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333
둔천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인자한 눈으로 한제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 작은 주작성은 자네에게 어울리지 않아. 만약 이곳을 떠날 때가 된다면 적당한 곳을 골라 우리 연혼종에 대한 성대한 제사를 치러주게. 그리고 우리 연혼종을 위해 999개의 천제탑(天梯塔)을 만들어 우리 연혼종의 대업을 이루고 우리 연혼종이 6성 수련국의 표준이 될 수 있게 해주겠나?”
한제는 세상에 공짜란 없음을 뭔가를 얻으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둔천의 말에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둔천은 한제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한참 뒤에서야 그는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쉰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사형, 나는 사형의 계산대로 모든 것을 다 했습니다. 반드시 바랐던 결과가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소매를 휘둘렀다.
“따라오게!”
말을 마친 그가 앞장섰고 한제는 얼른 그 뒤를 따랐다.
둘은 번개처럼 빠르게 이동해 눈 깜짝할 사이에 산봉우리를 넘어 연혼종 뒷산에 이르렀다.
둔천은 그곳에서 결인을 하나 쏘아 보냈고 그러자 허공이 바르르 떨리더니 거대한 검은색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그 소용돌이 사방에서는 수많은 검은색 번개가 번득이며 위험한 기운을 퍼뜨렸다.
“이곳은 우리 연혼종의 금지된 땅이라네. 쇄신술을 익힌 사람만 출입할 수 있으니 자네를 데리고 가는 게 규정 위반은 아니지.”
둔천은 몸을 훌쩍 날려 소용돌이 안으로 들어갔다.
한제는 잠시 고민하다가 경계심을 곤두세운 채 그 뒤를 따랐다.
소용돌이 안으로 들어선 한제는 마치 전송진에 들어선 듯한 느낌을 받았다. 눈앞이 요란스레 번쩍이는가 싶더니 어느새 거대한 동굴의 안쪽 경광이 시야에 들어왔다.
크지 않은 동굴 정면 벽에는 선옥으로 만들어진 위패가 서른 개 이상 놓여 있었다.
“우리 연혼종 역사상 모든 영변기 수련자들의 위패라네.”
둔천은 그 위패를 향해 절을 했고 한제 역시 몸을 숙여 절을 했다.
둔천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뒤쪽의 돌 벽을 꾹 눌렀다. 순간 콰르릉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천우, 이곳에 가부좌를 틀고 앉게. 우리 연혼종에 남은 선옥은 많지 않아. 사성성(四聖星)에 있었을 당시 모아둔 적지 않은 선옥도 억겁의 시간 동안 서른 명이 넘는 영변기 수련자를 배출하면서 다 써버렸지. 지금 남아 있는 것들은 나의 사형과 사제가 젊었을 때 선계에서 가져온 것인데 부족할 수도 있겠군. 허나 걱정 말게. 선옥이 더 필요하다면 내 강도짓을 해서라도 최대한 빨리 자네가 영변기에 이를 수 있도록 해주겠네.”
둔천은 과거의 영광을 회상하는 듯 아련한 눈길로 생각에 잠겼다.
“내가 연혼종의 시조가 되었을 때부터 우리 연혼종 제자가 영변기에 이를 무렵이 되어도 선옥에 대한 걱정은 없었네. 어느 문파에 가더라도 십억존혼번만 가지고 가면 만사형통이었으니까. 한 문파를 털어 모자라면 두 개의 문파를 그래도 안 되면 면 세 개의 문파를 털면 됐으니 모자랄 리는 없었지. 사실 내가 영변기에 이를 무렵에도 나의 스승께서는 십억존혼번을 가지고 세 개의 5성 수련국에 속해 있던 모든 종파를 다 털어오셨다네.”
둔천은 덤덤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눈에는 의기양양한 빛이 어려 있었다.
한제는 그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연혼종은 참으로 거친 종파였군.’
십억존혼번은 주작성 모두가 두려워하는 물건이었다. 그러니 연혼종은 그 법보를 가지고 마음대로 굴 수 있었을 터였다. 이곳에 영변기 수련자가 그렇게 많았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인 모양이었다.
이때, 사방에서 들려오던 콰르릉 소리는 점점 더 격렬해졌고 지면도 미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쩌적 하는 소리와 함께 사람 키만큼 높은 선옥 두 덩어리가 솟아오르며 짙은 선력이 퍼져나갔다.
한제는 그 두 개의 거대한 선옥을 자세히 살폈다. 품질만 놓고 보면 그가 이전에 사용한 것에 미치지 못했지만 크기가 압도적이라 품고 있는 선력 역시 상당했다.
한제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빠르게 호흡하기 시작했다.
두 덩어리의 선옥은 한제의 앞뒤에서 짙은 선력을 발산했다. 그 선력들은 발산되자마자 한제의 체내로 흡수되었다. 한제의 몸은 마치 거대한 소용돌이처럼 두 덩어리 선옥이 내뿜는 선력을 빨아들였다. 점차 선옥의 선력이 유백색 기체가 되어 한제에게 곧장 흡수되었다.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둔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고민하다가 저물대를 두드렸다. 그의 손에 하얀색의 작은 깃발 일곱 개가 나타났다. 그가 오른손을 휘두르자 그 일곱 개의 깃발은 순간 휙 날아가 한제의 사방에 떨어졌다. 그러자 여러 줄기의 하얀 선이 그 깃발들에서 나와 서로 하나로 연결되어 불규칙적인 도형을 이루었다.
“일어나라!”
둔천은 두 손으로 결인을 그리며 허공을 두드렸다.
순간 흰색 막이 깃발로 연결된 하얀색 선 위로 떠오르며 한제를 완전히 감쌌다.
“천우, 이 진이 있으면 흡수한 선력이 더욱 빨리 영력으로 전환될 걸세. 나는 자네에게 결코 인색하게 굴지 않아.”
무궁무진한 영력이 사방팔방에서 한제의 모공 하나하나를 통해 체내로 들어왔다. 그리고 끊임없이 한제의 몸을 개조하면서 그의 체내에 원래부터 자리하고 있던 영력을 빠르게 전환시켜 나갔다.
점차 한제는 시간의 흐름마저 잊고 선력을 응집하는 데에만 완전히 몰두했다. 그 과정에서 선력에 대해서도 천천히, 깊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영변기는 힘의 전환기였으며 영력과 선력을 융합시키는 시기였다. 말하자면 선력을 장악하기만 하면 진정한 강자가 될 수 있는 셈이었다.
영변기 수련자가 선력을 장악하면 영력으로 가동시켜야 하는 수많은 법보들은 선력의 충격을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용할 수 없게 된다. 허나 세상에는 선검이나 사신차처럼 영력이 아니라 선력으로만 가동되는 법보도 있었다.
시간의 흐르면서 엄청난 양의 선력이 모두 흡수된 그날, 한제의 앞뒤에 놓여 있던 두 덩어리의 선옥에서는 미미한 쩌적 소리와 함께 균열이 일어났다.
선옥 위에는 수많은 균열이 나타났고 색도 회색으로 변했다. 그리고 한제가 마지막 한 톨의 선력마저 흡수한 순간, 쩍 소리와 함께 무너져 내렸다. 선옥은 이제 가루가 되어 두 개의 작은 언덕처럼 바닥에 쌓여 있었다.
한제의 머리카락이 기이하게 휘날렸고 온몸에서 이전보다 훨씬 진한 선기가 흘렀다. 그가 뿜어내는 엄청난 위압감에 주위의 일곱 개 깃발은 부르르 떨다가 뿔뿔이 흩어졌다.
한제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눈에서 한 줄기 빛이 번득였다.
“삼분의 일 정도 채워진 듯합니다.”
한쪽 구석에서 좌선하고 있던 둔천은 두 눈을 번쩍 뜨고는 웃으며 말했다.
“훌륭하군. 그럼 연혼종의 전통대로 선옥을 빼앗으러 가세. 선유족 때문에 쑥대밭이 됐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우리의 전통을 막을 수는 없지.”
둔천이 허공에 손을 흔들자 검은 소용돌이가 나타났다. 한제와 둔천은 그 소용돌이 안으로 들어갔다.
밖으로 나왔을 때 두 사람은 연혼종 상공이었다. 둔천은 뒷짐을 진 채 구름 위을 타고 날아갔다. 한제는 묵묵히 그 뒤를 따랐다. 그는 지금 선력으로 인한 신체의 변화를 느끼고 있었다.
이제 그의 체내에 영력은 반 이상이 선력으로 변한 상태였다. 영변기가 되려면 늘어난 선력으로 체내의 뼈와 살, 경맥 등을 모두 채워야 했기에 선옥이 더 필요했다.
★ ★ ★
비로국 서쪽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늪이 하나 있다. 이 늪의 수만 리 안에는 인적조차 없다. 대신 이곳에는 온갖 벌레, 특히 독충들이 모여들었다. 물론 다른 마수들도 있었고 그들도 치명적인 독을 품고 있었으나 이 독충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은 독충을 피해 대부분 늪 안에서 지내야 했다. 독충들이야말로 이곳의 진정한 주인이자 왕이었다.
일반인은물론 수련자들도 이 늪에는 한 발도 들이지 않았다. 위험하기 때문이기도 했으나 그보다는 바로 치마도(豸魔道)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늪 속에 터를 잡은 치마도는 매우 독특한 문파 중 하나로 이곳에는 본관이나 대전이 없다. 그들은 뿔뿔이 흩어져 거대한 늪 안에서 각자 생활했다.
치마도의 제자들은 온 늪에 걸쳐, 주거할 수 있는 몇몇 구역에 흩어져서 살아갔다. 이들은 서로 깊은 정을 쌓지도 않았고 수련도 대부분 각자 알아서 해야 했다.
이 문파에는 충수술(蟲修術)이라는 특유의 공법이 있는데 늪에 있는 수많은 독충들 역시 그런 수련의 결과로 만들어진 것으로 그들에게 무척 편리한 존재가 되어주었다.
그 늪의 가장자리 상공에 두 사람의 인영이 나타났다. 노인 한 명과 청년 한 명이었다. 비쩍 마른 노인은 백발이 성성했고 검은 옷을 입은 채 뒷짐을 지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냉랭했고 독충들마저 놀라 달아날 만큼 차가운 기운을 온몸에서 뿜어냈다.
반면 하얀 옷을 입은 청년은 썩 잘생겼다고 할 수는 없었으나 탈속적인 느낌이었다. 특히 두 눈은 흑백의 구분이 명확해 의지가 강해 보였다.
이들은 둔천과 한제였다.
선유족과의 2차 전쟁
둔천은 늪을 내려다보며 감개무량한 듯이 말했다.
“치마도 사람들은 애매모호하고 비밀스럽다네. 이들의 선조는 아마 쥐새끼였을 거야. 당시 나의 스승께서 나를 데리고 와 이곳에서 강탈한 선옥은 그 전 종파에서 빼앗았던 선옥의 세 배에 달했지.”
말을 마친 둔천이 오른손을 뻗자 십억존혼번이 그의 손에 나타났다. 30척 길이의 거대한 깃발에 둔천의 기세가 돌변했다. 그는 발아래의 늪을 바라보며 혼번을 휘둘렀다. 그러자 혼백들이 쏟아져 나와 사방을 휘저었다.
사방으로 흩어진 혼백들은 빙빙 맴돌며 구슬픈 곡성과 함께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들은 하나하나 강력한 음파로 변해 주위를 휩쓸었다.
보랏빛과 금빛이 도는 열 개가 조금 넘는 혼백들은 포효하며 흥분한 눈빛을 번득였다. 그 혼백들은 분부가 떨어지기도 전에 튀어나갔고 독충들은 천적이라도 만난 듯 달아나기 바빴다.
둔천이 버럭 호통을 쳤다.
“치마도의 쥐새끼들아, 연혼종의 둔천님이 오셨다. 얼른 선옥을 가져오라!”
마치 빌려준 선옥을 받으러 온 듯한 그 말투에 한제는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둔천의 말대로 이는 연혼종의 전통과도 같았다. 둔천의 스승 역시 제자를 위해 선옥을 뺏으러 왔을 때 방금 둔천과 똑같은 말을 했음을 한제는 알지 못했다.
늪에서 분노에 찬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인영이 나타나 혼백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접근하기도 전에 그들은 혼백의 기세에 밀려 물러나고 말았다.
“둔천, 우리에게도 선옥은 없다.”
둘 중 보라색과 붉은색이 섞인 옷을 입고 귀에 두 마리의 붉은 지네를 감고 있는 노인이 소리쳤다.
곁의 노파는 거친 천으로 된 옷을 입었고 얼굴에는 주름이 자글자글했으나 두 눈만큼은 밝았다. 그녀는 마른기침을 한 번 하더니 노인의 말을 끊고 말했다.
“둔천, 이번에는 선옥을 줄 수 없다. 선유족이 찾아왔을 때 내가 중상을 입는 바람에 회복하는 데 그간 모아둔 선옥의 반을 써버렸다. 나머지 반은 앞으로를 위해 필요하다.”
둔천은 말없이 노파를 바라보며 미간을 두드렸다. 그러자 제압해두었던 죽음의 기운이 순식간에 그의 몸에서 피어올랐다. 그가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연홍, 나의 수명은 2년도 채 남지 않았다.”
노파는 흠칫 놀랐고 노인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연혼종에는 다들 미친놈들밖에 없는 것이냐. 수명이 끝나가는 마당에 남의 선옥을 빼앗으러 오다니⋯⋯.”
둔천은 의외로 화를 내지 않고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난 이제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니 두려울 것도 없지. 선옥만 넘기면 얌전히 떠나주마. 허나 선옥을 주지 않는다면 독충의 씨를 말려주겠다.”
분노로 온몸을 격하게 떨던 노인이 뭔가 대꾸를 하려던 찰나, 노파가 헛기침을 하더니 말했다.
“네놈이 공격한다면 연혼종은 우리 두 사람의 보복을 받게 될 것이다. 약속하지. 네 옆의 그 녀석도 죽게 될 게야.”
둔천이 대답하기도 전에 한제가 피식 웃더니 저물대에서 선검을 꺼냈다. 선력을 이용해야만 제 힘을 발휘하는 법보답게, 선검에 선력을 담자 전보다 더욱 찬란하게 금빛으로 번득였고 검광이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노파는 안색이 크게 변해 저물대에서 재빨리 거북이 등껍질을 꺼내 내던졌다.
펑!
한 번의 충돌로 검광이 사라졌으나, 등껍질은 순식간에 재로 변해 버렸다.
노파의 얼굴은 더욱 딱딱하게 굳었고 곁의 노인 역시 놀란 모습이었다.
“할 수 있다면 죽여보시지요. 이 후배는 피하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