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36
“응. 아까 날 못 알아보겠다고 한 건 그 사람 때문이었지?”
장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눈을 감고 잠시 생각하다가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입을 열었다.
“죽었구나. 한제야, 일단 저 녀석들을 마저 처리하고 나서 다시 이야기하자.”
말을 마친 그는 오른손을 들었다. 순식간에 세 개의 불덩어리가 다시 나타났다. 그러자 류산을 비롯한 표국 사람들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미간을 찌푸린 한제가 막 무슨 말을 하려던 순간, 세 개의 불덩어리가 움직였다. 허나 그 불덩어리가 노린 것은 위무 표국의 사람들이 아니라 검은 옷의 사람들이었다.
이 절대적인 힘 아래 일반인의 운명은 개미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들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송행과 같이 바닥에 나뒹굴더니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여러 개의 금빛 피 구슬만이 시체와 함께 사라지지 않고 공중에 붕 떠 장호에 의해 단숨에 삼켜졌다.
류산 등은 바짝 얼어 감히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
다시 세 개의 불덩어리를 소환해낸 장호의 모습을 본 한제가 소리쳤다.
“장호, 더는 안 돼!”
장호는 한제를 힐끔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이 사람들을 죽이지 않으면 돌아가서 허튼 소리를 하게 될 거야. 네가 방금 죽인 사람은 나의 스승님이야. 그 분은 지묵 노인의 여섯 번째 제자 백전이지. 그들이 쫓아온다면 너와 나는 붙잡힐 수밖에 없어.”
그러자 그나마 냉정을 유지하고 있던 중년 서생이 다급히 말했다.
“선인이시여, 저희 모두 오늘 겪은 그 어떤 일도 절대 입 밖에 내지 않겠다고 맹세하겠습니다. 저희는.”
그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장호가 미간을 찌푸리며 냉소했다.
“너희가 입을 열지 않으려 해도 너희의 영혼을 뽑아 종으로 삼으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빠짐없이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그런 자들이다.”
중년 서생의 말에 대한 답이긴 했지만 장호의 시선은 한제를 향해 있었다.
침묵하던 한제는 곧 한손을 뻗었다. 그러자 예닐곱 명의 몸이 둥실 떠올라 한제의 앞에서 맴돌았다.
장호는 불덩어리를 회수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제는 저물대에서 옥패 하나를 꺼냈다. 이는 대산파의 교역회에 참석해 설호로부터 얻은 것으로 응기 4단계에서 9단계까지의 모든 구결이 담겨 있었다. 그 옥패에는 기억을 지우는 화신술(化神術)이 있었다.
옥패에서 화신술을 찾아낸 한제가 눈을 번득였고 허공에 떠 있던 사람들의 눈빛이 아득해지더니 천천히 푸른빛을 띠었다. 잠시 후 푸른빛이 사라지자 사람들의 표정이 멍해지더니 땅으로 쓰러졌다.
속으로 한숨을 내쉰 장호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화신술을 거둔 한제는 장호에게 눈짓한 후 몸을 붕 떠올려 날아갔다. 장호가 깊은 한숨을 내쉬자 금색 구슬 하나가 튀어나왔다. 그는 그 구슬을 밟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비검
어느 산꼭대기에 이르자 한제가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천천히 내려왔다. 장호는 약간 숨이 차올랐으나 호흡을 가다듬고는 적당한 장소를 찾아 내려왔다. 그는 저물대에서 두 개의 고구마를 꺼내 한제에게 하나 건네며 웃었다.
“내가 구운 거야. 맛 좀 봐.”
한제는 고구마를 받아들었다. 10년 전 대산파에서 만난 두 소년이 인사를 나누던 그 당시의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 나는 대산파를 떠난 뒤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새롭게 입문할 문파를 찾다가 우연히 불로초를 하나 먹게 됐고 응기 1단계의 수준을 갖추게 됐지. 그 후에 백전과 만났어. 내 스승 말이야. 그 자는 처음에 나를 죽이려 했으나 내가 응기 1단계에 이른 것을 알고는 제자로 삼았어.
그리고 내 몸에 독을 집어넣고는 죽을 때까지 자신을 위해 사람들의 정혈(精血)을 모으도록 시켰지. 아까 널 모른 척했던 건 그가 곁에 있었기 때문이야. 다행히 네가 그 자를 죽인 덕에 내 몸에 흐르던 독도 사라졌어. 난 해방된 거야.”
장호가 고구마를 씹으며 지난 10년 동안 있었던 일들을 간략하게 들려주었다. 담담하게 말했으나 표정은 씁쓸했다. 지난 세월의 아픔과 고통이 느껴졌다.
장호는 부러운 눈으로 한제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백전을 죽인 걸 보면 넌 지금 축기에 이른 상태인 건가? 그 자가 가지고 있던 그 비검, 정말 대단한 물건이야. 백전이 말하길 자신은 그 비검 위력의 절반도 발휘하지 못하고 축기에 이르지 못한 자는 그 비검을 감당할 수 없다고 했어.”
한제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축기는 아니야. 이 비검에는 어떤 내력이 있지? 혹시 알고 있니?”
장호는 놀란 눈으로 한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곧장 입을 열지 않고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들은 적이 있어. 어느 산의 동굴에서 우연히 얻은 거래. 언제나 그 비검을 보물처럼 여겼지. 아, 그리고 그 칼집도 보물이라고 했어. 칼집이 비검보다 몇 배는 더 중요한 거라고 했어. 결단기에 이른 사람이 아니면 그 둘을 정복할 수 없을 거라더군.”
한제는 적당한 바위를 골라 걸터앉고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물었다.
“지묵 노인에 대해서도 좀 말해줄래? 대비를 해야 할 테니까.”
장호는 입에 물고 있는 고구마를 꿀꺽 삼키며 말했다.
“듣기로 지묵 노인은 이미 결단기에 이르렀대. 제자를 끔찍이 아끼는 사람이니 분명 우리를 뒤쫓을 거야. 난 등가성으로 가서 숨을까 해. 지묵 노인도 등가성에서 날뛸 수는 없을 테니, 거기서 나오지만 않으면 괜찮을 거야.”
“등가성이 어디야?”
장호는 들고 있던 고구마를 모두 입에 쑤셔 넣고 얼른 삼킨 뒤 입을 열었다.
“등가성은 북쪽에 있는 꽤 큰 수련 가문이야. 원영기에 이른 고수도 있다고 들었었지! 그곳에서 머물려면 매달 중급 영석 하나를 상납해야 한대. 이전부터 몰래 모아둔 영석이 꽤 있으니, 반년 정도 머물 수 있을 거야.”
한제는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 등가성이라는 곳에서 교역회도 열릴까?”
장호가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매달 한 번씩 대형 교역회가 열리는데 그 부근에 사는 수련생들이 모두 모여든대. 바꿀 물건이라도 있어?”
한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어쨌든 그곳에 들어가려면 일단 네게 신세 좀 져야겠다.”
등가성은 조나라 북방에서 꽤 명성을 날리고 있는 수련 가문의 성으로 그 가문의 시조인 등형삼은 원영기에 접어든 게 500년이 채 되지 않아, 4성 이상의 수련국의 전쟁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는 무봉골의 타국 출신 관리로 지위도 높고 신분도 뛰어났다. 등가성은 큰 문파는 아니었으나, 이런 시조를 가진 덕에 굳이 시비를 걸어오는 이는 없었다.
매달 초하룻날 열리는 등가성의 교역회는 많은 수련생들이 함께 모이는 장으로 이때면 등가성은 평소와 달리 시끌벅적해졌다.
사람이 많아지다 보면 마찰이 발생하기 마련이었다. 이에 등가성의 시조 등형삼은 등가성 내에서의 결투를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즉, 등가성 안에서는 싸울 수 없다. 이를 어긴 두 명의 결단기 고수를 등형삼이 직접 처단한 후로 등가성에서는 더 이상 싸움이 일어나지 않았다.
★ ★ ★
하늘에 떠오른 두 개의 무지개가 등가성 앞에서 멈추더니, 한쪽 무지개에 있던 자가 말했다.
“한제야, 등가성 안에서는 비행도 금지되어 있어. 그러니 이제 멈춰야 해.”
사방을 훑어본 한제의 시야에 등가성이 들어왔다. 도시라기보다는 마을이라고 하는 게 더 어울릴 정도로 작은 곳이었다.
성 밖의 대문은 등가성의 제자 둘이 지키고 있었다. 드나드는 사람들의 안내와 통행증 발급을 맡고 있는 듯했다. 신식으로 훑어보니 둘 모두 장호와 마찬가지로 응기 3단계에 이르러 있었다.
한제와 장호는 길게 늘어선 줄의 맨 뒤에 서서 신식으로 주위를 꼼꼼히 살폈다. 가장 수준이 높은 자도 아직 응기 13단계를 넘지 못했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그들 순서가 됐다. 한데 그때, 하늘 저 멀리에서부터 누군가가 빠른 속도로 접근해오고 있었다. 그에게서는 강력한 기운이 풍겨왔다. 신식으로 그를 훑어본 한제의 가슴이 순간 철렁했다. 이제 서른 정도 됐을까 싶은 청년이었지만 이미 축기에 이르러 있었던 것이다.
얼굴에 다소 그늘이 진 그 사람은 순식간에 성문이 있는 곳으로 와 소매를 휘둘렀다. 그러자 미친 듯한 바람이 몰아쳤고 힘이 약한 몇몇 사람은 바람의 힘을 이기지 못해 바닥에 나뒹굴었다.
장호 역시 한제가 붙잡아주지 않았다면 저 멀리 나가떨어졌을 터였다. 하지만 한제도 뒤로 몇 걸음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냉정하게 상대를 바라보았다. 청년은 가볍게 콧방귀를 뀌더니 성문 쪽으로 걸어와 허리춤의 출입 증명서를 내밀었다. 성문을 지키던 두 제자의 표정이 공손하게 변하더니, 그중 한 명이 직접 그를 모시고 성 안으로 들어갔다.
“저 사람의 수준은 어느 정도기에 손짓 한 번에 이렇게까지…”
“축기야.”
장호는 다소 두려운 기색으로 물었고 한제는 짧게 답했다.
이내 자신들 차례가 되자 장호는 얼른 저급 영석 두 개를 내놓았고 두 사람은 무사히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장호는 이곳에 여러 번 방문해 본 듯 익숙하게 한 객잔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도 저급의 영석 두 개를 지불한 뒤 방 두 칸을 얻었다.
“영석이 많지 않아. 이번에 손에 넣은 그 5백 년 묵은 인삼이 좋은 가격에 팔리기를 바라자고. 딱 반으로 나누는 거다.”
장호가 한제에게 웃으며 말했다.
두 사람은 몇 마디를 나눈 뒤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한제는 가부좌를 틀고 방 안에 앉아, 백전에게서 얻어낸 비검과 칼집을 꺼내 한참 동안 살폈다. 비검을 한쪽으로 던져놓은 그가 오른손으로 결인하자 금색의 빛 한 줄기가 비검에서 튀어나와 허공에서 흩어졌다.
순간, 그 비검은 마치 살아나기라도 한 듯 웅웅 소리를 내며 허공을 날았다. 어찌나 민첩하게 움직이는지 금방이라도 방 밖으로 빠져나갈 것 같았다.
그러다 무언가에 부딪히기라도 한 듯 비검은 무형의 벽 앞에 멈추고 말았다. 앞이 가로막히자 다른 방향으로 날아가려 했으나, 그 방향 역시 보이지 않는 벽으로 막힌 상태였다. 비검은 여전히 웅웅거리며 크게 진동하더니 날카로운 검 끝으로 한제를 겨냥했다.
한제는 침착한 표정으로 급하지도 느리지도 않게 저물대를 두드려 생명 유지 옥패를 꺼낸 뒤 두 손을 결인했다. 그러자 옥패는 빛을 번쩍이더니 금색 빛을 한 줄기 뿜었다. 비검은 그 금색 빛에 겁을 먹은 듯 얼른 뒤로 물러났다.
한제가 손짓하자 금색 빛은 비검을 뒤쫓지 않고 한제의 몸을 맴돌았다. 비검은 더는 한제 쪽으로 다가올 생각을 하지 못한 채 사방에 마구잡이로 부딪히며 빠져나갈 구멍을 찾았고 갈수록 그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한제는 입을 벌려 영력을 토해냈다. 그 영력은 빠르게 비검을 감쌌다. 비검은 맹렬하게 빛을 번득이더니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가 방문이 있는 쪽에서 다시 나타나 밖으로 달아나려 했다.
이때 비검은 검은색에서 남색으로 변해 있었고 번득이던 빛은 약간 어두워졌으며, 심지어 웅웅거리던 소리도 훨씬 줄어들었다.
한제는 오른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의 몸을 맴돌고 있던 금색 빛이 쏜살같이 튀어나가 비검을 뒤쫓았다. 비검의 웅웅거리는 소리가 급격히 빨라졌다.
금색 빛의 위협 아래, 비검은 천천히 뒤로 물러났지만 곧 다시 빛을 번득이며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가 이번에는 다시 창가 쪽에서 나타났다. 이때 또 비검의 색은 남색에서 초록색으로 변해갔다. 백전과의 싸움에서는 보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그제야 한제는 뭔가 깨달은 듯 눈을 번득였다. 비검의 색은 순간이동과 관련이 있었다. 주인의 영력에 의한 통제가 없다면 매순간 이동을 할 때마다 영력의 소모가 큰 모양이었다.
“영력이 큰 법보일수록 정복하기가 어렵지. 그 녀석의 주인을 죽였지만 그가 가지고 있던 물건을 정복하려면 적지 않은 힘이 들게다.”
사도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제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이 비검은 영기가 깃든 데다가 순간이동을 하는 능력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한제도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리고 비검의 놀라운 힘을 깨닫게 될수록 한제는 어떻게든 이 법보를 정복하고 싶은 욕구가 커져만 갔다.
비검이 막 창문 밖으로 나가려하던 그때, 한제는 두말 않고 오른손으로 옥패를 들어올렸다. 그러자 금색 빛 한 줄기가 또 뿜어져 나왔다. 두 줄기의 금색 빛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빠르게 비검을 가로막았다. 비검은 또다시 순간이동을 했지만 이번에는 금색 빛의 추격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검은 더 이상 순간이동을 하지 못하고 두 줄기의 금색 빛에 쫓겼다. 때맞춰 한제가 영기를 한 모금 토해내자 비검은 깜빡거릴 틈도 없이 곧장 영기에 감싸였다.
두 갈래의 금색 빛은 두 마리의 뱀처럼 영기 바깥쪽에서 맴돌며 비검이 빠져나가려고만 하면 곧장 달려들어 단단히 붙잡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