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326
한제의 몸은 꼼짝도 할 수도 없었지만 원영은 움직일 수 있었다. 또한 그는 경지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순간, 하늘에 거대한 고대신의 허상이 나타나더니 곧장 한손으로 생사윤회의 축을 쥐고 휘둘러 펼쳤다. 한 줄기 짙은 회색 기운이 생사윤회의 축에서 발산되었다. 그 기운은 거대한 팔을 쫓지 않고 고대신의 허상에 녹아들었다.
고대신의 허상은 몸을 한 번 부르르 떨었다. 그의 몸에서 돌연 천도의 사자와 같은 기운이 나타났다. 그는 무정한 눈빛으로 큰 손을 뻗어 천도의 사자가 뻗은 팔을 붙잡더니 매섭게 끌어당겼다.
순간 허무의 공간 속에 숨은 채 얼굴만 드러냈던 천도의 사자가 고대신의 힘에 그대로 끌려 나왔다.
하늘의 뜻
한제는 완전한 모습을 드러낸 천도의 사자를 보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천도의 사자의 몸은 고대신의 허상과 거의 똑같았던 것이다.
천도의 사자 미간에서는 일곱 개의 반점이 번득였다. 하지만 그중 세 개는 무언가에 의해 봉인된 듯 다소 어두웠다.
“저건⋯⋯.”
한제는 그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충격을 받고 말았다.
“저것이 정말 윤회천도인가?”
이전에 처음으로 천도의 사자를 봤을 때에는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윤회란 무형의 천도 법칙인데 어째서 사자가 존재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저 사자는 분명 고대신이었다.
오늘 그가 목격한 모든 것은 한제의 상상을 뒤엎었다. 순간 그에게는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천도는 무엇인가?
천도의 사자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의 두 눈은 처음으로 냉랭한 무정의 빛이 아닌 다른 빛을 띠었다. 그것은 아득함이었다.
그는 고대신의 허상을 보고 입을 벌렸다. 뭔가를 말하려는 듯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사자는 몸을 날려 한제가 만들어낸 고대신의 허상을 향해 거대한 팔을 휘둘렀다.
쾅!
충격음에 하늘과 땅이 뒤흔들렸다. 이미 균열이 나 있던 반경 1만 리는 그 진동에 마디마디 쪼개지기 시작했다. 한제는 자신이 있는 곳에서 1만 리 범위가 갑자기 무너져 내리면서 거대한 구덩이가 형성되고 있음을 느꼈다. 그 거대한 구덩이의 정중앙, 은혜가 누워 있는 곳만이 여전히 건재했다. 다만 멀리서 보면 그곳은 거대한 기둥처럼 깊고 넓은 구덩이 안에서 외롭게 솟아있을 뿐이었다.
은혜의 몸은 부드러운 하얀 빛을 발하고 있었다.
경지의 힘으로 만들어낸 고대신은 천도 사자의 주먹질에 몇 걸음 물러났다. 한제의 입가로 선혈이 한 줄기 흘렀다. 그의 원신은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만약 그 자신이 저항해내지 못한다면 모완의 원영이 소멸되고 말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경지의 힘으로 만들어낸 고대신은 앞으로 튀어나오며 주먹을 휘둘러 천도의 사자를 공격했다.
쾅, 쾅, 쾅!
한 번, 또 한 번, 다시 한 번… 이어지는 공격은 월성을 뒤흔들었고 한제는 점점 많은 피를 토해냈다. 그때, 그의 몸을 억누르던 윤회의 힘이 약간 느슨해진 틈을 타 한제는 낮은 기합을 넣으며 그 힘에서 벗어났다.
“죽어라!”
한제는 크게 고함을 지르며 몸을 훌쩍 날리더니 천도의 사자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천도의 사자는 무심하게 손을 휘둘렀고 한제는 유성처럼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 사자 역시 뒤로 조금 물러났다.
고대신의 허상은 곧장 한 걸음 내딛어 천도의 사자를 따라잡더니 다시 공격하기 시작했다.
한제는 다시 날아들었다. 입가의 선혈을 핥고 전의를 불태우며 다시 달려들어 고대신의 허상과 함께 천도의 사자를 공격했다.
천도의 사자는 계속해서 뒤로 물러났다. 그의 이마에 자리한 별 모양 반점 중 네 개만 번득였다. 4성급 고대신이라는 뜻이었다.
“넌⋯⋯ 우리 동족이 아니구나.”
천도의 사자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는 고대신의 언어로 말했기 때문에 일반적인 수련자로서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으나, 한제는 물론 알아들었다.
그의 말대로 지금의 한제는 고대신의 일족이 아니었다. 어느 고대신도 수련을 할 수는 없고 무엇보다 경지의 힘을 가진 고대신은 더더욱 없다.
“동족이든 아니든 모완의 원영을 가져가려고 하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한제는 고대신의 말로 소리치며 주먹을 날렸다.
천도의 사자가 다시 물러났다.
고대신의 허상은 계속해서 그를 쫓았다.
이때, 은혜의 몸에서 피어오르던 하얀 빛은 점점 더 짙어졌다.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은혜의 몸에서 천천히 흘러나왔다.
“한제⋯⋯ 나를 속였구나.”
지난 19년 동안 한 번도 듣지 못했던 목소리, 바로 모완의 목소리였다.
한제는 흠칫 놀라 몸을 떨며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고 몹시 슬프고도 애통한 장면을 보게 되었다.
“모완아, 너!”
은혜의 몸에서 피어오르던 하얀빛이 순간 극에 달할 정도로 밝아졌다. 뒤이어 은혜의 혼백이 육신으로부터 둥실 떠올랐고 하얀빛에 뒤덮인 채 천천히 사방으로 흩어져갔다.
“한제⋯⋯ 나도 보고 싶고 함께하고 싶어. 하지만 나는 이미 죽었어야 할 사람이야. 그리고 이 아이의 혼백을 흡수하기는 싫어. 지난 19년 동안 난 이 아이가 자라나는 것을 느끼고 또 봐왔어. 이제 나의 아이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야. 난⋯⋯ 난 도저히 그럴 수 없어. 너무 바보 같지? 맨날 실망시키기나 하고⋯⋯.”
모완은 깨어난 순간 은혜의 혼백을 삼키는 것을 그만두고 원영의 힘으로 그녀의 혼백을 몸 밖으로 밀어냈다. 혼백이 없어진 은혜의 육신은 이미 죽음의 기운으로 뒤덮여 있었다. 모완의 원영은 깨어난 순간 천도 아래 완전히 드러나 버렸고 그녀의 원영 역시 천천히 붕괴되어 가고 있었다.
한제는 몸을 날려 은혜의 육신 곁으로 다가와 오른손으로 은혜의 미간을 빠르게 눌렀다. 순간 모완의 원영이 천천히 은혜의 육신으로부터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한제를 바라보았다. 19년 만에 보는 그녀의 부드러운 눈빛이었다.
“약속해줘. 잘 지내겠다고⋯⋯.”
모완이 작은 목소리로 말하며 손을 들었다. 한제를 만져보려는 듯했지만 그녀의 손은 한제의 몸에 닿자마자 투명해져 버렸다.
모완의 얼굴에 한 줄기 슬픔이 스쳐갔다. 그녀는 한제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은혜는 아직 애야. 힘들게 하지 마. 이 모든 것은 내 선택이야.”
이때, 천도의 사자가 훌쩍 뛰어올랐다. 경지의 힘으로 만들어진 고대신을 관통하여 한제의 상공에 이른 그는 오른손을 뻗어 허공에 머물러 있던 거대한 조종간을 쥐었다. 그것을 밀자 윤회의 힘이 다시 나타났고 거대한 흡입력이 모완을 감쌌다.
한제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의 두 눈에 극도로 서늘한 빛이 어려 있었다.
“네가 무엇이든 내 동의 없이 그녀를 데려갈 수는 없다.”
그는 미간을 두드려 석주를 꺼냈다. 그리고 오른손을 휘두르자 모완의 원영이 석주 안으로 흡수되었다. 잠시 후 석주는 다시 한제의 미간으로 들어가 사라졌다.
천도의 사자는 한제를 노려보다가 천천히 사라져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하늘의 구름층과 그 조종간 역시 사라져 버렸다.
한제는 멍한 눈으로 은혜의 육신을 보며 광기어린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의 웃음소리에는 슬픔만이 어려 있을 뿐이었다.
“하늘과 두 차례 싸워 이겼건만 결국 하늘의 뜻대로 돌아가게 되었구나. 하늘의 뜻이⋯⋯ 하늘의 뜻이 사람을 괴롭게 하는구나!”
한제는 은혜의 혼백을 두드렸다. 그 손짓에 은혜의 혼백은 다시 그녀의 육체로 돌아갔다. 잠시 후 한제는 광기 어린 웃음을 흘리며 몸을 훌쩍 날려 하늘 끄트머리로 사라졌다. 비통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제가 떠난 뒤, 소백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한제와 사자의 결투 중 한제의 봉인이 깨지는 바람에 무사히 도망쳐 나왔던 소백은 한제가 떠나는 것을 확인하고 곧장 돌아와 슬픈 눈으로 혀를 내어 은혜의 작은 얼굴을 핥았다.
“소백⋯⋯ 귀찮게 하지 마. 자고 있잖아.”
은혜가 중얼거렸다.
소백은 깜짝 놀라더니 기쁨에 찬 포효를 내질렀다. 그리고 은혜의 옷깃을 물고 먼 곳으로 떠나갔다.
★ ★ ★
어느 날부터인가 월성에서는 흐트러진 머리와 더러운 얼굴을 한 어느 미친 사람이 ‘하늘의 뜻’만을 중얼거리고 다녔고 자신의 앞길을 막는 마수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하늘의 뜻⋯⋯ 이 이한제는 하늘의 뜻에 이겼음에도 그 하늘의 뜻에 농락당했다.”
1년 후, 어느 비오는 밤. 월성의 동쪽 끝 높은 산꼭대기에 선 그 미친 사람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그의 뺨을 타고 떨어져 내렸다.
“무엇이 삶이고 무엇이 죽음인가? 이 이한제는 일생동안 살육의 삶을 살다가 화범(化凡)하여 생사의 천도를 깨닫고 삶은 삶이고 죽음은 죽음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이 비는 하늘에서 나서 땅에서 죽는 것이니.”
한제는 눈에 비가 들어가는 것도 아랑곳 않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주일 선배의 치정(癡情)과 시체였던 선녀의 부활도 보았다. 사내가 죽으면 여인이 살고 여인이 죽으면 사내가 살았다. 그를 통해 나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니며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지. 또한 재난을 겪고 새로 태어나면서 나는 삶의 변화를 느꼈다. 은혜의 생사와 모완의 선택, 그 모든 것은 하늘의 뜻이었다. 그리고 이 이한제는 마침내 삶은 삶이고 죽음은 죽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목소리는 죽은 것처럼 착 가라앉아 있었다.
“19년의 세월이었다. 완아, 네가 준 깨달음에 감사한다. 세상일이란 것이 원래 흘려보내야 할 것은 흘려보내고 남겨야 할 것은 남겨야 하는 법이지. 이 빗물과 마찬가지다. 빗물은 하늘에서 나지만 대지에서 죽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대지에서 빗물은 다시 살아나니까. 빗물은 식물을 자라나게 하고 안개를 피어 올리며 갖가지로 변화한다. 이것이 바로 삶이다.”
그는 허허롭게 웃으며 고개를 젓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부모님의 혼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 너를 놓지 못하는 것은 부보님께 효를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너에게 한 번도 내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 마음만은 진실이나 그보다는 일종의 책임감과 감동이 더 컸으니…”
한제의 미간에서 부모의 혼백이 튀어나오더니 자애로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흩어져 사라졌다. 그들은 소멸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을 향해 다가가는 중이었다.
★ ★ ★
“소백, 아저씨는 대체 어디 있는 거니?”
소백의 등에 탄 은혜의 손에는 열매가 들려 있었다.
소백은 머리를 한 번 흔들며 대답하듯 낮게 그르렁거렸다.
1년 전 깨어난 뒤로 은혜는 한제를 보지 못했다. 그녀 곁에 남은 것은 소백뿐이었다.
은혜를 태운 채 산맥 곳곳을 돌아다니던 그때, 지면이 한 차례 진동했다. 소백은 낮게 포효하며 수십 척 뒤로 물러나 잔뜩 경계를 했다.
진동은 갈수록 강해졌다. 그러다가 순간, 지렁이 같이 생긴 거대한 무언가가 지면을 뚫고 올라왔다. 그것은 격렬한 쉭쉭 소리를 내다가 은혜를 향해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그 생물은 온몸이 붉은색에 마디 형태를 이루고 있어 보기만 해도 공포스러웠고 땅 위로 드러난 길이만 해도 백 척이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