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362
“크르르르.”
포효를 마친 기린은 낮게 으르렁대며 꼽추 노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뒤를 이어 열 개가 넘는 주요 혼백이 모습을 드러냈다.
꼽추 노인은 속으로 비명을 내지르며 뒤로 몸을 돌려 달아났다. 오래지 않은 과거에 자신을 피해 미친 듯이 달아나던 녀석에게 이제는 자신이 쫓기는 신세가 됐으나 그는 비참하다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혼백은 혼백일 뿐이라, 영변기 수준의 혼백 하나둘쯤은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심지어 네댓 개의 영변기 혼백이라 해도 패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 허나 그 수가 열을 넘는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특히 저 기린의 혼백은 흉포하기가 이를 데가 없었다.
더구나 일반적인 수준의 혼백 중 상당수는 선유족의 것이었다. 당시 연혼종에 의해 숨을 거둔 선유족인들의 혼백인 듯했다.
꼽추 노인이 달아난 순간, 산골짜기의 구불구불한 좁은 길에서 한제를 쫓아온 여인이 나타났다. 한데 산골짜기 안에서 벌어진 일을 본 여인은 한제가 아니라 꼽추 노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한제는 꼽추 노인에게는 더 이상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는 다시 선검을 휘둘렀다.
쾅! 쾅! 쾅!
지축을 뒤흔드는 몇 번의 충돌음에 이어 물 속성 명혼을 가두고 있던 문양에 수많은 균열이 일었다. 그러자 그 안에 있던 영물은 물방울 형태에서 한 여인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 여인을 본 순간… 한제의 마음에 파도가 몰아쳤다.
“모완…”
여인의 용모는 모완과 매우 비슷했다.
한제는 다시 한번 검을 휘둘러 문양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그러자 그 안에 있던 여인이 요사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물안개가 되어 빠르게 빠져나왔다.
한제는 그녀가 도망치게 둘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수준은 거의 영변기 중기에 가까웠다.
한제는 사방의 수많은 혼백들에게 다급히 지령을 내렸다. 혼백들은 빽빽하게 모여 서로 하나로 이어졌고 꼽추 노인을 쫓아간 몇몇 영변기 수준의 주요 혼백을 제외한 나머지 주요 혼백들도 전부 모여들었다.
순간, 강력한 위압감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러자 여인은 사방을 둘러보다가 한제를 보더니 가볍게 웃었다.
“나를 구해주더니 이제는 또 가두려 하는구나. 이유가 무엇이냐?”
한제는 덤덤하게 말했다.
“살고 싶다면 내 말을 들어라.”
그 말에 여인은 그 말을 듣고 요사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나를 죽이겠다고? 나를 죽일 수 있을 것 같은가? 나를 가둬둘 수는 있겠지만 그 역시 시간 낭비다. 금방 빠져나갈 테니까.”
더 이상 시간을 끌기 싫었던 한제는 존혼번을 움켜쥐었다.
“융합!”
단 두 글자에 사방의 수많은 혼백들이 모여들어 빠르게 주요 혼백에게로 녹아들었다. 눈 깜짝할 사이 영변기 후기 수준을 월등히 뛰어넘는 여섯 개의 주요 혼백만이 남았다.
이 혼백들은 서늘한 빛을 번득이며 여인을 둘러쌌다.
“소멸!”
한제가 낮게 외쳤다.
그 한 마디에 수많은 혼백들이 녹아든 여섯 개의 주요 혼백은 각자 법술을 부리며 여인을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오호호~. 이 정도로 나를 죽이겠다고 한 것인가?”
법술의 파동이 확산되던 그때, 여인이 요사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몸을 훌쩍 날렸다. 그리고 수증기 형태가 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허나 이는 한제가 기다리던 상황이었다. 이렇게 수증기나 물방울 형태가 되어야만 그 안에 섞여 있는 모완의 명혼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한데 그 순간, 온 산골짜기가 우르릉하고 흔들렸다. 지면으로부터 느껴지는 흔들림이었다.
이곳뿐만 아니라 내부와 외부를 포함한 주작묘 전체가 진동하고 있었다.
꽈르릉!
주작묘의 진동이 격렬해짐에 따라 하늘에서는 무언가 갈라지는 듯한 소리가 격렬하게 들려왔다. 마치 셀 수 없이 많은 거대한 손들이 하늘을 찢고 있는 것 같았다.
순간 수많은 공간의 균열이 나타나더니 그 안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온몸을 꽁꽁 얼려버릴 듯 서늘한 바람이었다. 외부 세계에서 본 공간의 균열과 달리 수준이 높다고 해서 무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것은 공간의 균열이 아니라, 수성의 결정에서 발산되는 기이한 힘으로 만들어진 차원의 균열이었다. 영변기 수련자라 해도 그 안에 들어가면 예외 없이 혼백이 소멸되어 죽어버리고 말았다.
드디어 수성의 결정이 붕괴하기 시작한 것이다.
주작묘 안의 대지가 갈라져 곳곳이 무너져 내리면서 수많은 수련자가 숨을 거두었다. 명혼의 영물들 역시 이 재난에서 무사하지 못했다. 주작묘 안은 순간 짙은 죽음의 기운으로 뒤덮였다.
한제가 있는 산골짜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지가 갈라져 허무의 공간이 생겨났고 차원의 균열이 셀 수도 없이 나타나 사방의 모든 것을 삼켜대고 있었다.
한제는 존혼번을 꺼내 모든 혼백을 거둔 뒤 빠른 속도로 그곳을 벗어났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의 눈은 줄곧 모완과 비슷한 그 여인에게 향해 있었다.
차원의 균열이 나타나자 여인의 표정에 전에 없던 두려움이 어렸다. 여인의 몸도 천천히 무너지더니 결국 펑 하고 무수히 많은 물방울로 갈라졌다. 물 속성 명혼으로 이루어진 영물의 진정한 죽음이었다.
“모완!”
한제는 다급히 날아들어 차원의 균열들을 피해가면서 무너져 내리는 물방울들에 이르렀다. 그리고 오른손을 뻗어 반짝이는 물방울 하나를 움켜쥐었다.
물방울을 움켜쥐자마자 한제는 곧장 물러났다. 순간, 한 줄기 차원의 균열이 눈앞에 나타나면서 한제의 소맷자락이 무언가에 삼켜진 듯 사라졌다.
한제의 등을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그는 차원의 균열을 피해 겨우 산골짜기를 빠져나갔다.
이 진동이 지속된 것은 고작 열을 셀 정도의 시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진동이 멈추었을 때 주작묘는 완전 달라진 상태였다. 하늘과 땅 곳곳에는 수많은 차원의 균열이 나 있었고 어떤 곳에서는 영력의 충격만으로도 붕괴가 일어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소멸되어 버렸다.
주작묘는 더욱 위험한 곳이 되어가고 있었다.
수성의 결정은 천천히 붕괴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주작이 의도한 바였다.
흔들림이 멈추자 한제가 있던 산골짜기는 완전히 폐허가 된 평지가 되어 있었다. 직접 보고도 믿기 힘든 상황이었다.
산들바람이 불어왔다. 온몸의 땀이 식으며 서늘해졌다.
한제는 고개를 숙여 폐허가 된 발아래의 허무를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는 균열들이 벌어졌다가 움츠러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한제는 미간을 문질러 모완의 명혼을 석주 공간에 집어넣은 후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천천히 날아갔다.
문득 한제의 시선이 반쯤 무너진 산맥으로 향했다. 그곳의 부서진 돌 위에 반 정도밖에 남지 않은 꼽추 노인의 몸이 누워 있었다. 노인의 두 눈에 빛이라고는 없었다. 허약한 원신이 그 몸에서 빠져나오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좀 전의 재난 중에 갑작스레 나타난 차원의 균열로 몸 반쪽과 원신만 남은 듯했다.
“크으… 하필 이럴 때…”
한제의 시선을 느낀 꼽추 노인의 원신은 초조한 표정으로 재빨리 몸에서 빠져나와 달아났다.
한제는 피식 웃으며 그 뒤를 쫓았다.
그때, 갑자기 전방에 어스름한 빛이 번득이더니 허공에서 아가리 같은 것이 기척 없이 나타났다.
노인의 원신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이미 늦은 때였다. 갑자기 나타난 차원의 균열은 노인의 원신을 삼키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꼽추 노인의 원신은 그렇게 흔적도 없이 소멸됐다.
한제는 이 허무한 광경에 잠시 멈춰 서서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작성은 한 차례 붕괴를 겪은 뒤 매우 위험한 곳이 된 상태였다. 이에 한제는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작게 한숨을 내쉰 그는 다시 몸을 날렸다.
탁삼의 사자
주작성, 수마해.
이곳은 비교적 일찍 선유족의 공격을 받은 곳이었다. 선유지로부터 가까운 곳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수마해를 채우고 있던 안개가 사라진 뒤로 다른 수련국 연합이 공격을 해와 이미 한 차례 난리가 났던 터라 선유족의 공격에 저항할 여력도 없었다. 이미 수마해는 선유족의 땅으로 전락한 후였다.
수마해 안의 쇄성란 밖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온몸이 죽음의 기운으로 뒤덮인 그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는데 그의 사방에서는 마치 해골의 숲처럼 수많은 해골의 허상들이 끝도 없이 빽빽하게 늘어서서 기이하게 번득였다.
그는 망설이는 듯한 눈빛으로 쇄성란을 바라보았다.
“당시 이 천벌의 가닥은 상고 시대 수련자가 아니라 상고 시대의 법기를 제련하던 어떤 수련자가 일으킨 것이었지. 지난 수백 년간 주작성을 돌아다녔으나 상고 시대의 수련자는 한 명도 발견하지 못했다. 너무도 배가 고프구나. 오직 이곳에서만 상고 시대 수련자의 냄새를 맡을 수 있으나 안타깝게도 너무나 위험해. 갈 것인가 말 것인가!”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눈을 번득이며 고개를 저었다.
“됐다. 배고픔 때문에 목숨을 버릴 수는 없지. 지난 몇 년 동안 부상이 약간이나마 회복됐으니 이제 주작성을 떠날 때가 됐다. 만약 사도환 그자에게 발각된다면 지금 상태로는 대적할 수 없어.”
그는 계속해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검존 능천후 그 친구, 천운성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군. 한번 가봐야겠어. 그 친구를 불러낸다면 사도환에게 그 구슬의 행방을 물으러 갈 때도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야!”
바로 그때, 갑자기 그의 눈이 번득였다.
“너는 기척도 없이 접근하여 적을 처리하는 것을 좋아했지. 오랜만이군!”
그의 덤덤한 목소리에 허공에서 거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뒤이어 하늘 끄트머리가 어둑해지더니 허공에서 바닷물과 함께 엄청난 기세가 뒤섞인 포효가 터져 나왔다.
그 바닷물에서 몰아치는 성난 파도 위에 한 남자 서 있었다. 짙은 남색의 옷에는 금색 실로 기묘한 꽃무늬가 수놓아져 있었다.
“욕심도 많군. 이곳까지 파괴할 생각인가?”
평범한 외모였으나 사내의 두 눈에는 흉악한 빛이 번득였다.
해골의 허상을 두른 남자가 사내를 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이곳이 마음에 든다면 들어가 봐. 나는 이만 가볼 테니!”
말을 마친 그는 몸을 훌쩍 날려 검은색의 긴 잔영을 남기며 하늘을 뚫고 올라 종적을 감추었다.
바닷물 위에 선 남자는 생각에 잠겨 있다가 몸을 날려 쇄성란 바깥에 이르렀다. 그의 발아래에 깔려 있던 바닷물이 곧장 응결되어 짙은 남색 결정이 됐다. 사내는 바닥에 내려서더니 그 결정을 삼켰다.
“이상하군. 그 욕심쟁이가 보물도 없는 곳에 발을 들였을 리가 없는데… 1만 년 전 내가 이 주작성에 찾아왔을 때에도 그는 이곳에 얼마간 머물러 있던 중이었지. 부상을 치료하러 왔다고는 했지만 뭔가 이상해. 이곳이 목표 아니었을까?”
남자는 잠시 고민하다가 몸을 날려 쇄성란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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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신의 땅 깊은 곳, 피바다에 유일하게 남은 거대한 돌기둥 위에는 피처럼 붉은 머리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고개를 번쩍 치켜든 그의 헝클어진 머리칼 사이로 흉악한 빛이 드러났다. 그 붉은 두 눈은 모든 생명을 두려움과 절망에 떨게 만들었다.
그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걸렸다.
“또 한 놈이 오는 군. 이 탁삼이 풀려날 날이 이제 머지않았다. 이한제, 내가 찾으러 갈 때까지 기억의 유산을 잘 보존하고 있어라. 내가 가진 힘의 유산이 없는 이상 기억의 유산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게다가 네 기억의 유산도 완전하지는 않아. 기억의 유산의 결정은 지금 내 손에 있으니까.”
탁삼은 무언가 재미있는 일이라도 생각난 것처럼 키득거렸고 돌연 웃음을 뚝 그쳤다.
“나는 모든 힘을 쏟아부은 끝에 마침내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마지막 기억의 유산 결정을 찾아냈다. 덕분에 많은 것들을 기억해내게 됐지. 지난 몇 년 동안 주작성 내부에서 기이한 힘이 천천히 자라나고 있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