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322
피식 웃은 한제는 생각을 접고 저물대를 두드렸다. 선옥으로 만들어진 보탑이 나와 옆쪽의 공터에 내려앉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거대하게 부풀었다. 이어 주일이 보탑에 심어둔 신식이 반경 1백 리 안의 범위로 확산되었다.
보탑이 나타나자마자 달려 나온 은혜는 불만스럽다는 듯 입을 내밀었다.
“나쁜 아저씨! 아저씨는 나쁜 아저씨야! 아저씨 미워!”
소백은 고개를 쫑긋 세운 채 은혜의 뒤를 따라 나오더니 배를 깔고 그 자리에 엎드렸다. 지금 그 호랑이의 온몸은 털로 덮여 있었지만 얼굴이 누렇게 뜨고 몸이 수척해진 상태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나 같은 훌륭한 호랑이가 몇 달 동안 과일만 하루 하나씩만 먹었다. 고기라고는 냄새조차 맡지 못하다니, 이럴 수가⋯⋯.’
소백은 약하고 낮게 그르렁거렸다. 녀석의 두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져 내릴 것 같았다.
몇 번이나 은혜를 먹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불쑥불쑥 들었으나, 그때마다 한제가 두려워 얼른 그런 충동을 흩어버린 그였다. 또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은혜의 체내에서 무서운 힘이 천천히 자라나고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소백은 자신이 소녀를 잡아먹는 게 아니라 상대가 자신을 요리해 먹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떨어야 했다.
“나쁜 아저씨! 소백 마른 것 좀 봐. 몇 달 동안 우리는 과일만 먹었다고!”
사실 소백뿐만 아니라 그녀 역시 무척 마른 상태였다.
한제는 코를 만지작거렸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아예 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4백 년 넘게 아무런 음식도 먹지 않고 살아온 탓에 은혜에게는 아직 음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다행히 그는 은혜를 보탑에 들여보내기 전에 많은 과일들을 넣어둔 상태였다. 또한 보탑 안에는 선기도 가득했기 때문에 천천히 몸을 보양해주면서 따로 음식을 먹지 않아도 건강에는 문제가 없도록 해주었다.
한제의 이마에 진땀이 맺혔다. 영변기 노인을 마주했을 때에도 당당했던 한제가 은혜의 호통에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아⋯⋯ 아저씨가 실수했다. 다음에는 절대 잊지 않을게!”
한제가 얼른 대답했다.
은혜는 한제를 한 번 흘겨보더니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아저씨는 약속해놓고 한 번도 안 지켰잖아. 저번에 나한테 커다란 호랑이를 잡아준다던 약속도 안 지켰는데 내가 그 약속을 어떻게 믿어?”
한제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좋아, 은혜야. 아저씨가 호랑이 잡아올게. 좀만 기다려줄래?”
이 별에도 요사스러운 마수가 몇몇 있었던 것을 떠올린 한제가 웃으며 말하자 아직 아이인 은혜는 금세 기분이 풀려 활짝 웃으며 손뼉을 쳤다.
“그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해. 지금 바로 가?”
한제는 부드러운 눈길로 은혜를 바라보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금 바로!”
은혜
은혜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아저씨, 나 요즘 매일 꿈을 꿔. 꿈속에서는 항상 어떤 언니랑 아저씨가 함께 있어. 그런데 그 언니가 굉장히 낯이 익어. 이상하지?”
한제의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고개를 숙여 은혜를 한참 바라보던 그는 잠시 후 긴 한숨을 내뱉으며 하늘을 바라보더니 중얼거렸다.
“완아, 네가 완전히 깨어나기까지는 아직 6년이 남았구나.”
은혜는 한제를 바라보았다. 아이의 눈에 알아채기 힘들 정도의 두려움이 어렸다.
“아저씨, 난 괴물인가 봐.”
소백은 한쪽에 엎드린 채 그 말을 듣고 있다가 큰 머리를 얼른 끄덕였다.
‘분명히 괴물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나 같은 호랑이를 어찌 너 같은 계집아이가 업신여길 수 있겠느냐? 너 때문에 난 그 많은 암호랑이들을 뿌리치고 숲에서 떠나왔다고!’
한제는 흠칫 놀라며 고개를 숙여 은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은혜야, 왜 그래?”
은혜는 눈물을 또르르 흘리며 훌쩍거렸다.
“나는 괴물이야, 아저씨. 나는 괴물이라고. 지난 1년 동안 몸 안에 작은 사람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 아저씨, 무서워.”
멍하니 은혜를 바라보던 한제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잠시 후, 그가 은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말했다.
“너는 괴물이 아니야.”
은혜는 한제의 품에 안겨 그의 옷깃을 쥔 채 말했다.
“꿈을 꿀 때마다 몸 안에 있는 그 작은 사람이 움직이는 게 느껴져. 꼭⋯⋯ 꼭 꿈속의 그 언니가 그 작은 사람인 것 같아. 아저씨, 나 무서워. 아저씨가 그 언니 좀 내보내줘.”
아이의 작은 손이 한제의 옷깃을 꽉 움켜쥐었다. 손을 풀면 한제가 금방 사라져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한제는 바르르 떨었다. 마치 전기에 감전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째서 이렇게⋯⋯?”
한제의 두 눈에 복잡한 빛이 담겼다.
당시 모완의 원영은 어느 임산부의 뱃속에서 길러졌다. 말하자면 다른 이의 육신을 빼앗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당시 임산부의 뱃속에 있던 아이는 아직 혼백이 아니라 한 덩어리의 정혈만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니 원래대로라면 모완이 곧 은혜고 은혜가 곧 모완이어야 했다. 한데 어째서인지 은혜가 모완을 배척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설마 당시 모완의 원영이 그 부인의 뱃속에 들어갔을 때 그 갓난아이에게는 이미 혼백이 존재했던 것인가?’
당시 천도와 싸우고 있느라 상황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탓인지도 모른다.
‘만약 정말 그렇다면 모완의 원영은 앞으로 천천히 은혜의 혼백을 삼킬 거야. 그리고 모완의 원영이 깨어나는 날 은혜를 완전히 대체하여 이 몸의 주인이 되겠지.’
한제의 눈빛이 아득해졌다.
“아저씨, 나 무서워. 얼른 그 언니를 빼내줘. 알았지?”
은혜는 고개를 들어 조용히 말했다. 아이의 눈에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내가 잘못한 것인가.’
한제는 은혜를 바라보았다. 마음이 찌르는 듯 아팠다.
“은혜야, 무서워하지 마. 네 몸에 있는 작은 사람을 언니로 생각하면 괜찮아.”
한제는 미소를 지으며 은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웃음 속에는 복잡한 감정이 어려 있었다.
“정말? 아저씨, 거짓말 아니지?”
은혜의 커다란 눈은 순수하고 깨끗했다. 뿐만 아니라 아이의 눈 안에서 한제는 짙은 사랑과 믿음을 볼 수 있었다.
“그럼, 정말이지.”
한제의 마음은 점점 아파왔다. 그는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선택은 누군가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한다.
“어째서 이렇게⋯⋯?”
한제의 눈에 고통의 빛이 어렸다.
은혜는 어리지만 눈치가 굉장히 빨랐다. 한제를 바라보던 아이는 머리를 한제의 품속에 파묻으며 위로하듯 말했다.
“아저씨, 슬퍼하지 마. 아저씨가 슬퍼하면 내 마음도 아파. 앞으로 이런 이야기는 하지 않을게. 난 아저씨 믿어. 아저씨가 괜찮을 거라면 괜찮을 거야. 아저씨, 우리 이제 이 이야기 그만하자. 방금 큰 호랑이 잡아주기로 했잖아.”
한제는 은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의 얼굴을 적신 눈물을 닦아낸 그가 조용히 읊조렸다.
“아저씨랑 같이 호랑이 잡으러 가자.”
말을 마친 그는 은혜를 안고 훌쩍 뛰어올랐다.
은혜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하지만 한제의 눈에 비친 그 웃음은 소리 없는 울음 같았다.
“아저씨, 소백도 데리고 가야지. 흥! 소백은 말을 안 듣는다니까. 이번에 아저씨가 커다란 호랑이를 잡아오고 난 뒤에 소백이 얼마나 말을 잘 듣는지 봐야겠어. 그때에도 말을 듣지 않으면 새로운 호랑이한테 소백을 콱 물어버리라고 해야지.”
소백은 몸을 부르르 떨며 비통하게 포효했다. 하지만 한제는 그런 비통함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둥실 떠올리더니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사이, 은혜는 애써 울음을 참으며 묵묵히 속으로 생각했다.
‘아저씨, 난 벌써 열세 살이야. 나도 알 건 다 알아. 아저씨가 나를 볼 때마다 보는 것이 실은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도 느낄 수 있어. 철암 할아버지는 달라. 할아버지가 보는 건 나니까. 처음에 아저씨가 그 나쁜 사람 손에서 날 구해준 것도 나 때문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그 언니 때문이었다는 것도 알아. 내가 꿈속에서 본 그 언니는 정말 예뻤어. 하지만 내가 크고 나면 그 언니보다 더 예뻐질 거야. 아저씨, 그러니까 나 버리지 마.’
★ ★ ★
월성(月星)에는 산맥이 많고 숲은 적어 멀리서 보면 인적이 느껴지지 않았다. 사실 이곳에 일반인은 없었고 수련자도 매우 드물었다. 애초에 폭풍을 뚫고 우주에 진입하는 수련자가 많지 않은 탓이었다. 최소한 영변기 이상의 수준은 되어야 하고 성라반이 있어야 이 드넓은 우주에서 움직일 수 있었다.
한제는 은혜와 소백을 데리고 월성의 하늘을 가르며 날았다. 은혜는 계속해서 환호성을 질렀다.
이 월성 북부의 숲에서 한제는 은혜를 위해 커다란 호랑이 한 마리를 잡아주었다. 온몸에서 보라색 빛이 나는 호랑이의 크기는 30척에 달했으며 그 기세도 굉장했다.
그 호랑이는 지능이 발달되지 않았으나 체내에는 기이한 힘이 깃들어 있었다. 덕분에 녀석은 포효 한 번에 사방에 모래와 자갈을 일으킬 수 있었고 한 번의 움직임에 금속을 자르고 돌을 쪼갤 수 있었다. 일반적인 축기 후기 수련자에 해당하는 힘이었다.
한제는 녀석의 혼백에 은혜의 낙인을 찍어 그 호랑가 은혜를 잡아먹지 못하게 해두었다.
은혜는 이 호랑이를 보자마자 소백보다도 훨씬 마음에 들어 했다.
“앞으로 너는 소자야!”
은혜는 손뼉을 치며 소자의 등에 오르더니 잔뜩 흥분하여 소리쳤다.
한쪽 옆에 선 소백은 내심 불만이 컸다. 자신을 어찌 저 얼간이 같은 호랑이와 비교할 수 있단 말인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는 의기소침하게 그 보라색 호랑이를 향해 그르렁 거렸다. 그러자 보라색 호랑이는 곧장 머리를 흔들며 소백을 향해 포효했다. 그 소리가 어찌나 공격적인지 하늘과 땅이 뒤흔들릴 정도였다.
소백은 기가 죽어 온몸의 털을 잔뜩 세운 채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 녀석의 눈에는 두려움이 어려 있었고 뒤로 물러나 감히 앞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 광경에 은혜는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소백, 너는 소자한데 안 돼.”
한제는 한쪽에 서서 기뻐하는 은혜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모완의 원영이 깨어나는 날, 은혜의 혼백은 그 원영에 삼켜질 것이다. 두 사람이 공생할 가능성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