보양만 잘하면 괜찮을 걸세.”
청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중년 남자는 그런 상대를 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한 달 전 산에서 약초를 캐다가 마주친 눈앞의 청년은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 의원인 그로서는 그런 청년을 내버려둘 수가 없어 집으로 데려와 치료하기 시작했다.
청년의 부상은 심각했다. 오장이 뒤틀려 있었고 망가지기도 한 상태라 살려낼 수 있을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저 하늘에 맡길 뿐이었다. 하지만 청년은 놀랍게도 단 열흘 만에 호전됐고 정신을 차리기까지 했다. 다만 벙어리인지 깨어난 뒤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 여인이 집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고 소녀가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가지고 온 음식들을 상에 차렸다.
“어머니, 난 벙어리랑 같이 밥 먹기 싫어. 너무 끔찍하게 생겼잖아. 난 안 먹을래.”
소녀가 입을 비죽이며 말했다.
“어허!”
중년 남자가 눈을 부릅떴고 부인은 얼른 그 앞을 막아서더니 소녀의 그릇에 여러 음식들을 담아주며 말했다.
“방으로 가서 먹어.”
소녀가 입을 삐쭉 내밀며 뭔가 말하려는데 청년이 갑자기 밥그릇을 들고 손을 덜덜 떨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정원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밖에 있는 푸른 돌 위에서 밥그릇을 들고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청년은 주작 노인도 종적을 찾지 못한 한제였다.
주작국의 화신기 수련자 중 최강자라던 그가 이런 상태가 된 것은 모두 거마족과 설역국 때문이었다.
일반인
한제는 떨리는 손으로 밥그릇을 내려놓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원신은 한 달 전에 붕괴해버렸다. 다만 붕괴했어도 흩어지지는 않고 조각으로나마 체내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남아 있던 조각도 천천히 흩어지는 중이었다. 육신의 부상 역시 매우 중했으나, 붕괴한 원신이 만들어낸 한 줄기 영력 덕에 겨우 호전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모든 영력을 잃은 일반인이었다. 밥그릇 들 힘조차 없고 신통술도 발휘할 수 없었다. 일반인도 주먹질 한 번에 그를 때려눕힐 수 있을 정도였다. 심지어 원신이 붕괴한 탓에 본체도 영향을 받아 깊은 잠에 빠진 채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는 그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영력이 없으니 저물대도 열 수가 없었다. 지금의 그는 완전한 일반인이었다. 그야말로 악몽이었다.
만약 본체가 잠들지 않았다면 이곳으로 불려왔을 것이고 이를 통해 영력을 보충한 후 서서히 회복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 그 모든 것은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그는 벙어리가 아니라 말하기를 원치 않는 것뿐이었다.
얼굴에 생겨난 찻잎 모양의 흉터는 그를 추악하게 만들었고 다른 사람들을 두렵게 만들었다. 이 마을에 머문 지 한 달이 지났는데 치료를 해준 그 중년 남자 부부를 제외한 누구도 그에게 친절하지 않았다.
한참 뒤, 작게 한숨을 내쉬던 한제는 그릇에 든 밥을 몇 입 먹었다.
‘9년 후면 모완이 다시 윤회의 굴레를 맞게 될 텐데⋯⋯.’
밥을 삼키는 한제의 눈에 굳은 의지가 어렸다.
지난 한 달 동안 그는 줄곧 어떻게 하면 힘을 회복할 수 있을지 생각했다.
체내의 봉인과 경지를 풀기만 하면 해결될 일이었지만 그것들을 풀 방법이 없었다.
깊은 밤, 한제는 정원 안의 땔나무를 저장해 놓는 곳간에 누워 잠들었다. 지금 그의 몸은 너무나 허약해 조금의 힘도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중년 남자는 약 상자를 등에 메고 사냥꾼 몇몇과 함께 약초를 구하러 산으로 들어갔다.
한제는 나뭇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묵묵히 좌선했다. 그러나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체내에는 영력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아 호흡도 할 수가 없었다. 영력이 매우 짙은 곳이 아니고서야 호흡을 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는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나뭇간에서 나왔다.
그때, 그 소녀가 방에서 나오다가 한제를 보고 입을 샐쭉 거렸다.
“벙어리, 한 달을 머물렀잖아. 언제 떠날 거니? 우리 집이 보호소야? 언제까지 밥버러지처럼 붙어 있을 거냐고!”
“아버지가 몇 번이나 말했잖니, 아저씨라고 부르라고!”
부인이 방 안에서 나오며 훈계했다.
소녀는 불만스럽다는 듯 흥 하고 콧방귀를 뀌더니 말했다.
“멍멍아, 가자!”
말을 마친 소녀가 정원 밖으로 향했다.
시골 개가 컹 하고 한 번 짖더니 정원 구석에서 튀어나가 꼬리를 살랑거리며 소녀의 뒤를 따랐다.
부인이 한제를 살피며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