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366
“홍접, 널 도와주겠다.”
한제는 굳은 눈빛으로 몸을 훌쩍 날려 도끼를 내던졌다. 도끼는 하늘을 무너뜨릴 듯 강력한 기세를 일으키며 홍접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 기세에 지면에는 균열이 일었고 모래바람이 솟구쳐 올랐다.
“천우, 내 마지막 상대가 너라서 영광이다.”
홍접은 고개를 들어 거대한 도끼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앞에 놓인 장미에서 나타난 신식은 푸른 연기가 되어 육신의 미간으로 돌아갔고 그 순간 그녀의 두 눈은 더 이상 전의를 번득이지도 텅 비어 있지도 않았다. 그녀의 두 눈은 맑았고 고고했으며, 슬펐다. 또한 깊은 분노가 배어 있었다.
홍접은 입가에 천천히 미소를 띠었다. 진정한 기쁨에서 비롯된, 그녀에게서는 실로 보기 드문 웃음이었다.
모든 집념을 내려놓은 그녀는 천진한 소녀 같았다.
그 무렵, 도끼가 하늘에서 미친 듯한 기세로 뚝 떨어졌다.
홍접의 얼굴에 드리운 웃음은 아름다웠다. 그 웃음에는 짙은 거만함과 고고함이 어려 있었다. 그리고 그 거만함은 곧 홍접 그 자체였다.
홍접은 일생을 그렇게 살았고 죽음을 앞둔 이 순간에도 그랬다. 하늘을 찌를 듯한 거만함과 나비처럼 나풀거리는 붉은 옷⋯⋯.
콰르릉!
도끼가 광풍을 일으키며 다가왔다.
홍접의 일생은 2백 년이 채 되지 않았다. 나비처럼 짧은 삶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아름다움과 고고함은 그녀를 만난 모든 사람의 기억에 영원히 남을 것이었다. 타고난 거만함 때문에 그녀를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고 일부러 감정을 끊어냈기에 진정으로 가까웠던 이 역시 적었지만 그녀는 홍접이었다.
도끼는 이제 홍접과 1백 척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이르러 있었다. 죽음의 기운이 훅 끼쳐왔다. 저항하기를 원한다면 충분히 저항할 수도 피하기를 원한다면 충분히 피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홍접은 저항하지도 피하지도 않았다. 그녀의 두 눈은 점점 고고함으로 물들었다.
허나 그 안에는 일말의 아쉬움도 깃들어 있었다. 아주 깊은 곳에 숨겨진 감정이었지만 한제는 이를 감지할 수 있었다.
홍접의 눈에는 자신을 멸하러 다가오는 도끼가 아니라 미소를 짓고 있는 스승님이 보였다. 어린 시절 보았던 그 자애로운 모습이었다. 소녀였던 자신에게 매우 따뜻했고 때로는 엄했던 스승과의 기억이 하나하나 머릿속에 떠올랐다.
“스승님, 제자가 곧 찾아갈게요.”
이어서 또 하나의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허약한 소년이었다. 그 소년은 수줍은 미소를 띤 채 시종일관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홍접의 입가에도 미소가 드리웠다.
눈앞이 아른거리더니 이번에는 애정이 담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한 청년이 나타났다. 그는 홍접을 위해 곤극 채찍까지 훔쳐다 줄 정도로 그녀를 사랑했던 이였다.
“모두들 안녕⋯⋯.”
홍접은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뺨을 타고 눈물이 흘렀으나, 결코 슬픔의 눈물은 아니었다.
도끼가 그녀에게 이르렀다.
홍접의 앞에 있던 장미는 눈부신 빛을 발하면서 꽃잎을 하나씩 떨어뜨렸고 그 꽃잎은 사방으로 흩어져 결국 소멸됐다.
“내년 봄, 주작성에 장미가 만발할 때, 북쪽 끝 평원에 푸른 장미 한 송이가 피어날 것이다. 이한제, 내가 네게 주는 선물이다.”
꽃잎을 잃은 장미에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꽃술뿐이었다. 그 역시 도끼가 내리쳐진 순간 붕괴하여 재로 변하더니 허공으로 흩어졌다.
홍접의 미간에도 붉은 상흔이 나타났고 그 상흔으로부터 피가 뿜어졌다.
“홍접, 네 생에 한 번의 재난이 있을 것이다. 생사를 위협하는 그 재난을 잘 넘기면 평생 평안하게 살 수 있지만 그러지 못하면 한을 남긴 채 죽게 된다. 이 스승이 평생 심혈을 기울여 낸 점괘이니 항상 신중하도록 해라.”
“홍접, 네 재난은 분명 그 천우라는 녀석으로 인해 일어날 것이다. 그자를 살려둬서는 안 된다.”
스승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스승님, 말씀하신 대로 제 삶에 재난이 찾아왔어요. 하지만 이 홍접에게 재난을 일으킨 것은 천우가 아니라 건풍이었어요.’
도끼가 홍접의 몸을 가른 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땅에 박혔다. 지면에 깊은 구덩이가 생겨났고 그 구덩이로부터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홍접의 몸은 피 안개로 흩어졌다. 맑은 바람이 불어와 그 피 안개를 천천히 흩었다. 붉은 핏방울이 세상을 퍼져 나갔다.
하늘의 딸, 홍접이 죽었다.
그 순간, 홍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한제⋯⋯ 날 위해⋯⋯ 건풍을⋯⋯ 죽여… 주겠느냐⋯⋯?’
한제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홍접… 나비처럼 짧지만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남겼군. 잘 가게나.’
한제는 분노인지 슬픔인지 알 수 없는 씁쓸한 심정으로 눈을 감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두 눈을 떴다.
홍접이 사라진 자리에는 옥패 하나와 곤극 채찍이 남아 있었다. 그 두 물건은 허공에 얌전히 떠오른 채 쓸쓸한 기색을 발산했다.
“건풍의 경지는 무한의 욕망이다. 그는 모든 것을 삼켜 모든 것을 얻으려 한다. 허나 경지를 어떻게 흡수할 수 있겠는가?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경지가 아니라 경지를 깨닫는 순간 천도와 통하는 그 느낌이다. 그는 다른 사람의 경지를 삼킴으로써 서로 다른 깨달음을 얻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경지를 끊임없이 완벽하게 닦아 절정에 이를 수 있기를 원한다.”
홍접이 남긴 옥패에는 그녀가 지난 몇 년 동안 건풍을 관찰하며 보고 느꼈던 것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한제는 묵묵히 소멸해가는 홍접을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쉬며 도끼를 저물대에 챙겨 넣었다. 그러더니 허공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공중에 떠 있던 곤극 채찍이 번쩍 하고 그의 손에 쥐어졌다. 한제는 그것을 자세히 살핀 후 저물대에 넣었다.
곤극 채찍에는 문정기 수준의 신식이 한 줄기 걸려 있었는데 한제로서는 그것을 제거할 방법은 없었다. 후에 십억존혼번으로 문정기 수준의 혼백을 만들어 채찍에 걸려 있는 신식을 거둘 생각이었다.
채찍까지 잘 챙겨 넣은 한제는 다시 홍접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발을 살짝 굴렀다. 그의 몸은 연기가 되어 그 자리에서 사라지더니 영산을 향해 이동했다.
★ ★ ★
운작이 이끄는 붉은 구름은 영산 위에 이르러 있었다. 그 붉은 구름은 산꼭대기에 이른 뒤 붉은 폭풍이 되어 내리쳤고 운작이 그 폭풍으로부터 걸어 나왔다. 무태가 공손하게 뒤를 따랐다.
운작은 산꼭대기에서 어깨에 원숭이를 태운 노인을 보고는 흠칫 놀라더니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어느 도우의 몸을 훔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서 진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겠느냐!”
노인은 두 눈을 번쩍 뜨고 운작을 슬쩍 훑어보다가 괄괄하게 말했다.
“초면에 불쑥 진짜 모습을 드러내라니, 무례하군. 더구나 감히 내게 대적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노인의 어깨에 앉아 있던 작은 원숭이가 붉은 두 눈으로 노려보며 운작을 향해 이를 드러냈다.
운작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 원숭이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시체 인형이었군.”
그 말에 노인 역시 붉은 빛이 번득이는 눈으로 운작을 노려보았고 원숭이가 끽끽 소리를 질렀다. 노인의 눈에서 번득이던 붉은 빛은 그 즉시 흩어져 사라졌다.
“나는 모력해다.”
말을 마친 그는 이내 두 눈을 감고 다시 좌선을 했다.
‘영변기 후기로 보이나 기이한 느낌이 풍기는군. 저자는 주작성 사람이 아니다.’
운작은 노인을 훑어보던 시선을 거두어 상공의 거대한 문을 바라보았다.
그가 선대 주작에게서 들었던 것과 실제 주작묘에서 본 광경은 너무나도 달랐다.
명혼으로 이루어진 영물은 분명 수성의 결정이 가진 기이한 힘으로 만들어진 존재로 선대 주작이 그에 대해 뭐라고 말했는지도 운작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영물들은 오직 수성의 결정 내부에만 존재한다고 했다. 허나 이 영산에 대한 이야기만큼은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모이다
영산 위의 거대한 문은 1대 주작의 묘실(墓室)로 들어가는 유일한 통로이고 수성의 결정은 바로 그 1대 주작의 묘실 안에 있었다. 다만 이 문은 수성의 심장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열 수 없었다. 물론 그에게는 수성의 심장이 없었으니,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문이 어느 정도 부서질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문을 자세히 살피던 운작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지더니 영산 아래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잠시 후, 건풍이 영산 아래쪽에서 나타났다. 그는 잔뜩 경계하며 운작을 살피더니 잠시 고민하다가 몸을 훌쩍 날려 한쪽 구석의 공터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이어 몇몇 사람들이 속속 도착했다. 그중 둘은 선유족의 팔엽 술주사로 운작을 보자마자 희색을 드러내며 공손하게 곁으로 다가와 섰다.
푸른 옷을 입고 얼굴에는 흉악한 가면을 쓴 한 수련자도 도착했는데 그의 가면에서는 푸른 빛이 번득여 신식으로 탐지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는 영산에 도착한 뒤 사방을 한 번 둘러보더니 말없이 한쪽에 앉았다.
한 시진 뒤, 하늘 저 멀리에서 세 갈래의 무지개가 다가왔다. 그때, 그 거대한 문이 웅웅 소리를 내며 격렬하게 떨렸고 그 위에 있던 미세한 금은 더 짙은 균열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제는 영산뿐만 아니라 온 주작묘가 진동하고 있었다.
첫 번째 진동과 마찬가지로 여기저기서 대지가 붕괴하여 허무로 돌아갔고 차원의 균열이 대량으로 나타나면서 하늘 역시 곳곳이 무너져 내렸다.
세 갈래의 무지개는 결국 영산에 발도 딛지 못하고 차원의 균열 안으로 빠져들었다.
이번 진동은 첫 번째 진동보다 몇 배는 길게 지속됐다.
다시 안정을 찾았으나, 그 사이 주작묘 내부는 완전히 무너져 내려 차원의 균열만 가득한 허무의 공간으로 바뀌어 버렸다.
수성의 결정이 일으킨 두 번째 붕괴로 인해 영산 위의 거대한 문에는 점점 많은 균열이 생겨났고 심지어 그중 몇몇 개는 서로 연결되기까지 했다.
떨림이 멎자 운작은 그 거대한 문을 향해 오른손을 휘둘렀다. 한 줄기 선력이 그의 손에서 발산되어 거대한 손이 되더니 그 문에 쿵 떨어졌다.
그 충격에 문은 다시 진동했지만 문의 균열은 더 늘어나지 않았다. 그저 운작의 손자국만 허공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운작은 미간을 살짝 구긴 채 뒷짐을 지더니 그늘진 얼굴로 다음 붕괴를 기다렸다. 한데 그는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 수시로 산 아래쪽을 훑었다.
그때, 한 줄기 보라색 빛이 영산 아래쪽에서부터 걸어 올라왔다. 얼굴에 보라색 면사를 두른 여인이었다.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의 사방에는 이마에 번득이는 문양이 새겨진 노인 네 명이 있었는데 모두 화신기 후기 수준인 그들의 몸에는 수많은 상처가 나 있었다.
여인은 자심이었다.
그녀와 무태가 화신기 수준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각각 여러 개의 문양 꼭두각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운작이 이들의 안전을 위해 준 것이었다.
자심을 본 운작은 고개를 살짝 끄떡였다. 자심은 한이 서린 눈으로 건풍을 슬쩍 바라보더니 운작을 향해 걸어갔다.
건풍은 자심이 나타난 순간부터 그녀에게서 두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얼굴이 잔뜩 구겨진 채로 짙은 살기를 드러내고 있었는데 자심을 향한 두 눈에는 고통스러운 갈등의 빛이 스쳐갔다.
“못된 년!”
건풍은 자심을 노려보며 힘주어 말했다.
자심은 건풍을 힐끗 쳐다봤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두 눈에는 하늘을 덮어버릴 듯 짙은 원한이 어렸다.
건풍은 조심스레 운작을 살피고는 깊게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는 마지막으로 자심을 다시 한 번 힐끗 쳐다본 후 두 눈을 감았다.