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323
만약 그 전에 모완의 원영을 꺼낸다면 은혜는 살 수 있겠지만 그럼 모완의 죽음이 불가피했다. 모완의 원영은 아직 잠들어 있었으며 회복 중이기 때문에 스스로 깨어나기 전에 꺼낸다면 흩어져 버리고 말 것이다.
한제의 마음에서 누가 더 중하고 누가 덜 중하지는 확연했다. 그에 대해서는 변함이 없었다.
다만 모완의 원영을 회복시키기 위해 죄 없는 아이를 희생시켜야 한다는 점이 한제를 갈등하게 했다.
★ ★ ★
눈 깜짝할 사이에 2년이 흘렀다.
은혜는 열다섯 살이 되었고 모완의 원영이 깨어나기까지는 이제 4년이 남았다.
지난 2년 동안 은혜의 몸은 점점 자라 이제는 어엿한 여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꿈에 모완이 나타나는 횟수는 점점 더 많아졌다.
이 2년 동안 한제의 마음에서 느껴지는 씁쓸함은 갈수록 짙어졌다.
당연히 모완을 택할 생각이었지만 동시에 저 아이를 다치지 않게 할 수는 없을지, 한제는 2년 내내 그 문제로 고민했다.
이 2년 동안 은혜는 점점 말수가 줄었다. 그녀는 늘 소백을 데리고 소자의 등에 올라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소백, 내 몸에 있는 언니는 천천히 깨어나고 있는 중이야. 느낄 수 있어. 그 언니가 완전히 깨어날 때 나는 떠나게 되겠지. 내가 떠나면 소백, 아저씨한테 네가 살던 숲으로 보내달라고 해. 소백 너도 나를 보고 싶어 할까?”
은혜가 작게 중얼거렸다.
소백은 고개를 들고 은혜를 바라보았다. 호랑이의 두 눈에 복잡한 빛이 담겼다.
지난 시간 동안 은혜는 물론 그를 업신여기고 놀려왔지만 사실 그는 은혜의 그런 행동도 자신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때로 소자가 자신을 괴롭히기라도 하면 은혜는 그런 소자를 혼내곤 했다.
그 모든 것을 소백은 눈에 담았다. 씁쓸했다. 그는 은혜를 바라보며 큰 머리를 끄덕였다.
은혜는 빙그레 웃으며 소자의 등에서 뛰어내리더니 소백 곁으로 다가와 쓰다듬고는 조용히 말했다.
“소백, 내가 떠나면 아저씨도 나를 보고 싶어 할 거라고 말해줘.”
소백이 낮게 그르렁거리며 은혜를 바라보았다.
은혜는 슬픈 얼굴로 소백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먼 산꼭대기에서 좌선을 하고 있는 누군가를 바라보았다.
‘아저씨, 나도 다 알아. 그 언니는 아저씨한테 정말 중요한 사람일 거야. 그러니까 나는,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다 알아.’
은혜의 눈에 눈물이 부옇게 차올랐다. 그녀는 옆에 있는 멍청한 소자를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소자 내가 떠나면 넌 자유야.”
한제는 가부좌를 튼 채 산꼭대기에 앉아 좌선을 하는 것 같아 보였지만 실은 하늘을 보고 있었다.
“나는 천도에 대항했으나 사실은 천도에 농락당한 것임을 미처 몰랐구나.”
한제는 혼잣말을 토해내더니 이내 침묵했다.
“아저씨, 아저씨! 이리 와봐!”
아래에서 들려온 은혜의 목소리에 한제는 고개를 숙여 그녀를 바라보았다. 복잡한 눈빛이 스쳐갔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훌쩍 뛰어내렸다.
“아저씨, 앉아봐. 내가 아저씨 머리 정리해줄게.”
은혜는 천진한 미소를 지으며 나무 빗을 들어 보였다. 일전에 철암이 그녀에게 선물한 빗이었다.
그녀는 한제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그를 끌어다 커다란 돌 위에 앉혔다. 그리고 그의 뒤에 선 뒤 손에 쥔 나무빗으로 열심히 한제의 머리를 빗겨주었다.
꽤나 진지한 표정으로 머리를 빗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아저씨, 나한테 그 언니 이야기 들려줄 수 있어?”
한제는 한참이나 침묵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은혜는 한제의 머리를 빗겨주면서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때로는 뭔가 깨달았다는 듯 몸을 살짝 떨기도 했다.
“아저씨, 만약 내가 먼저 죽으면 모완 언니는 깨어나지 못하는 거야?”
은혜는 한제의 머리를 빗겨주던 손을 멈추고 조용히 물었다.
한제는 몸을 돌려 은혜를 바라보았다. 은혜도 고개를 들어 한제를 마주보았다. 그녀의 두 눈에 슬픔이 가득했다.
“아저씨, 난 아저씨한테 그냥 모완 언니를 깨어나게 할 도구일 뿐이야?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난 아저씨를 가족처럼 여겨왔는데… 아저씨, 난 아저씨가 나를 볼 때 모완 언니가 아니라 나를 봤으면 좋겠어. 한 번이라도.”
한제는 은혜를 바라보며 느릿하게 말했다.
“여아, 피곤하다. 가서 쉬어야겠어.”
말을 마친 그는 몸을 돌려 한 발짝 내딛었다. 순간 그의 모습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은혜가 손에 쥐고 있던 나무 빗이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녀는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아 울었다.
“아저씨, 나 무서워!”
은혜가 울면서 중얼거렸다.
멀리 떨어진 곳에 나타난 한제는 몸을 바르르 떨었다.
“모완아, 만약 너라면 어떤 선택을⋯⋯.”
소백
소백이 실종되었다.
아무런 기척도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한제는 녀석이 깊은 밤에 몰래 이 산봉우리를 떠나 먼 곳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
소백이 실종되자 은혜는 크게 상심했고 이내 병을 얻었다.
끙끙 앓으며 꿈을 꾸는 와중에도 그녀는 소백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은혜는 어린 마음에 항상 소백을 놀려댔지만 그만큼 아끼고 사랑하는 존재였다. 소자가 있다고 해도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항상 소백이 우선이었다. 소백은 그녀의 유일한 친구였다.
하지만 한제가 소백을 찾으려 할 때 그를 막아선 것은 은혜였다. 그녀는 슬픈 눈으로 한제를 바라보며 부탁했다.
“떠난 건 소백의 선택이야. 해야 할 선택을 한 거야. 소백은 선택이라도 할 수 있으니 나보다 행복하겠지.”
칼에 베인 듯 한제의 마음이 아파왔다.
그는 긴 한숨을 내쉬며 묵묵히 걸었다. 4년 후 양쪽이 모두 무사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던 그에게는 이미 계획이 하나 있었다.
“아저씨도 날 필요로 하지 않고 소백 너도 나를 떠났구나.”
한 달 뒤, 은혜는 병이 나았지만 이전보다 더욱 말이 없어졌다. 그녀는 항상 먼 곳을 내다보며 그저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
★ ★ ★
두 달쯤 흘렀을까? 어느 맑은 날, 저 멀리서 무슨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뒤이어 소백이 나타났다. 소백은 단 몇 걸음 만에 은혜의 곁에 이르렀다.
소백의 입에는 불처럼 붉은 나뭇가지가 하나 물려 있었고 그 끝에는 열매 하나가 열려 있었다.
은혜는 소백을 보자마자 기쁨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
“소백, 나를 떠난 게 아니었구나. 소백⋯⋯.”
은혜는 소백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면서 웃었다.
소백은 좀 말랐고 털도 군데군데 상했으며 상처의 흔적도 남아 있었다. 많이 쇠약해진 듯 더는 이전처럼 용맹해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녀석의 배에는 깊은 상처가 하나 있었는데 이미 아물고 있긴 했지만 피가 털을 흠뻑 적실 정도로 큰 상처다.
소백은 입에 물고 있던 가지를 내려놓고 혀로 은혜의 뺨를 핥았다. 그리고 머리를 흔들더니 신중하게 사방을 살폈다. 한제가 없는 것을 확인한 녀석이 은혜의 옷깃을 물고 끌어 열매가 달려있는 붉은 나뭇가지가 있는곳으로 데려갔다.
“소백, 이게 뭐야?”
은혜는 멍한 얼굴로 땅에 떨어진 열매를 집어 들었다.
소백은 초조한 표정으로 사방을 둘러보더니 연이어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 열매를 얼른 먹으라는 것 같았다.
“소백, 이거 먹으라고?”
은혜는 단번에 호랑이가 원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소백은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은 점점 초조해 보였다.
은혜는 열매를 쥐고 잠시 살피더니 조용히 물었다.
“이게 무슨 과일인데?”
“그건 쇄영과(碎嬰果)다.”
멀리서부터 한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백은 온몸의 털을 쭈뼛 세우며 은혜의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며 낮게 그르렁거렸다.
한제가 먼 곳에서 느릿하게 걸어왔다. 소백이 돌아온 순간 그 사실을 알아챈 그는 그의 입에 들려 있는 열매 역시 한눈에 알아보았다.
“주인을 보호할 줄 아는 착한 호랑이로군!”
한제가 녀석을 노려보며 말했다.
소백은 두려웠으나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 거리며 은혜의 앞을 막아섰다. 그는 지난 몇 년 동안 이미 은혜의 체내에서 원영이 하나 자라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가 두려움을 느끼게 한 원흉이기도 했다.
“아저씨, 쇄영과(鎖嬰果)가 뭔데?”
은혜는 소백의 털을 쓰다듬으며 조용히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